빛이 없었다.
대리석 복도는 아르스 마그나와 달랐다. 결은 수직으로 뻗었고, 이음새는 완벽했다. 머리카락 한 올 끼워 넣을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정밀함이 오히려 숨통을 조였다. 에린의 발소리가 울렸다. 굽이 대리석을 두드릴 때마다 양쪽 벽에 부딪힌 반향이 정확히 같은 간격으로 되돌아왔다.
이건 건축이 아니다.
에린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양손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성황청의 대신전은 수백 번 드나들었지만 지하 성전은 처음이었다. 대심판관 아르카디우스의 집무실에서 빼낸 통행 인장이 없었다면 이 계단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다.
마족의 뿔이 관자놀이에서 욱신거렸다. 마족화의 흔적은 후드 아래 감춰야 했고, 성물의 잔광으로 피부 위의 비늘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한계가 체감됐다. 손등의 인간 피부가 군데군데 갈라져 그 틈으로 짙은 남빛이 비쳤다.
복도가 꺾였다.
직각이었다. 정확히 90도. 그 너머로 또 하나의 직각이, 그 뒤로 또 하나가 이어졌다. 에린은 후드 안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벨리알이라면 이 복도를 보고 뭐라 했을까. '이건 사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길들이기 위한 통로야.'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맞다. 이 직선과 직각의 연속은 걷는 자에게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앞으로. 오직 앞으로. 벨리알의 설계가 침입자의 심리를 유도하면서도 선택의 환상을 남겨두는 것과 정반대였다.
에린은 외투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벨리알의 작업실에서 가져온 설계도 케이스. 그 안에는 아르스 마그나의 지맥 안정기 회로도 사본이 접혀 있었고, 여백에는 벨리알이 적어둔 이름들이 빼곡했다. 죽은 부하들의 이름. 그 이름들 사이에 끼어 있던 한 줄의 인간어 주석.
'제물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그때는 의미를 몰랐다. 벨리알에게 물었을 때 그는 대답 대신 톱니바퀴의 각도를 재기 시작했고, 에린은 더 묻지 않았다. 지금, 이 강요된 질서의 복도를 걸으며 그 문장이 목구멍 안쪽에서 가시처럼 걸렸다.
복도의 끝이 보였다.
거대한 원형 문이었다. 성황청의 공식 문양이 아닌, 그보다 훨씬 오래된 각인이 문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에린은 문 앞에 서서 손바닥을 대리석 표면에 가져다 댔다. 차가움이 아니었다. 진동이었다. 문 너머에서 무언가가 맥동하고 있었고, 그 리듬은 에린의 가슴팍에 매달린 성물의 파동과 정확히 일치했다.
성물이 빛나기 시작했다.
에린이 제어한 것이 아니었다. 가슴팍의 창 파편이 스스로 옷감을 뚫고 푸른 광채를 쏟아냈다. 문의 각인들이 그 빛에 반응하여 하나씩 점등되었다. 원형 문이 천천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며 양쪽으로 갈라졌다.
문 너머의 공간은 성전이라기보다 심장에 가까웠다.
원형의 거대한 공동이 지하 깊숙이 펼쳐져 있었다. 천장까지의 높이는 가늠할 수 없었고, 벽면을 따라 수천 개의 수정관이 위로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관 안에서 흐르는 것은 빛이었으나 그 색이 문제였다. 성황청이 신성한 금빛이라 부르는 그 광채의 원천이 수정관 아래쪽에 있었다.
에린의 발이 멈췄다.
수정관의 뿌리가 모여드는 바닥 중앙에 거대한 제단이 놓여 있었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단 아래의 유리 바닥을 통해 그 밑이 보였다. 수백, 아니 수천 개의 영혼석이 제단 하부에 박혀 있었다. 영혼석 하나하나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빛이 아니라 형체를 잃은 얼굴들이었다.
일그러진 입. 벌어진 눈. 소리 없는 울부짖음.
에린의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짚으며 유리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성물의 빛이 더 강해졌고, 그 빛 아래서 영혼석의 표면에 새겨진 각인이 드러났다. 마족 봉인 술식이었다. 성황청의 성법이 아니라 고대 마족의 영혼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술식.
"이게…"
목소리가 갈라졌다. 에린은 유리 바닥 위에 손을 얹었다. 차갑지 않았다. 뜨거웠다. 수천의 영혼이 소멸하지도 못한 채 연소되는 온도가 손바닥을 달궜다.
성물이 폭주했다.
가슴팍의 창 파편이 옷을 찢고 튀어나올 듯 진동했다. 에린은 두 손으로 성물을 움켜쥐었으나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공명의 범위가 넓어지며 제단 전체가 울리기 시작했다. 수정관 안의 빛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 속에서 에린의 귀에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이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천의 목소리가 겹쳐 하나의 주파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수정관을 타고 위로 올라가며 성황청이 '신의 은총'이라 부르는 금빛으로 변환되고 있었다. 에린은 이 구조를 알고 있었다. 벨리알의 설계도에서 본 적이 있었다. 지맥 안정기의 마력 순환 회로와 원리가 같았다.
아니, 같은 게 아니었다.
벨리알의 지맥 안정기는 대지의 마력을 순환시켰다. 여기는 영혼을 연료로 태우고 있었다.
에린은 외투에서 설계도 케이스를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케이스를 열고 회로도를 펼쳤다. 성물의 빛이 도면을 비추자 벨리알이 적어둔 주석들이 선명해졌다. '제물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그 옆에, 성물의 빛이 아니면 보이지 않았을 잉크로 한 줄이 더 쓰여 있었다.
'아버지가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죽었다.'
에린의 손가락이 그 문장 위에서 멈추었다. 성물의 빛이 도면을 관통하여 아래쪽 유리 바닥까지 뻗어나갔다. 그 빛이 닿은 영혼석 하나가 다른 것들보다 유독 크게 맥동했다. 다른 영혼석의 세 배는 되는 크기. 그 안에 갇힌 형상은 일그러져 있지 않았다.
또렷한 눈. 닫힌 입. 뿔이 부러진 흔적.
에린은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아르스 마그나의 대전당에 걸려 있던 초상화와 같은 얼굴. 선대 마왕 벨제파르 아르스 노바.
"거룩한 빛의 원천이…"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가 되어 나오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유리 바닥 너머의 얼굴들이 성물의 빛 속에서 하나씩 선명해졌다. 뿔이 있는 자. 날개가 잘린 자. 꼬리가 끊긴 자. 모두가 마족이었다.
"동포들의 비명이었다니."
목소리가 원형 공동 전체에 울렸다. 에린은 무릎을 짚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수정관의 빛이 위로 올라가는 끝, 천장에 성황청의 대신전 바닥이 있을 것이다. 수백 년간 인간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 그 바닥 아래에서 마족의 영혼이 연료로 타고 있었다.
에린은 일어섰다.
다리가 흔들렸으나 서는 데 성공했다. 성물의 진동이 잦아들지 않았고 제단의 공명도 계속되었다. 에린은 설계도를 다시 접어 케이스에 넣으며 제단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벨리알이라면 이 구조의 약점을 찾았을 것이다. 모든 건축에는 하중이 집중되는 지점이 있고, 모든 순환 회로에는 병목이 있다.
제단의 후면에서 에린은 멈추었다. 수정관 하나가 다른 것들과 달리 검은색이었다. 빛이 흐르지 않는 관. 에린은 그 관의 표면에 손을 대었다. 성물이 반응했다. 이번에는 진동이 아니라 흡인이었다. 성물의 빛이 검은 수정관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관의 표면에 각인이 떠올랐다.
에린이 읽을 수 있는 문자가 아니었다. 벨리알의 설계도에서 본 적 있는 기호 체계였다. 마도 건축술의 기본 룬. 이 성전의 설계자가 마족이었다는 뜻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이 장치를 설계한 자는 마도 건축술을 알고 있는 마족이었다.
에린의 손이 외투 안쪽으로 갔다. 설계도 케이스의 금속 표면이 손끝에 닿았고, 그 차가움이 사고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됐다. 벨리알이 창시했다고 알려진 마도 건축술. 이 지하 성전은 수백 년 전에 지어진 것이었다. 시간이 맞지 않았다.
"네가 여기까지 왔군."
소리가 위에서 떨어졌다.
에린의 몸이 굳었다. 원형 공동의 상부, 수정관들이 모여드는 천장 근처의 관측 발코니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성황청 용사 협회장. 순백의 법의가 수정관의 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빛이 아래에서 올라온 것임을 에린은 이제 알았다. 마족의 비명으로 물들인 빛.
"조사관 에린. 아니, 이제는 그렇게 부르기 어렵겠구나."
협회장의 시선이 에린의 후드 아래를 꿰뚫었다. 관자놀이의 뿔. 손등의 비늘. 에린은 후드를 벗지 않았지만 숨길 수 있다는 환상은 이미 깨져 있었다.
"이게 뭡니까."
에린의 목소리가 원형 공동에 울렸다. 협회장은 발코니 난간에 손을 얹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표정에 죄책이나 당혹은 없었다. 정원사가 자신의 화단을 내려보는 것과 같은 시선.
"네가 보는 그대로다. 가호의 원천이지."
"이건 마족의 영혼입니다."
"맞다."
담담했다. 협회장은 발코니에서 몸을 기울이며 제단 중앙의 거대한 영혼석을 가리켰다. 벨제파르의 영혼이 갇힌 그 돌을.
"용사의 가호가 어디서 온다고 생각했나. 신의 은총? 세계의 축복?" 고개를 저었다. "마족의 영혼을 연소시켜 얻는 에너지다. 등급이 높은 마족일수록 출력이 높아지지. 하급 마족 천 명분의 영혼보다 마왕 하나의 영혼이 더 오래 탄다."
에린의 손이 성물을 쥐었다. 창 파편이 손바닥을 베었고 피가 성물의 표면을 적셨다. 피가 닿는 순간 성물의 빛이 변했다. 푸른빛이 사라지고 짙은 자색이 차올랐다. 마족의 피가 성물의 본성을 깨우고 있었다.
"그 창 파편은 원래 이 제단의 일부였다."
협회장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발코니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공동 전체에 설치된 음향 증폭 각인을 통해 소리가 모든 방향에서 동시에 울렸다.
"선대 마왕 벨제파르는 이 장치의 존재를 알아냈다. 그리고 파괴하려 했지."
에린의 손에서 피가 흘렀다. 성물의 자색 빛이 유리 바닥을 투과하여 벨제파르의 영혼석을 비추었다. 영혼석 안의 형상이 움직였다. 닫혀 있던 입이 벌어지려는 듯 떨렸다.
"이 장치는 자발적 제물로만 완성되는 구조였다. 누군가 스스로 영혼을 바쳐야 핵이 기동하지."
협회장이 말을 끊었다. 잠깐의 침묵이 수천의 비명 위에 내려앉았다.
"벨제파르는 이 장치를 파괴하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었다."
에린의 손이 멈추었다. 성물에서 피가 뚝, 유리 바닥 위에 떨어졌다. 그 한 방울이 바닥을 통과하여 벨제파르의 영혼석에 닿았다. 영혼석 표면에 균열이 한 줄 그어졌다.
"거짓말."
에린이 말한 것이 아니었다.
원형 문 너머, 에린이 걸어온 대리석 복도의 끝에서 목소리가 왔다. 차갑고 건조했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정확한 발음.
에린이 고개를 돌렸다.
벨리알 아르스 노바가 서 있었다. 복도의 직각 모서리를 막 벗어난 자리. 왼쪽 상반신의 붕대가 벗겨져 있었고, 재생과 괴사가 반복되는 살갗이 수정관의 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오른손에 들린 설계도 뭉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양피지가 대리석을 때리는 소리가 비명 사이로 날카롭게 울렸다.
그의 시선은 에린을 지나쳤다. 유리 바닥 아래의 영혼석을 향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갇힌 그 돌을.
벨리알의 오른손이 바닥에 떨어진 설계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접힌 종이의 모서리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가 원형 문의 경계를 넘어 성전 안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