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면이 잘못된 줄 알았다.
벨리알은 작업대 위에 펼쳐진 양피지를 세 번째 뒤집어 확인했다. 아버지의 필체. 잉크가 번진 곳마다 미세한 마력 잔향이 남아 있어, 위조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배제되었다.
문제는 내용이었다.
아르스 마그나의 지하 구조도. 동력실, 지맥 분기점, 골렘 격납고. 전부 자신이 재건한 공간들이다. 그러나 도면의 왼쪽 절반에는 벨리알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구조가 그려져 있었다.
대칭이었다. 아르스 마그나의 거울상. 성황청 지하 3층.
지맥 분기점에 대응하는 위치에 '성광 도관'이라 적혀 있고, 골렘 격납고 자리에는 '성기사 대기소'라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아버지의 글씨 옆에 인간의 문자로 쓰인 좌표가 병기되어 있다.
벨리알의 손가락이 양피지 위를 천천히 훑었다. 손끝의 촉감으로 잉크의 두께를 읽는다. 아버지가 이 주석을 적을 때의 필압은 평소보다 깊었고, 획이 끝나는 지점마다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서두르고 있었다.
왼쪽 어깨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성검의 여파로 괴사와 재생을 반복하는 그 상흔이, 도면 위의 성광 도관이라는 글씨에 반응하듯 욱신거렸다.
"전부 설계를 훔쳤다는 건가."
혼잣말이 작업실의 돌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새벽의 아르스 마그나는 고요했다. 지맥 안정기의 저주파 진동만이 바닥을 통해 발바닥까지 전해진다.
벨리알은 도면 여백에 적힌 이름들을 손끝으로 짚었다. 죽은 부하들의 이름. 아버지가 적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적어둔 것들이다. 가르멜. 뷔에. 로트. 그 이름들 사이로 아버지의 설계가 교차하고 있었다.
"이 성은 절반뿐이었어."
작업대 서랍에서 축척자를 꺼내 도면 위에 대보았다. 비율이 완벽히 일치한다. 아르스 마그나의 지맥 분기점과 성황청 지하의 성광 도관이 연결되면, 하나의 거대한 마력 순환 회로가 완성되는 구조였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성황청의 지하를 이 성의 나머지 절반으로 설계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순서가 반대다.
성황청이 아버지의 설계를 훔쳐서 자신들의 본부 지하를 건설한 것일 수도 있다. 용사 협회장이 아버지를 죽인 진범이라면, 그 전에 설계도를 입수했을 가능성이 있다. 죽이기 전에 빼앗고, 빼앗은 뒤에 죽인 것이다.
벨리알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작업대 위의 촛불이 흔들리며 그림자가 일렁인다.
문이 열렸다.
에린이었다.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작업실 문턱에 기대서 있었다. 목에 걸린 성물의 파편이 희미한 백광을 뿜고 있었는데, 그 빛이 도면 위의 성광 도관 표시와 같은 파장으로 명멸하고 있었다.
"또 새벽 작업이야?"
"들어와. 볼 것이 있다."
에린이 작업대 앞으로 다가왔다. 도면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양피지의 선들이 비쳤다. 성물의 빛이 도면 위로 떨어지자, 보이지 않던 잉크가 부유하듯 떠올랐다. 숨겨진 층위의 설계선이었다.
"이건…"
"아버지의 도면이다. 내가 재건한 이 성의 지하 구조. 그리고 이쪽이 성황청 본부의 지하."
에린의 손이 도면 위를 따라갔다. 조사관의 습관이었다. 손끝으로 구조를 읽는 행위가 벨리알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녀는 두 구조가 만나는 접합점에서 멈추었다.
"대칭이네. 완벽한 거울상."
"나머지 절반은 저들의 오만함 아래 숨겨져 있지."
벨리알은 축척자로 접합점을 가리켰다. 에린의 성물이 더 밝게 빛났고, 도면 위의 숨겨진 선들이 한층 선명해졌다. 벨리알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네 성물이 반응하고 있어. 이 도면에 새겨진 마력 서명과 같은 계통이라는 뜻이다."
에린이 목의 파편을 손으로 감쌌다. 금속의 차가움이 손바닥에 전해지는 듯, 그녀의 손가락 끝이 살짝 굽었다.
"선대 마왕을 찌른 창의 파편이 왜 마왕의 설계도와 같은 파장을 가지는 거지?"
"그걸 알아내야 한다."
벨리알은 작업대 서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더 꺼냈다. 성황청의 특수 인장이 찍힌 보고서였다. 용사들의 유품 속에 섞여 있던 것을 보관해 두었다. 인장의 문양과 도면 위의 성광 도관 표식이 동일한 기하학적 패턴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보고서의 인장. 도면의 성광 도관 표식. 그리고 네 성물의 각인 패턴. 전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에린이 보고서를 들어 촛불에 비추었다. 인장의 잉크 아래로 미세한 룬이 새겨져 있었고, 그것은 아르스 마그나의 지맥 안정기에 사용된 룬 체계와 구조적으로 흡사했다.
"성황청이 선대 마왕의 마도 공학을 절취했다는 거야?"
"아버지를 죽이기 전에 설계를 빼돌리고, 그 설계로 자신들의 지하를 건설했다. 그리고 남은 절반인 이 성은 폐허로 만들어 증거를 없앴다."
벨리알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대신 왼쪽 어깨의 상흔이 피부 아래에서 맥박치듯 뜨거워지고 있었다. 괴사 조직과 재생 조직의 경계에서 타는 듯한 열감이 쇄골까지 번졌다.
에린이 보고서를 내려놓고 벨리알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잠입할 거지? 성황청 지하."
"해야 한다."
"혼자는 안 돼. 성황청 내부 구조를 아는 사람이 필요해."
"네가 알고 있나?"
에린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조사관으로서 성황청 본부에 드나들었던 기억을 더듬는 듯, 그녀의 시선이 도면의 특정 지점을 훑었다.
"지상 구조는 안다. 지하 3층까지 내려가 본 적은 없지만, 경비 교대 시간과 결계의 배치 패턴은 파악하고 있어."
"충분하다."
벨리알은 새 양피지를 꺼내 작업대 위에 펼쳤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설계를 그리기 시작했다. 에린은 그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직접 깃펜을 집어 벨리알이 허공에 그리는 선을 양피지 위에 옮겨 그렸다.
둘의 호흡이 맞았다. 벨리알이 구조를 구상하면 에린이 실체화시키는 작업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문제는 마력이다."
벨리알이 깃펜을 멈추게 했다.
"성황청 본부에는 마족의 마력을 감지하는 결계가 7겹으로 깔려 있다. 내가 한 발짝만 들여놓아도 경보가 울린다."
"마력을 지울 수 있어?"
"완전히 소거하면 이 몸이 버티지 못한다. 억제까지는 가능하다."
벨리알은 작업대 아래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흑요석으로 깎은 원형 장치가 들어 있었다. 지맥 안정기의 소형 역변환 모듈이다. 마력을 외부로 방출하는 대신 내부로 압축하여 존재 자체를 은폐하는 기능을 가졌다.
"이것을 심장 근처에 부착하면 마력 서명을 98%까지 억제할 수 있다. 문제는 나머지 2%다."
"2%면 하급 마족 수준이잖아."
"성황청의 감지 결계는 하급 마족도 잡아낸다."
침묵이 흘렀다. 촛불이 한 번 크게 흔들렸고, 에린의 성물이 그 순간 강하게 맥동했다. 벨리알의 시선이 그 빛으로 향했다.
"네 성물."
"응?"
"성광의 파장이 마력 서명을 덮어씌울 수 있다. 성물의 빛 아래에서는 마족의 마력이 성광으로 위장된다."
에린이 목의 파편을 만졌다. 금속 표면이 체온을 머금어 미지근했다.
"이걸 어떻게 쓸 건데?"
"네 성물과 내 마력을 직접 접촉시킨다. 성물이 내 잔여 마력을 흡수하여 성광으로 변환하면, 감지 결계는 나를 성직자로 오인한다."
에린의 손가락이 파편 위에서 멈추었다. 이 성물이 지맥 안정기와 공명했던 기억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때의 진동은 통제 가능한 수준이었다. 마력을 직접 흡수시킨다면.
"위험하지 않아? 이 파편이 선대 마왕을 찌른 무기의 조각이라면, 네 마력과 접촉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다른 방법이 없다."
벨리알이 작업대 위의 도면을 정리했다. 아버지의 설계도를 두루마리로 말아 가죽 끈으로 묶는 동안, 왼쪽 어깨의 열감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에린은 깃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아비스 칼데라의 새벽 하늘은 적자색이다. 흑요석 협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먼 짐승의 울음처럼 작업실 벽을 긁었다.
"출발은 내일 밤이다. 성황청의 결계가 가장 약해지는 시간대는?"
"자정 교대 직후. 약 12분의 공백이 생겨."
"12분이면 지하 3층까지 침투할 수 있다."
벨리알은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여 경로를 그렸다. 에린이 그 동선을 읽으며 수정점을 짚었다.
"여기. 2층과 3층 사이에 성기사 상주 초소가 있어. 우회로가 필요해."
"도면에 따르면 환기 덕트가 있다. 아버지의 설계를 그대로 사용했다면."
"그게 확실해?"
"아버지의 설계에 결함은 없다."
그 말의 무게를 에린은 알고 있었다. 반박하지 않았다.
준비는 해가 뜨기 전에 마무리되었다. 에린이 성황청 내부의 경비 패턴을 구술하면 벨리알이 양피지 위에 동선을 그렸고, 벨리알이 함정 회피 경로를 짜면 에린이 현실적인 변수를 덧붙였다. 작업대 위에 완성된 침투 계획서는 두 사람의 필체가 교차하는 기묘한 문서가 되었다.
해가 지고, 밤이 왔다.
벨리알은 흑요석 역변환 모듈을 가슴에 부착했다. 차가운 돌이 피부에 닿는 순간, 끼익, 하고 마력이 안쪽으로 쪼그라들었다. 갈비뼈가 안으로 접히는 듯한 압박. 폐가 짓눌렸다. 숨이 얕아졌다. 억제된 마력이 혈관 안에서 갈 곳을 잃고 요동쳤다. 끄억. 심장 위를 돌주먹으로 쥐어짜는 것 같았다. 온몸에 납을 녹여 부은 것과 비슷한 중압감이 사지 끝까지 번졌다.
"괜찮아?"
에린이 물었다. 벨리알은 대답 대신 왼손을 펴 보였다. 손가락 끝에서 평소 흘러나오던 흑자색 마력의 안개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완전히는 아니다. 희미한 잔영이 손톱 끝에 남아 있었다.
"나머지를 지워야 한다."
에린이 목에서 성물의 파편을 떼어냈다. 금속 조각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맥동했다. 백광이 작업실의 어둠을 가르며 벨리알의 얼굴을 비추었다.
"손을 내밀어."
벨리알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에린이 성물을 든 손으로 그의 손바닥을 감쌌다.
접촉하는 순간, 빛이 변했다.
성물의 백광이 벨리알의 잔여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손바닥에서 팔꿈치로, 팔꿈치에서 어깨로. 흑자색 기운이 파편 속으로 흘러들며 백광에 섞여 소멸하는 과정이 피부 위로 보였다. 벨리알의 마력 서명이 지워지고 있었다.
에린의 손등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핏줄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핏줄이 아니었다. 검붉은 문양이 피부 아래에서 번지듯 퍼져 나왔다. 손등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뚝으로. 벨리알에게서 빨아들인 마력이 에린의 몸속에 새로운 경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에린."
벨리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에린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검붉은 문양이 팔꿈치를 지나 상완부까지 번져 있었다. 문양의 형태는 벨리알의 왼쪽 어깨에 새겨진 상흔의 패턴과 흡사했다.
에린의 귀 끝이 변하고 있었다. 둥글던 윤곽이 미세하게 뾰족해지며, 피부색이 창백한 회청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손을 놓으면 안 돼."
에린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성물이 아직 마력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접촉을 끊으면, 억제되지 않은 마력이 역류하여 벨리알의 존재를 폭발적으로 노출시킬 수 있다. 조사관의 판단이었다.
벨리알의 손이 에린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성물의 빛이 격렬하게 명멸하며, 에린의 목 옆으로 검붉은 문양이 턱선까지 기어올랐다.
에린의 홍채가 벨리알의 그것과 같은 금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에린, 네 눈이—"
에린의 자유로운 왼손이 작업대 위의 금속 거울을 낚아챘다.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거울을 쥔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거울 속에는 마족의 얼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