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무가 갈라졌다.
아르스 마그나의 전망탑에서 내려다본 칼데라의 하늘은 언제나 잿빛이었다. 마력 폭풍이 만들어낸 영구적인 구름층이 태양을 가린 지 오래다. 오늘은 달랐다. 구름 사이로 금속성 광택이 번들거리며 무언가가 접근하고 있었다.
벨리알은 손가락 끝으로 전망탑 난간의 룬 회로를 두드렸다. 관측 결계가 활성화되자 멀리서 다가오는 물체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함선이었다. 한 척이 아니다. 최소 일곱 척의 대형 화물선이 편대를 이루고 흑요석 협곡 상공을 우회하며 마왕성을 향해 직진하고 있었다. 선체에는 교차된 천칭과 뱀이 엉킨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뱀의 눈 자리에 박힌 보석이 마력을 머금고 붉게 빛났다.
차원 상단 '세르펜스'. 마계와 인간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금지된 물자를 운반하는 거대 밀수 조직이다. 전쟁 중에는 양쪽 모두에게 무기를 팔고, 전쟁이 끝나면 재건 자재를 독점하는 자들.
벨리알의 검지가 허공에서 멈췄다. 그리던 설계도의 선이 끊겼다.
"모니터링 룬 7번에서 12번까지 감지 범위를 넓혀. 접근 각도와 마력 반응 패턴을 기록해둬."
전망탑 아래 대기하던 임프 관측병이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파란 빛줄기가 뻗어나가 함선들의 궤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에린이 나선형 계단을 올라왔다. 부츠 밑창이 흑요석 바닥을 밟을 때마다 건조한 소리가 울렸다. 그녀의 가슴팍에 매달린 성물 파편이 아침 공기 속에서 희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저 문양, 세르펜스잖아." 에린이 난간에 기대며 함선을 주시했다. "전쟁 때 성황청에도 물자를 댄 적 있어. 양다리의 달인들이지."
벨리알은 대답 대신 눈을 좁혔다. 선두 함선의 뱃머리가 서서히 열리더니 은색 깃발이 나부꼈다. 휴전과 교역을 뜻하는 상단의 관례적 신호다.
"통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임프 관측병이 수정구 위로 떠오른 음성 파장을 가리켰다. 벨리알이 턱짓으로 허가하자 탁하고 기름기 서린 목소리가 전망탑을 채웠다.
"아르스 마그나의 주인장께 인사드립니다. 차원 상단 세르펜스의 수석 대리인, 카르마엘이라 합니다. 마계의 새로운 기적을 직접 뵙고 싶어 먼 길을 왔습니다."
벨리알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곧 원위치로 돌아왔다. 기적이라는 단어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에 실린 탐욕의 주파수를 읽어낸 것이다.
"접안은 제3부두에서만 허용한다. 무장 해제 확인 전까지 선원 하선은 불가."
건조한 지시였다. 카르마엘이 순순히 수락하는 것을 듣고 벨리알은 전망탑을 내려왔다. 에린이 뒤따라 걸었다.
"받아줄 거야?" 에린이 물었다.
"쫓아낼 이유도 없어." 벨리알이 계단을 내려가며 왼손으로 허공에 직선을 그었다. 습관적인 동작이다. "세르펜스가 가진 자원 루트는 마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야. 미스릴 합금, 정제된 마력석, 드워프 공방의 공구까지. 다만."
그가 멈춰 섰다. 에린이 한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형국이 되었다.
"저들이 원하는 게 단순한 거래일 리가 없지."
제3부두는 마왕성의 동쪽 외벽에 돌출된 반원형 착륙장이었다. 아르스 마그나가 부양한 이후 급하게 증설한 구조물이라 장식이 거의 없었다. 벨리알에게는 그 점이 불쾌했다. 난간 하나에도 기하학적 문양을 새기지 못한 채 손님을 맞는 것은 건축가로서의 모욕에 가까웠다.
함선이 정박했다. 뱃머리에서 접이식 사다리가 내려오더니 향유를 잔뜩 바른 머리카락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카르마엘이었다. 비단 로브 위에 마력석으로 엮은 장식 체인을 두르고 눈가에는 금빛 문신이 비늘처럼 번져 있었다. 그의 뒤로 호위 병사 넷과 짐꾼 여섯이 무거운 궤짝을 들고 줄지어 내렸다.
카르마엘이 부두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시선이 마왕성 외벽을 훑었다. 흑요석과 적철석을 번갈아 쌓은 벽면에 새겨진 룬 문양, 지맥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곡선. 그의 눈동자에 탐욕이 아니라 진짜 감탄이 스쳤다.
"소문보다 대단하군요." 카르마엘이 손으로 벽면의 문양을 더듬으려 했다.
벨리알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카르마엘의 손이 멈췄다.
"벽에 기름이 묻으면 룬 각인의 전도율이 0.7퍼센트 하락해."
카르마엘이 손을 거두며 웃었다. 상인 특유의 유연한 웃음이었다. 그는 뒤따르던 짐꾼에게 손짓하여 궤짝 하나를 열게 했다. 안에는 투명한 결정 속에 봉인된 심층 마력석이 열두 개 놓여 있었다. 하나만으로도 골렘 열 기를 한 달간 가동시킬 수 있는 최상급 자원.
"선물입니다. 성의를 보여드리는 것이 먼저라 생각했습니다."
벨리알은 마력석을 내려다보았다. 결정 내부에서 심연색 빛이 느릿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순도가 높다. 저 정도면 제7구역의 미완성 방어선에 즉시 투입할 수 있다.
시선이 마력석에서 떠나 카르마엘의 눈으로 돌아갔다.
"본론."
단어 하나. 카르마엘의 미소가 달라졌다. 사교적인 표면이 벗겨지고 그 아래의 계산이 드러나는 변화.
"직설적이시군요. 좋습니다." 카르마엘이 로브 안쪽에서 양피지 한 뭉치를 꺼냈다. "차원 상단 세르펜스는 아르스 마그나에 독점적인 자원 공급 계약을 제안합니다. 미스릴, 마력석, 희귀 광석, 드워프 공구 일체. 물량은 무제한이고 가격은 시세의 칠 할."
에린이 벨리알 뒤편에서 팔짱을 꼈다. 좋은 조건이다. 시세의 칠 할이면 골렘 채굴단을 마계 심층부에 보내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진다.
"대가는?"
카르마엘의 손가락이 양피지의 마지막 항목을 두드렸다.
"마왕성의 방어 설계도입니다. 외곽 함정 배치도, 결계 룬의 연결 구조, 지맥 안정기의 출력 분배표. 이 세 가지를 제공해주시면 됩니다."
전망탑 꼭대기에서 불던 바람이 부두까지 내려왔다. 벨리알의 로브 자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왼쪽 어깨 아래, 옷 밑에서 영구적 부상의 경계선이 재생과 괴사를 반복하며 욱신거렸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짐꾼들이 궤짝을 내려놓는 소리마저 멈췄다.
"설계도를 달라고?"
벨리알의 목소리에 온도가 없었다. 분노가 아니었다. 분노보다 차가운 무엇. 누군가가 자신의 자식에게 가격을 매기겠다고 선언한 것을 소화하려 애쓰는 듯한 정적.
"어디까지나 사업적 관점에서의 제안입니다." 카르마엘이 양손을 펼쳤다. "설계도의 사본이 유통되면 다른 마왕 군단들이 유사한 방어 체계를 구축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마계 전체의 군사적 균형이—"
"균형." 벨리알이 그 단어를 되씹었다.
그의 검지가 허공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습관이었지만 이번에는 속도가 달랐다. 느리고, 정확하고, 날카로웠다.
카르마엘이 코끝을 씰룩이며 비웃음을 흘렸다. 허공에 선을 긋는 마왕의 기벽이 우습다는 듯. 그 뒤편에서 호위 병사 하나가 허리춤의 단검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무장 해제 지시를 무시한 은닉 무기였다.
벨리알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포착했다. 카르마엘의 비웃음과 호위병의 손놀림. 허공을 긋던 검지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선의 궤적이 더 정밀해졌다.
"내 설계도는 물건을 파는 계약서가 아니야." 벨리알의 목소리가 부두의 바닥을 타고 낮게 울렸다. "공간의 영혼을 기록한 악보다."
카르마엘의 비웃음이 사라졌다. 벨리알의 검지가 그린 보이지 않는 선들이 공기 중에 미세한 마력 잔향을 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식이 아니었다. 연산이었다.
"이 성의 함정 하나하나에는 지맥의 흐름이 반영되어 있어. 벽돌 한 장의 각도, 복도의 곡률, 천장의 높이. 전부 이 칼데라의 지형과 마력 분포에 맞춰 설계된 거야." 벨리알이 허공의 선을 끊었다. "설계도를 복사해서 다른 곳에 세운다? 악보를 베껴 쓴다고 음악이 되는 줄 아는 문맹의 발상이지."
호위 병사의 손이 단검 자루에서 떨어졌다. 부두의 공기가 무거웠다.
벨리알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카르마엘이 반사적으로 반 발 물러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벨리알의 시선이 카르마엘의 금빛 문신 위를 지나갔다. "세르펜스가 설계도를 원하는 진짜 이유가 균형 따위일 리 없잖아. 성황청에 팔 거지? 아니면 용사 협회? 양쪽에 동시에?"
카르마엘의 웃음이 얼어붙었다. 찰나였다. 벨리알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에린이 팔짱을 풀고 한 발 옆으로 이동했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지만 그녀의 위치가 카르마엘의 호위 병사 두 명의 사각지대에 해당한다는 것을 벨리알은 알아챘다. 전직 조사관의 몸에 밴 습성이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카르마엘이 표정을 수습했다. "세르펜스는 어디에도 충성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익에만 충성하죠. 설계도가 부담스러우시다면 조건을 조정할 수도—"
"조건의 문제가 아니야."
벨리알이 등을 돌렸다. 부두의 바닥에 새겨진 기본적인 하중 분산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만들어서 문양의 대칭이 0.2도 어긋나 있었다. 그 사실이 이 순간에도 그를 괴롭혔다.
"자원 공급 계약 자체에는 관심이 있어. 설계도는 안 돼. 다른 대가를 제시해."
카르마엘이 잠시 침묵했다. 그의 손이 로브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빈손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뒤돌아 함선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선내에서 상의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벨리알이 턱짓으로 허가했다. 카르마엘과 수행원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부두에 마력석 궤짝만 덩그러니 남았다.
에린이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궤짝 위에 올라갔다가 마력석 하나를 집어 들었다. 빛에 비춰보더니 손톱으로 결정 표면을 긁었다.
"순도는 진짜야. 가짜를 섞은 흔적 없어." 에린이 마력석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근데 이 양을 선물이라고 내놓는다는 건, 저쪽이 기대하는 이익이 이것보다 훨씬 크다는 뜻이겠지."
벨리알은 대답 대신 부두 난간에 기대어 칼데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흑요석 협곡의 바람이 올라와 로브 소매를 흔들었다. 왼쪽 어깨의 상처가 또 욱신거렸다. 재생과 괴사의 경계에서 피부가 당기는 감각.
주머니에서 접힌 양피지를 꺼냈다. 새벽 작업실에서 가져온 설계도 여백. 거기에 적힌 이름들이 바람에 살짝 펄럭였다. 죽은 부하들의 이름이었다.
"…저 자원이면 제7구역 방어선을 완성할 수 있어."
에린이 그의 옆에 섰다. "그래서 흔들리는 거야?"
"흔들리는 게 아니라 계산하는 거야." 벨리알이 양피지를 다시 접어 넣었다. "설계도를 넘기면 이 성은 종이 한 장으로 해부된다. 함정의 배치를 알면 우회할 수 있고, 결계의 구조를 알면 해제할 수 있어. 그건 여기 사는 모든 놈들의 목숨을 파는 거야."
에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성물 파편이 가슴팍에서 한 번 진동했다. 미세한 떨림이었지만 벨리알의 감각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지맥 안정기와의 공명.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
함선의 갑판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카르마엘이 다시 내려왔다. 이번에는 표정이 달랐다. 사교적인 미소도, 계산적인 눈빛도 아니었다. 뭔가를 결정한 자의 얼굴.
"벨리알 님." 카르마엘이 부두에 내려서며 입을 열었다. "설계도 요구를 철회하겠습니다."
벨리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대신 다른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이것이라면 거절하지 못하실 겁니다."
카르마엘이 손을 들어 올렸다. 함선 위에서 짐꾼 하나가 작은 원통형 케이스를 밧줄에 묶어 내려보냈다. 카르마엘이 그것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케이스 안에는 양피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낡고 테두리가 그을린 양피지. 그 위에 그려진 선들이 벨리알의 시선을 꿰뚫었다.
설계도였다. 건축선의 필압, 룬 배치의 간격, 여백에 적힌 주석의 필체. 벨리알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수없이 보았던 것들이니까.
에린의 시선이 벨리알에게로 옮겨갔다. 그의 왼손이 떨리고 있었다. 허공에 설계도를 그리던 바로 그 손이.
"선대 마왕 벨제파르 님의 유작입니다." 카르마엘이 케이스를 내밀었다. "마왕성이 파괴되기 직전에 그리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완성이지만, 이것이 무엇을 설계한 것인지는 아드님이시라면 아실 겁니다."
벨리알의 시선이 양피지 위를 더듬었다. 선들이 그리는 형상. 방이 아니었다. 공간 그 자체의 구조였다. 벽과 천장과 바닥이 하나의 거대한 회로로 연결된, 마도 건축의 궁극을 향한 미완의 청사진.
설계도의 하단 구석, 그을린 자국 사이로 겨우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있었다.
아버지의 필체. 인간의 언어로 쓰인 주석.
에린이 옆에서 그 글자를 함께 읽었다. 그녀의 호흡이 끊겼다.
벨리알의 손이 케이스를 향해 뻗어 나갔다.
"이건 어디서 입수했지?"
카르마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협상의 시작입니다, 벨리알 님."
벨리알의 손가락이 양피지 가장자리에 닿았다. 그을린 테두리의 거친 촉감이 손끝에 전해졌다.
설계도 하단의 인간어 주석 옆에는, 성황청 대심판관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