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토판이 먼저 올라왔다.
지맥 안정기의 균열 사이로 뿜어져 나온 것은 마력도, 광석도 아니었다. 흙빛 판 위에 뾰족한 문자가 빼곡히 새겨진 고대의 유물. 벨리알의 손끝이 파편 하나를 집어 올리자 매캐한 흙먼지 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표면의 먼지가 쏟아지며 아래쪽 글자가 드러났다. 손가락 끝으로 서늘한 냉기가 스며들었다. 뼈를 타고 흐르는 듯한 한기.
마족의 고어(古語)였다.
벨리알은 한 발 물러섰다. 점토판은 한 장이 아니었다. 지하 기단의 갈라진 바닥 틈새로 수십 장이 비늘처럼 겹쳐 있었고, 그중 몇 장은 이미 공기 중의 습기를 머금어 글자가 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모어, 수습해."
골렘 채굴단의 소형 유닛 세 기가 기단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벨리알은 무릎을 꿇고 가장 온전한 판을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무게감이 예상보다 묵직했다. 점토가 아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질감은 차라리 응고된 마력에 가까웠다.
왼쪽 쇄골 아래, 성검의 여파가 남긴 상흔이 찌릿하게 반응했다.
"수천 년은 됐을 겁니다."
에린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벨리알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가 기단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바닥의 균열을 더듬고 있는 기척만 느꼈다. 에린의 손끝이 금이 간 지층의 단면을 긁었고, 손톱 사이에 검붉은 흙가루가 끼었다.
"고어를 읽을 수 있나?"
"일부요."
에린이 일어서며 벨리알 옆으로 왔다. 점토판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지맥 안정기의 푸른 빛이 어렸다. 허리춤에 매달린 성물의 파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그 진동을 알아챈 것은 벨리알뿐이었다.
에린이 점토판의 첫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아르스의 근원은 두 가지 숨결을 먹는다.' 여기까지는 읽히는데…"
"두 번째 줄."
벨리알의 시선이 에린의 손끝을 따라갔다. 고어의 획이 복잡하게 얽힌 부분. 에린은 입술을 움직이다 멈췄다.
"'첫째는 땅의 핏줄, 둘째는…' 이 글자를 모르겠어요."
벨리알이 판을 기울였다. 지맥 안정기의 빛이 음각된 문자 위로 흘렀다. 글자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벨리알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스피리투스."
에린이 고개를 들었다.
"정수(Spirit)라는 뜻이오."
침묵이 기단을 채웠다. 골렘 유닛이 점토판을 수습하는 기계적인 마찰음만이 지하를 떠돌았다. 벨리알은 판을 내려놓지 않은 채 세 번째 줄로 시선을 옮겼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번졌다.
점토판의 내용은 명확했다. 아르스 마그나의 지맥 안정기는 지금까지 벨리알의 생명력을 동력으로 작동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본래의 설계—수천 년 전 최초의 마왕성이 세워졌을 때의 원형 설계—는 인간의 정수를 핵심 에너지원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벨리알은 점토판을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손바닥에 문자의 음각이 찍혀 있었다. 그는 그 자국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전부 해독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에린이 말했다. "핵심은 이미 나왔지만. 지맥 안정기를 완전 가동하려면—"
"인간의 영혼에서 추출한 정수가 필요하다."
벨리알이 에린의 말을 잘랐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함정의 도면에서 오차를 읽어내듯 건조한 어조.
에린의 뒷걸음질은 반보에 불과했다. 그 반보가 기단 위의 공기를 갈랐다. 벨리알은 그녀가 허리춤의 성물 파편에 손을 가져가는 동작을 놓치지 않았다.
"해석이 틀렸을 수도 있지 않나요?"
"고어의 '스피리투스'는 하나의 뜻만 갖소."
벨리알이 작업대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전날 새벽에 그려둔 지맥 순환도가 접혀 있었고, 여백에 누군가의 이름이 작게 적혀 있었다. 지난 전투에서 잃은 부하. 그는 순환도를 꺼내 점토판 옆에 펼쳤다.
"당신이 지금까지 자기 생명력을 깎아서 성을 유지한 건 알고 있었어요."
에린의 손이 성물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다른 문제예요. 인간의 정수라니. 그건 곧—"
"살아있는 인간을 제물로 쓴다는 뜻이오."
벨리알이 고개를 돌려 에린을 마주 보았다. 지맥 안정기의 빛이 그의 왼쪽 얼굴을 반만 비추고 있었다. 상흔이 드러난 쪽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에린의 턱이 굳었다. 점토판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당신도 결국 다른 마왕들과 똑같은 길을 걷게 되는 건가요?"
그 한 마디가 기단의 공기를 얼렸다.
벨리알의 손이 멈췄다. 순환도를 펼치던 손가락 끝이 종이 위에서 정지했다. 지맥 안정기의 푸른 빛이 미세하게 깜박였다. 한 박자. 두 박자. 세 번째 박자에서 빛이 안정을 되찾았다.
"다른 마왕들."
벨리알이 그 단어를 되뇌었다. 입안에서 굴리는 것이 아니라 칼날 위에 올려놓고 무게를 재는 듯한 발음이었다.
"선대의 기록을 읽어본 적이 있소?"
에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인간을 잡아먹지 않았소. 마력을 직접 변환하는 회로가 있었으니까." 벨리알이 순환도 위에 손가락을 짚었다. "나에겐 그 회로가 없소. 태어날 때부터."
그의 손가락이 순환도의 빈 지점을 두드렸다. 에너지가 흘러야 할 경로가 끊어진 곳. 지맥의 힘이 성벽으로 전달되기 직전에 증발하는 구간이 붉은 잉크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 피를 썼소. 살을 깎았소. 그것도 모자라서 뼈까지."
벨리알이 왼쪽 소매를 걷었다. 팔뚝의 피부 아래로 검은 맥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재생과 괴사가 반복되는 조직. 에린의 시선이 그 위에 머물렀다.
"점토판이 말하는 건 다른 방법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오."
에린의 눈썹이 움직였다.
"인간의 정수를 쓰라는 게 다른 방법이라고요?"
"방법의 존재와 사용 여부는 별개요."
벨리알이 소매를 내렸다. 점토판을 다시 집어 들고 빛 아래로 가져갔다. 고어의 여섯 번째 줄. 일곱 번째. 글자들이 촘촘하게 이어져 있었다.
"원형 설계를 읽을 수 있다면, 역으로 변환 경로를 설계할 수도 있소."
에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성물을 쥔 손의 힘이 미세하게 풀렸다. 벨리알은 그것을 등 뒤의 기척으로 감지했다. 관절이 이완되는 소리. 가죽 장갑이 금속 파편 위에서 미끄러지는 마찰음.
"전부 해독해야 해요." 에린이 말했다. 목소리의 온도가 아까와 달랐다. 경계는 남아 있었지만, 날이 서 있지는 않았다.
"알고 있소."
벨리알이 점토판을 작업대에 나란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골렘 유닛이 수습해 온 것까지 합치면 서른일곱 장. 일부는 모서리가 부서져 글자가 유실되었고, 몇 장은 표면에 금이 가서 해독이 불가능해 보였다.
에린이 작업대 반대편에 섰다. 그녀의 손이 점토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조심스럽지만 망설임 없는 동작. 벨리알은 그녀가 판의 모서리를 엄지로 훑으며 글자의 깊이를 촉각으로 가늠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술자의 손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점토판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벨리알은 구조도 관련 판을, 에린은 고어 문법이 비교적 단순한 판을 맡았다. 지맥 안정기의 빛 아래서 먼지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시간이 흘렀다. 작업대 위에 에린이 정리한 번역 메모가 쌓여갔다. 벨리알은 그 메모를 하나씩 읽으며 순환도에 새로운 선을 그었다. 연필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와 점토판을 뒤집는 소리만이 기단을 채웠다.
열네 번째 판에서 에린의 손이 멈췄다.
"이상해요."
벨리알이 연필을 내려놓았다.
"여기, 에너지 변환식의 중간 단계." 에린이 판을 벨리알 쪽으로 밀었다. "정수를 직접 투입하는 게 아니라 중간에 매개체를 거치는 구조예요. 그런데 이 매개체의 속성이…"
에린이 말을 끊고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성물의 파편이 떨리고 있었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진동. 에린의 허리띠가 덜컥거렸고, 금속 파편의 표면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벨리알의 시선이 성물로 향했다.
"꺼내 보시오."
에린이 주저했다. 찰나였다. 그녀는 성물을 허리춤에서 분리해 점토판 위에 내려놓았다.
빛이 번졌다.
성물의 파편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금색도 은색도 아니었다. 투명에 가까운 백광이 점토판의 문자를 하나하나 더듬으며 흘렀다. 마치 글자를 읽는 것처럼. 고어의 획을 따라 빛의 줄기가 갈라졌다가 합쳐졌다.
벨리알의 왼쪽 상흔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작업대에 손을 짚었다. 눈을 감지 않았다. 감을 수가 없었다. 성물의 빛이 점토판을 지나 순환도 위로 번지고 있었다. 벨리알이 그려놓은 지맥 경로도, 에린이 적어둔 번역 메모도, 모든 종이 위로 빛의 맥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보였다.
순환도에서 지금까지 비어 있던 구간. 에너지가 증발하던 그 끊어진 경로 위로 빛의 선이 새로운 길을 그렸다. 지맥에서 시작해 안정기를 관통하고 성벽의 함정 구조체를 거쳐 다시 지맥으로 돌아오는 루트. 벨리알이 설계한 어떤 경로와도 겹치지 않는 제3의 순환이었다.
벨리알의 입이 벌어졌다.
"이건…"
에린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빛의 궤적을 쫓았다. 순환도 위에 떠오른 새로운 경로는 인간의 정수도 마족의 생명력도 경유하지 않았다. 성물의 파편이 중간 매개체로 자리 잡은 완전히 새로운 순환 구조.
"성물이 에너지 변환기 역할을 하고 있소."
벨리알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놀라움이 아니었다. 수천 년간 봉인된 원형 설계가 요구한 것은 인간의 정수가 아니라 정수를 변환할 수 있는 매개체였다. 에린이 들고 다니던 그 파편—선대 마왕을 찔렀던 창의 잔해—이 정확히 그 역할의 열쇠였다.
에린의 손이 떨렸다. 성물에서 손을 뗐는데도 빛은 멈추지 않았다. 점토판과 순환도 위에서 제3의 루트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벨리알은 연필을 집었다. 빛의 궤적을 따라 선을 긋기 시작했다. 손이 빨라졌다. 허공에 떠오른 빛의 궤적이 작업대 위의 순환도와 겹쳐지며 종이 자체가 진동했다. 연필 끝이 닿을 때마다 빛의 선과 잉크의 선이 포개졌고, 마왕성 전체의 도면이 하나의 거대한 회로도처럼 맥동했다. 지맥의 맥박이 종이를 통해 손끝까지 전해졌다. 작업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벨리알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에린이 한 걸음 다가왔다.
"이 경로의 출력이면, 지맥 안정기에 당신 생명력을 쏟지 않아도—"
"됩니다."
벨리알의 연필이 순환도 위에서 마지막 선을 그었다. 원이 닫혔다. 빛의 맥동이 한 차례 크게 울린 뒤, 작업대의 진동이 잦아들었다.
그 순간 성물의 빛이 한층 강해지며 점토판의 마지막 줄을 비추었다. 지금까지 먼지에 덮여 보이지 않던 문장. 고어의 획이 날카롭게 드러났고, 벨리알과 에린의 시선이 동시에 그곳에 꽂혔다.
벨리알의 손에서 연필이 떨어졌다.
에린이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매개체의 주인은 성(城)에 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