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0.5%
결계는 거짓말을 못 한다.
연무장 중앙. 원형 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노아의 말대로였다. 3화 모의전 때와 같은 자리. 하지만 결계의 종류가 달랐다. 파동을 기록하는 결계.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파동이 기록 룬에 남았다.
루시안이 설치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루시안보다 먼저 판을 깔았다.
카이락스는 결계 바깥에 서서 그것을 읽었다. 파동 기록형 결계. 이 안에서 힘을 쓰면 종류와 강도가 전부 기록된다.
들어갈 것인가.
들어가지 않으면 결투가 무산된다. 루시안이 다른 방법으로 확인하러 올 것이다. 더 번거로워진다.
들어가면 기록이 남는다. 결계를 설치한 자가 — 자신의 힘을 확인한다.
카이락스는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안이 이미 안에 서 있었다.
교복이 아니었다. 훈련복. 금색 견장이 없었다. 황태자가 아닌 전사의 차림. 맨손 대련이었다.
*
"룰 합의."
루시안이 먼저 말했다.
"살기 금지. 무기 제한. 항복 또는 결계 이탈 시 종료."
"말 끝."
루시안이 이를 악물었다. 한 단어의 무게. 상대의 모든 설명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방식.
"시작이다."
루시안이 먼저 움직였다.
빨랐다. 6각의 성흔이 신체 강화에 일부 쓰이고 있었다. 발이 모래를 차는 소리가 나기 전에 이미 반보를 좁혔다. 상단에서 하단으로 내려오는 견제. 오른쪽 측면으로 파고드는 본타격. 수련받은 자의 움직임이었다.
카이락스는 왼쪽으로 반 발 비켰다.
루시안의 본타격이 헛쳤다. 카이락스의 팔꿈치가 루시안의 팔 바깥쪽을 스쳤다. 가볍게. 힘이 없었다. 하지만 루시안의 타격 궤적이 꺾였다.
각도였다. 팔꿈치 하나로 상대 팔의 진행 방향을 바꿨다.
루시안이 즉시 재조정했다. 중심을 잃지 않았다. 앞으로 체중을 더 실었다. 근거리 공격으로 전환.
카이락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루시안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밀었다. 밀었다기보다 방향을 바꿨다. 루시안이 가려는 방향의 옆면에 손을 댔다가 뗐다.
루시안의 몸이 틀어졌다. 0.5초. 중심을 다시 잡는 데 쓴 시간.
카이락스는 그 0.5초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루시안이 정면을 보았다. 카이락스가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이 흔들리지 않았다. 땀이 없었다. 서 있는 것이 아니라 —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루시안이 성흔 파동을 증폭했다. 이번에는 기술이 아니었다. 정면. 6각의 힘을 실어 밀어붙이는 방식이었다.
*
파동이 연무장 안을 출렁였다.
결계가 반응했다. 기록 룬에 6각의 파형이 찍히기 시작했다. 회랑 위쪽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세르한. 5각의 감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시안이 들어왔다.
카이락스는 왼쪽 발끝을 0.1초 뒤로 뺐다. 루시안의 정면 돌진이 비스듬히 스쳤다. 그리고 — 루시안이 지나치는 순간. 등 쪽으로 손을 뻗어 어깨 날개뼈 아래를 손가락 끝으로 짚었다.
아무 힘도 없었다. 하지만 루시안의 다리가 멈추었다. 반사적으로. 신경 경로. 그 지점을 정확히 짚으면 하반신에 순간 힘이 빠진다. 기술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배운 것이었다.
루시안이 무릎을 꿇을 뻔했다. 0.3초. 버텼다.
카이락스는 손을 뗐다.
루시안이 돌아섰다. 숨이 가빠져 있었다. 처음으로.
"...뭘 한 건가."
카이락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루시안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성흔 파동을 전력으로 개방했다. 억제 없이. 연무장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결계가 파형을 받아 진동했다. 6각의 전력 개방. 학당에서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파동 한가운데.
카이락스가 공허의 베일을 접었다.
0.5%.
0.001%도 아니었다. 0.1%도 아니었다. 숨기는 것이 아니었다. 내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 펼쳤다. 허무의 근원이 공기 위에 얇게 깔렸다.
0.1초.
루시안의 성흔 파동이 멈추었다.
멈췄다기보다 — 도달하지 못했다. 6각의 전력 개방이 허무의 근원 앞에서 헛디뎠다. 빛을 보냈는데 흡수도 반사도 되지 않고 그냥 사라지는 느낌.
공기가 비었다.
루시안의 무릎이 내려갔다. 6각의 성흔이 공백 앞에서 지지점을 잃었다. 무릎이 모래 위에 닿을 뻔했다.
버텼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무릎을 펴지는 못했다. 반쯤 꺾인 자세. 손이 모래를 짚었다. 하지만 — 눈이 꺾이지 않았다. 카이락스를 보는 눈이.
카이락스는 공허의 베일을 거뒀다.
0.1초. 공기가 돌아왔다.
*
회랑 위.
세르한이 난간을 잡고 있었다. 손가락이 하얘질 만큼 쥐고 있었다. 카이락스가 무언가를 했다. 성흔이 아니었다. 마력이 아니었다. 6각의 파형은 찍혔는데 — 그 이후 0.1초의 기록이 공백이었다.
공백.
어제 회의실에서 느낀 그것과 같은 종류. 하지만 배 이상이었다.
세르한의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더 멀리.
리아 벨 루미너스가 회랑 끝에 서 있었다. 연무장이 직접 보이지 않는 각도. 하지만 파동이 왔다. 0.5%의 허무가 연무장 밖으로 스쳐 나온 것이었다.
리아는 벽에 손을 짚었다.
'심연의 군주.' 이름이 아니라 감각. 압도적인 공백.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빛이 필요 없는 것.
*
연무장.
루시안이 일어섰다. 천천히. 모래를 짚었던 손을 털었다. 호흡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카이락스는 루시안을 보았다. 이 황태자는 무릎이 꺾일 뻔한 상황에서 눈을 꺾지 않았다. 전장에서 그런 자를 많이 보지 못했다.
흥미롭군.
카이락스가 먼저 손을 내렸다.
"확인했나."
"아직."
카이락스는 그 대답을 들었다. 1초.
"아직이라."
"더 봐야 한다."
결론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결론이 있었다. 하지만 그 결론을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이라고 했다.
번거로운 황태자였다.
결계 기록 룬이 조용해졌다. 모래바닥에 발자국만 남았다. 루시안의 것은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있었다. 카이락스의 발자국은 — 두 개. 들어온 자리와 서 있는 자리.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었다.
*
루시안이 결계 밖으로 나갔다. 세르한도 사라졌다.
카이락스는 연무장에 혼자 남았다.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루시안의 어깨 날개뼈를 짚었을 때. 그 정확한 지점을 알고 있었다. 백오십 년 전장에서 익힌 기술이었다. 적을 멈추기 위한 것이었다.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 멈추기 위한.
또 살아남았다.
그리고 상대도 살려두었다. 죽일 수 있는 순간에 죽이지 않았다. 3화에서도 그랬다. 지금도 그랬다. 손이 — 또 먼저 움직였다. 죽이는 방향이 아니라 멈추는 방향으로.
백오십 년 동안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는데, 이 손은 아직도 무언가를 결정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밀어냈다.
같은 시각.
월식의 숲에서 파편이 한 번 크게 맥동했다.
카이락스는 그것을 느꼈다. 파편의 맥동이 — 0.5%의 허무 파동에 반응했다. 공명.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이라 반응한 것이었다.
배후가 이것을 기다렸다.
자신이 힘을 쓰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 공명을 이용해 파편을 다음 단계로 끌어올리려 한 것이었다. 미끼를 두고 기다린 것이 —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미끼였다.
카이락스는 연무장 중앙에 서서 월식의 숲 방향을 보았다.
이 학당에서 자신을 미끼로 쓸 수 있는 자가 있다.
그리고 그 자는 — 카이락스가 심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카이락스는 연무장을 나갔다. 발자국 두 개를 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