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성 안으로
본관 지하 1층. 회의실 B. 조명이 형광등이 아니라 매립등이었다. 빛이 위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벽에서 스며 나왔다. 차갑지 않은데 차갑게 느껴지는 빛이었다.
긴 테이블 가운데에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A4 열두 장. 바인더에 묶여 있지 않았다. 낱장 그대로. 한 장씩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테이블 왼쪽에 한서진. 오른쪽에 서아. 테이블 끝에 오민재. 맞은편 끝에 법무팀 직원 두 명. 그 뒤에 증인 두 명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증인은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한성회 직원인지 외부인인지 알 수 없었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직업적 무표정.
서아는 계약서를 첫 장부터 읽었다. 한 장씩. 법무사 사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속도. 빠르지 않았다. 느리지도 않았다. 한 줄을 읽고, 다음 줄로 넘어가기 전에 0.5초의 간격을 두는 리듬. 오른손 검지가 종이 위를 따라가고 있었다. 펜 굳은살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미세한 소리가 났다.
1조. 계약 목적. 2조. 계약 기간 2년. 3조. 거주지 삼성동 한성 대저택. 서아가 3화에서 지적했던 조항. 이제 정확한 주소와 등기 정보가 기재돼 있었다. 4조. 외부 접촉 사전 승인제. 5조. 위약금. 6조. 해지 조건. 7조. 비밀 보호.
서아는 7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미 외운 조항이었다. 손글씨로 수정된 부분. 계약의 존재 자체를 비밀로 하겠다는 것. 위반 시 전체 무효에 채무 원상복구. 서아는 그 조항 위를 손가락으로 한 번 짚고 넘겼다.
8조. 생활비 지급. 9조. 상속 관련 법적 절차 제한. 수정안이 반영돼 있었다. '본 계약 체결 전에 개시된 법적 절차는 본 조항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서아가 넣은 문장. 특별한정승인 신청서는 오늘 아침 은솔이 법원에 접수했다. 계약 체결 전. 시간 순서가 맞았다.
10조. 열람 범위. 이것도 수정안 반영. 건물 내 열람, 외부 반출 금지, 디지털 사본 건물 내 네트워크 제한. 그리고 마지막 장. 서아가 자필로 추가한 조항. '아버지 관련 개인 물품 열람 및 보관 권리.'
서아는 열두 장을 전부 읽고 마지막 장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한서진을 봤다. 한서진은 서아를 보고 있었다. 서류를 읽지 않았다. 서아가 읽는 동안 서아를 보고 있었다. 서아의 손가락이 종이 위를 따라가는 것을, 눈이 줄을 훑는 것을, 7조에서 멈추지 않고 넘기는 것을.
"다 읽었습니다."
한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법무팀 직원 한 명이 펜을 내밀었다. 만년필이었다. 검은색. 서아는 그 펜을 받지 않았다. 가방에서 자기 펜을 꺼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쓰던 볼펜. 500원짜리. 만년필과 볼펜이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였다. 법무팀 직원의 시선이 볼펜에 한 번 머물렀다.
서아는 자기 펜으로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윤서아. 어제 적은 자필 서명 위에 다시. 공식 최종본이었다. 증인이 보는 앞에서. 획이 반듯했다. 마지막 '아' 자의 끝이 살짝 올라갔다. 습관이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수천 장의 서류에 확인 사인을 하면서 만들어진 필체의 끝.
한서진이 만년필을 집었다. 서아를 한 번 봤다. 서명하기 전에.
"후회 안 해?"
서아가 한서진을 봤다. 한서진의 눈이 서류가 아니라 서아 위에 있었다.
"좋아하게 된 건 당신 사정이고, 들어가는 건 제 선택이에요."
한서진의 손이 0.5초 멈췄다. 그리고 갑의 자리에 서명했다. 한자였다. 획이 빠르고 정확했다. 먹이 종이에 스미는 소리가 들렸다. 서아의 볼펜 자국과 한서진의 만년필 자국이 같은 종이 위에 놓였다.
증인 두 명이 서명했다. 법무팀 직원이 계약서를 수거했다. 원본 2부. 갑 1부, 을 1부.
"을 사본은 302호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법무팀 직원이 서아에게 말했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본이 아니라 사본을 보낸다고 했다. 원본은 법무팀이 보관하는 것이었다. 서아는 그 차이를 기록했다. 머릿속에.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가 조용했다. 오민재가 앞에서 걸었다. 서아가 뒤따랐다. 한서진은 다른 방향으로 갔다. 서명이 끝나면 같은 복도를 걸을 이유가 없다는 듯이.
서아는 한서진의 등을 1초간 봤다. 검은 재킷. 어깨선이 반듯했다. 걸음이 빠르지 않았다. 복도의 매립등 아래서 한서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서아는 시선을 돌리고 오민재를 따라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올라가는 줄 알았다. 오민재가 B2 버튼을 눌렀다. 내려갔다.
"어디 가는 겁니까."
"대저택 동관으로 이동합니다. 지하 통로를 이용합니다."
지하 통로. 본관에서 대저택 동관까지 지하로 연결돼 있었다. 서아는 그 구조를 몰랐다. 이 건물이 단순한 사무 건물이 아니라, 대저택과 물리적으로 연결된 복합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B2. 문이 열렸다. 복도가 길었다. 형광등이 아니라 LED 바 조명이 천장에 붙어 있었다. 바닥은 에폭시. 발소리가 울렸다. 서아의 운동화와 오민재의 구두가 다른 리듬으로 바닥을 찍었다.
복도 중간에 철문이 하나 있었다. 카드키가 필요했다. 오민재가 찍었다. 문이 열렸다. 그 뒤에 또 복도. 더 좁았다. 천장이 낮아졌다. 서아의 키로는 충분했지만, 한서진의 키라면 머리를 약간 숙여야 할 높이였다.
복도 끝에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버튼이 세 개뿐이었다. B2, 1, 3. 오민재가 3을 눌렀다. 서아의 방이 있는 층이었다.
문이 열렸다. 대저택 동관 3층. 복도가 본관과 달랐다. 카펫이 아니라 대리석이었다. 벽에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서아는 그림을 보지 않았다. 복도 끝에 서 있는 사람을 봤다.
50대 남자였다. 검은 정장. 양손이 뒤로 모아져 있었다. 자세가 곧았다. 벽 앞에 서 있되, 벽에 기대지 않는 사람.
"윤서아 씨. 이선복입니다. 동관 의전을 맡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낮았다. 정중했다. 하지만 정중함의 질이 오민재와 달랐다. 오민재의 정중함은 효율이었고, 이 사람의 정중함은 규율이었다.
서아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선복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시선만 내렸다가 올렸다. 서아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한 번 훑었다. 운동화를 봤다. 시선이 0.5초 머물렀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302호로 안내하겠습니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안내가 원칙입니다."
서아는 따라걸었다. 이선복의 걸음이 정확했다. 보폭이 균일했다. 대리석 위에서 구두 소리가 메트로놈처럼 울렸다. 서아의 운동화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하나만 들렸다.
302호 앞에서 이선복이 멈췄다. 카드키를 내밀었다. 서아가 받았다.
"식사는 본관 1층 식당입니다. 오전 7시, 정오, 오후 6시."
서아가 끄덕였다.
"외부 음식 반입은 사전 승인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동관 출입은 이 카드키로 가능합니다. 본관은 별도 승인."
서아는 수첩에 적었다.
"지하 통로는 오민재 실장 동행이 필요합니다."
규칙이었다. 이선복이 서아가 적는 것을 봤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아가 적는 행위 자체를 기록하는 눈이었다. 이 사람도 관찰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추가 문의 사항은 내선 302로 연락 주십시오."
이선복이 돌아섰다. 걸어갔다. 대리석 위의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서아는 그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복도에 서 있었다.
카드키를 찍고 302호에 들어갔다. 어제 풀어놓은 옷이 옷장에 걸려 있었다. 침대가 정돈돼 있었다. 서아가 정돈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들어와서 정리한 것이다. 이불의 접힌 각도가 호텔처럼 정확했다.
서아는 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창문. 열렸다. 3층이니 물리적으로 나갈 수 있는 높이. 하지만 창 밖 정원에 CCTV가 두 개 있었다. 나무 사이에 숨겨져 있었지만 렌즈의 반사광이 보였다. 서아는 창문을 닫았다.
화장실. 세면대, 거울, 수건 두 장. 수건이 새 것이었다. 비누도 새 것. 샴푸와 린스가 놓여 있었다. 서아가 쓰는 브랜드였다. 서아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3초가 걸렸다. 이 브랜드를 어떻게 알았는지. 한서진의 관찰인지, 오민재의 조사인지. 아니면 골목 집 화장실에 들어가 본 사람이 있었는지.
서아는 화장실을 나왔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수첩을 펼쳤다. 오늘의 기록을 정리했다. '계약 서명 완료(공식). 증인 2. B2 지하통로 확인. 전용 엘리베이터 B2-1-3. 이선복 — 의전 책임자. 식사 시간 고정. 본관 출입 별도 승인. 샴푸 브랜드 일치(경로 불명).'
수첩을 닫았다. 서랍을 열었다. 윤호의 비닐우산이 접혀 있었다. 편의점 태그. 2,500원. 서아는 서랍을 닫지 않고 우산을 봤다. 이 방에서 이 우산만 서아의 것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한성회가 준비한 것.
서아는 서랍을 닫고 일어섰다. 방을 나왔다. 복도를 걸었다. 대리석 위의 운동화. 이선복의 구두 소리와 달리 서아의 발소리는 없었다. 복도가 길었다. 서아는 302호에서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어디로 이어지는지 보고 싶었다.
복도 끝에 문이 하나 있었다. 잠겨 있었다. 카드키를 찍었다. 열리지 않았다. 이 카드키로 열 수 없는 문. 서아는 문의 번호를 봤다. 번호가 없었다. 번호 없는 문.
문 옆 벽에 작은 패널이 있었다. 카드키 리더가 아니라 지문 인식기였다. 서아의 지문으로는 열 수 없는 문이었다.
서아는 돌아섰다. 복도를 되걸었다. 302호를 지나 반대쪽 끝으로 갔다. 그쪽에도 문이 있었다. 이 문은 열렸다. 비상계단이었다. 서아는 계단을 내려다봤다. B2까지 내려갈 수 있는 구조. 올라가면 옥상. 서아는 계단을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 구조를 확인한 것으로 충분했다.
302호로 돌아왔다. 창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밤이 왔다. 서아는 불을 켜지 않고 창가에 섰다. 정원의 나무가 어둠 속에서 실루엣으로 남아 있었다. CCTV의 적외선이 빨갛게 깜빡였다. 어둠 속에서만 보이는 빛.
서아는 이 집의 구조를 머릿속에 그렸다. 본관 B2에서 동관 3층까지 이어지는 지하 통로. 번호 없는 잠긴 문. 지문 인식기. 비상계단. 고정된 식사 시간. 카드키 출입 기록. 이 집은 집이 아니었다. 체계였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관리하는 곳.
전화기를 봤다. 윤호에게서 온 메시지가 없었다. 어제 서아가 보낸 '멀리 가게 될 것 같아'에 대한 답이 아직 없었다. 윤호는 답을 하지 않는 것이 답인 사람이었다. 서아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밤 열한 시. 서아는 잠들지 않았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지나갔다. 규칙적인 간격. 순찰이었다. 서아는 그 간격을 세었다. 47분. 순찰 주기를 수첩에 기록했다.
수첩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이 높았다. 골목 집의 천장보다 두 배는 높았다. 높은 천장은 넓어 보이지만, 누우면 멀게 느껴졌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 서아는 손을 뻗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 이 집에서의 일과가 시작된다. 식사 시간, 출입 기록, 열람실 사용, 오민재의 동행. 서아는 그 일과의 틈을 찾아야 했다. KC 코드, 도장, 아버지의 장부. 답은 이 집 안에 있었다. 잠긴 문 뒤에.
서아는 눈을 떴다. 잠이 오지 않았다. 일어나 창가에 다시 섰다. 정원 너머로 담장이 보였다. 담장 너머는 강남의 불빛이었다. 가깝고 먼 불빛. 저 불빛 중 하나가 윤호네 동네일 것이다.
복도에서 다시 발소리가 지나갔다. 47분. 정확했다.
서아는 창에서 돌아섰다. 복도 쪽 문을 봤다. 닫혀 있었다. 잠기지 않는 문이었다. 안에서 잠글 수 없다는 뜻이었다. 서아는 그 사실을 수첩에 적지 않았다. 기억했다.
다시 누웠다.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천장을 봤다.
내일 아침, 이선복이 정해준 시간에 식당에 앉아야 했다. 한서진과 같은 테이블인지, 다른 테이블인지 아직 몰랐다. 서아는 그것이 이 집의 규칙을 읽는 첫 번째 단서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텅 빈 복도 끝의 잠긴 문이 떠올랐다. 번호 없는 문. 지문 인식기. 서아는 오민재에게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 물으면 경계를 올리는 것이었다. 대신 관찰할 것이다. 누가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지. 언제 열리는지.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이 집에서 제일 위험한 건 누구죠."
서아는 소리 내어 말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방에서. 자기 목소리가 천장에 부딪혀 내려왔다. 대답은 없었다. 서아는 그 질문을 수첩에 적지 않았다. 적을 필요가 없었다. 이 집에 있는 동안 매일 떠오를 질문이었다.
새벽 한 시. 서아는 잠들었다. 운동화가 침대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뛰어야 할 때 뛸 수 있는 신발. 1화에서 신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오늘도 풀지 않고 옆에 두었다.
같은 시각, 한서진은 17층 집무실에 있었다. 책상 위에 서아의 계약서 사본이 놓여 있었다. 서아가 볼펜으로 적은 서명. 마지막 '아' 자의 끝이 올라간 필체. 한서진은 그 서명을 보고 있었다.
창 너머로 대저택 동관 3층의 불빛이 보였다. 302호. 서아의 방. 불이 꺼져 있었다.
오민재가 들어왔다. 보고서를 내밀었다. 한서진이 받아 읽었다. 한 줄에서 멈췄다. '차윤호 — 서아 출발 시각 대저택 정문 방향 120초간 주시 후 이탈.' 한서진은 그 줄을 두 번 읽었다. 보고서를 뒤집어 책상에 놓았다. 서아의 서명이 보이는 쪽을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