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선택의 비용
골목은 막혀 있었다. 차윤호가 그걸 알아차린 건, 뒤에서 발소리가 두 개 더 붙었을 때였다.
앞에 한 명. 뒤에 두 명. 윤호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앞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차윤호 씨 맞으시죠."
경어였다. 6화의 골목에서 서아에게 사진을 들이밀었던 남자와 같은 톤이었다. 정중함으로 포장된 위협. 앞의 남자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뭘 들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누구세요."
"잠깐만 여쭤볼 게 있어서요. 윤서아 씨 아시죠?"
윤호의 턱이 한 번 움직였다. 이를 악문 것이 아니었다. 이름을 들은 반응이었다. 서아의 이름이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윤호는 그 사실의 무게를 0.5초 만에 재었다.
"모르는데요."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같은 동네시잖아요."
뒤의 두 명이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윤호는 뒤를 보지 않았다. 대신 앞 남자의 패딩 주머니를 봤다. 손의 윤곽이 주머니 천을 밀고 있었다. 뭔가를 쥐고 있었다. 칼인지 전화기인지 구분이 안 됐다.
"동네 사는 건 맞는데, 그 사람 개인 일은 몰라요."
"요즘 어떤 사람 만나는지, 어디 가는지. 그 정도만요."
윤호가 앞 남자를 봤다. 마스크 위의 눈. 위협적이지 않았다. 사무적이었다. 정보를 수집하러 온 사람의 눈이었다. 때리러 온 게 아니라 물으러 온 것이었다. 윤호는 그 차이를 읽었다. 물으러 온 사람에게는 대충 답해도 된다.
"일 바쁜 것 같던데요. 저는 잘 모릅니다."
"혹시 최근에 검은 차 타고 다니는 거 보셨어요?"
윤호는 봤다. 여러 번 봤다. 서아가 오민재의 세단에 타는 걸 봤고, 골목에 검은 차가 서 있는 걸 세 번 세었고, 서아가 우산 대신 차를 선택한 밤을 봤다. 하지만 윤호의 입에서 나온 건 다른 말이었다.
"이 동네 검은 차 많죠. 카니발도 검은 거 많고."
앞 남자의 눈이 좁아졌다. 윤호가 둘러대고 있다는 걸 아는 눈이었다. 하지만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뒤의 두 명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앞 남자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명함이었다. 칼이 아니었다.
"혹시 나중에 생각나시면 연락 주세요."
명함을 윤호 쪽으로 내밀었다. 윤호는 받지 않았다. 남자가 명함을 윤호의 발 앞에 놓았다. 세 명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윤호는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10초를 서 있었다. 명함을 내려다봤다. 이름도 직함도 없었다. 전화번호 하나만 적혀 있었다. 윤호는 명함을 주웠다. 주머니에 넣지 않고 주먹 안에 쥐었다.
전화기를 꺼냈다. 서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울리고 받았다.
"윤호야?"
"너 때문에 사람이 왔다."
서아의 숨소리가 멈췄다. 전화기 너머의 침묵이 달랐다. 보통의 침묵이 아니었다. 공기가 빠진 침묵.
"다치진 않았어?"
"안 다쳤어. 물어보기만 하고 갔어."
"뭘 물어봤는데."
"너 어디 가는지, 누구 만나는지. 검은 차 봤냐고."
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2초. 3초. 윤호가 기다렸다.
"서아야. 이거 빚쟁이 수준이 아니야."
서아는 알고 있었다. AP구파는 빚쟁이가 아니었다. 채권 조각을 유통하는 조직이었고, 서아의 아버지가 그 유통 구조 안에 있었고, 서아가 그 구조를 파헤치기 시작한 것을 알아챈 쪽이었다.
"알아. 윤호야, 미안해."
"사과하지 마. 그거 말고, 뭘 해야 하는지 말해."
윤호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골목에서 세 명에게 둘러싸였던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서아에게 뭘 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서아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윤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세계에서 윤호는 무기가 없었다. 주먹은 명함을 내미는 사람에게 쓸 수 없었고, 직설은 경어로 위협하는 사람에게 통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당분간 조심해. 모르는 사람이 말 걸면 무시하고."
"서아야."
"응."
"네가 그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는 안 물을게. 근데 하나만. 네가 선택한 거 맞아?"
서아의 목이 뜨거워졌다. 선택. 서아가 한서진의 대저택에 들어간 것을 윤호는 알고 있었다. 이사 나간 집을 보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서아의 골목 집이 비어 있다는 걸.
"내가 선택한 거야."
"알았어."
윤호가 전화를 끊었다. 서아는 전화기를 귀에서 떼지 못하고 2초를 더 들고 있었다. 통화 종료음이 울렸다. 서아는 전화기를 내렸다.
302호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풀지 않은 가방 옆에. 서아는 가방 지퍼를 봤다. 가방을 풀지 않은 건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간다고 해서 윤호가 안전해지지 않았다. 서아가 어디에 있든 AP구파는 윤호를 찾아냈다. 서아의 바깥 세계를 흔들어 서아를 압박하는 방식. 서아가 안에 있으면 한서진의 보호 범위 안이었고, 밖에 있으면 아무 방패도 없었다.
은솔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솔아, 윤호한테 AP구파 쪽이 접근했어."
전화기 너머로 은솔의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직접?"
"골목에서 붙잡고 물어봤대. 서아 동향."
"윤호 괜찮아?"
"괜찮대. 근데 은솔아, 이러면 안 돼."
서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법무사 사무실 톤이 아니었다. 감정이 섞인 톤이었다. 서아가 이 톤을 쓰는 건 드물었다.
"계약 완전 수락하려고."
은솔이 1초 침묵했다.
"조건부였잖아. 수정안 반영하고, 특별한정승인 신청하고."
"그건 그대로 가. 근데 서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서아는 숨을 한 번 쉬고 이었다.
"서명 안 하면 보호도 없어. AP구파가 너한테도 올 수 있고."
"서아야, 그건 네가 갇히는 거잖아."
"갇히는 게 아니야. 들어가는 거야."
서아의 목소리가 다시 평탄해졌다. 감정이 빠졌다. 결심한 뒤의 목소리. 은솔은 그 톤을 알았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서아가 채권자에게 최종 합의안을 제시할 때 쓰는 목소리. 더 이상 바꿀 여지가 없을 때.
"특별한정승인 신청서 초안 다 됐어?"
"어제 밤에 마무리했어."
"내일 아침에 보내줘. 서명 전에 신청서 접수부터 해야 해."
"알겠어. 서아야."
"응."
"조심해."
전화를 끊었다. 서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수첩을 펼치고 오늘의 할 일을 정리했다. '1. 특별한정승인 신청서 최종 확인. 2. 계약서 서명. 3. 서명 전 자필 조건 추가.' 세 줄. 서아는 펜을 놓고 창밖을 봤다. 정원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3층에서 보는 바람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유리가 두꺼웠다.
오후 두 시. 서아는 17층 집무실 문 앞에 섰다. 오민재가 문을 열었다. 네 번째 방문. 서아는 세고 있었다.
한서진이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소파가 아니었다. 책상. 12층에서의 배치와 같았다. 계약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최종본. 서아의 수정안이 반영된 버전.
서아가 앉았다. 의자가 12층 때보다 높았다. 시선 차이가 줄어 있었다. 서아는 그 변화를 기록했다.
"서명하러 왔습니다."
한서진이 서아를 봤다. 1초. 서류를 보지 않았다. 서아의 얼굴에서 무엇을 읽으려는 것이었다. 서아는 읽히지 않는 얼굴을 유지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수백 번 연습한 표정. 숫자만 남기고 감정을 지우는 얼굴.
"무슨 바람이야."
"바람이 아니라 계산입니다."
한서진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한 번 두드려졌다. 같은 신호.
"무슨 계산."
서아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배로 쉬었다. 목소리가 평탄하게 나왔다.
"나 하나 망하는 건 참겠는데, 내 바깥까지 망가지는 건 못 참아요."
한서진의 손이 멈췄다. 서아의 말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읽고 있었다. '내 바깥'이 윤호를 가리킨다는 걸, 은솔을 가리킨다는 걸, 서아의 가족을 가리킨다는 걸. 한서진은 알고 있을 것이었다. 서아의 바깥 세계를 전부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AP구파."
한서진이 말했다. 서아가 꺼내지 않은 이름을 또 먼저 꺼냈다.
"차윤호 씨한테 접근했습니다."
"알아."
또 같은 두 글자. 서아는 이 두 글자의 무게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한서진이 '알아'라고 할 때, 그것은 이미 처리 중이거나 처리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AP구파 접근은 내가 막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건 서명의 이유가 아닙니다."
한서진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서아를 더 깊이 보려는 동작.
"서명의 이유가 뭔데."
서아는 계약서를 집었다. 마지막 장을 펼쳤다. 서명란이 두 개. 갑과 을. 갑의 자리에 한서진의 서명이 이미 있었다. 먹으로 쓴 한자. 3화에서 봤던 것과 같았다. 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안에서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요."
서아의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사무적이었다. 하지만 그 사무적 톤 안에 결심이 들어 있었다. 굴복이 아니었다. 침투였다. 한서진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 안에서 아버지의 채무 구조를, 도장의 정체를, KC 코드의 비밀을 파헤치겠다는 것.
한서진은 3초간 서아를 봤다. 서아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서아가 왜 서명하려는지, 그 동기를 분류하고 있었다. 보호를 위해서인지, 전략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서명 전에 하나 추가하겠습니다."
서아가 수첩에서 펜을 꺼냈다. 오른손 검지의 펜 굳은살이 계약서 위에 닿았다.
"자필 추가 조항입니다. 계약서 부속 합의에 포함시켜 주십시오."
한서진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부하지도 않았다. 서아의 펜이 움직이는 것을 봤다.
서아가 계약서 마지막 장 하단, 서명란 위 여백에 적었다.
'아버지 관련 개인 물품 열람 및 보관 권리.'
글씨가 반듯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수천 장의 서류에 주석을 달면서 만들어진 글씨. 한 획도 떨리지 않았다.
한서진이 그 글씨를 읽었다. 서아의 손이 펜을 놓았다.
"이걸 넣으면 서명해?"
"네."
한서진이 2초간 침묵했다. 서아가 세고 있었다. 2초. 짧았다. 12층에서보다 짧았다. 계산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좋아."
서아는 펜을 다시 집었다. 을의 자리. 서명란. 서아는 이름을 적었다. 윤서아. 세 글자. 펜끝이 마지막 획을 그을 때, 서아의 손가락에 힘이 한 번 들어갔다. 종이 위에 눌린 자국이 다른 글자보다 깊었다.
서명이 끝났다. 서아는 펜을 내려놓았다. 계약서를 한서진 쪽으로 밀었다. 한서진이 계약서를 집었다. 서명을 확인했다. 서아의 글씨를 2초간 봤다. 그리고 자필 추가 조항을 봤다. '아버지 관련 개인 물품 열람 및 보관 권리.' 한서진의 시선이 그 줄 위에 1초 더 머물렀다.
"민재. 법무팀에 전달해."
오민재가 앞으로 나와 계약서를 받았다.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서아와 한서진이 방에 남았다. 서류가 없는 책상. 커피잔도 없었다. 오늘은 커피가 없었다. 한서진이 준비하지 않은 것이었다. 서명하러 오는 자리에 커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인지, 다른 이유인지.
"내일부터 열람실 쓸 수 있게 해줄게."
"감사합니다."
서아가 일어섰다. 의자를 밀고 가방을 들었다. 문 쪽으로 걸었다.
"서아."
서아가 멈췄다. 한서진이 이름을 불렀다. 8화에서와 같았다. 성이 아니라 이름.
"바깥이 망가지는 건 내가 안 할 거야."
서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문장을 등으로 들었다. '바깥이 망가지는 건 안 할 거야.' 서아의 말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었다. 서아가 '내 바깥까지 망가지는 건 못 참는다'고 했고, 한서진이 '바깥이 망가지는 건 안 하겠다'고 한 것. 약속인지, 선언인지, 계산인지. 서아는 분류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서아가 나갔다. 복도를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3층. 302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가방을 봤다. 풀지 않은 가방. 서아는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옷을 꺼내 옷장에 넣기 시작했다. 한 벌씩. 셔츠, 바지, 속옷. 옷장의 나무 냄새가 났다. 새 가구 냄새. 이 옷장은 서아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수첩을 꺼냈다. 가방이 비었다. 접어서 침대 밑에 넣었다. 서아는 수첩을 펼쳐 오늘 날짜 아래에 한 줄을 적었다.
'계약 서명 완료. 자필 조항 포함. 침투 시작.'
수첩을 닫고 서랍에 넣었다. 윤호의 비닐우산 옆에. 서랍 안에서 우산의 편의점 태그가 보였다. 2,500원. 서아는 서랍을 닫았다.
창밖을 봤다. 오후의 정원이 조용했다. 나무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서아는 이 정원을 얼마나 오래 보게 될지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서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닫힌 성 안에서 문을 여는 일은 밖에서 두드리는 것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열쇠는 안에 있었다.
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정원의 나무가 흔들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