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법으로 찌르는 밤
새벽 두 시. 노트북 화면이 방 안에서 유일한 빛이었다. 왼쪽에 상속법 캡처본, 오른쪽에 계약서 사본 사진. 서아는 두 화면을 번갈아 보며 수첩에 숫자를 적고 있었다. 스탠드는 한 시간 전에 껐다. 형광등보다 화면 불빛이 글자에 집중하기 쉬웠다.
민법 제1019조 제3항. 특별한정승인. 상속인이 상속 채무의 존재를 중대한 과실 없이 알지 못한 경우,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한정승인을 할 수 있다. 서아는 이 조항을 세 번째 읽고 있었다.
아버지의 채무 23억. 이 중 서아가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은 은행 대출 4억과 카드 채무 8천만이었다. 나머지 18억 2천만은 채권 조각으로 쪼개져 유통되고 있었고, 서아가 그 존재를 안 것은 병원에서 한서진을 만난 날이었다. 일주일 전.
수첩에 적었다. '채무 인지일: 3월 X일. 특별한정승인 신청 기한: 6월 X일. 남은 기간: 약 89일.'
89일. 서아는 그 숫자를 두 번 밑줄 쳤다. 한서진의 계약서에는 기간이 2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정승인이 받아들여지면, 서아는 아버지의 채무 전체를 상속 재산 범위 내로 제한할 수 있었다. 상속 재산이 거의 없으니, 채무 23억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는 셈이었다.
채무가 사라지면 계약의 전제가 무너진다.
서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전제가 무너진다. 하지만 동시에, 한서진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한성회에는 법무팀이 있었다. 상속법을 모르는 법무팀은 없다. 그렇다면 계약서에 이 변수를 막는 조항이 있어야 했다.
서아는 계약서 사본을 다시 열었다. 1조부터 다시 읽었다. 한 조항씩, 한 문장씩. 법무사 사무실에서 채무 서류를 검토하던 방식이었다. 전체를 보지 않는다. 한 줄을 본다. 그 줄 안에서 빠진 것을 찾는다.
9조에서 멈췄다. '본 계약 체결 후, 을은 계약 기간 중 상속 관련 법적 절차를 개시하지 않기로 한다.' 서아는 이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처음에는 넘길 뻔했다. 일반적인 현상 유지 조항처럼 보였다. 하지만 네 번째에 보였다.
'상속 관련 법적 절차'라고만 되어 있었다. 특별한정승인을 명시하지 않았다. 포괄적 금지 조항이지만, 구체적 열거가 없으면 법원에서 효력을 다툴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건, 서아가 아직 계약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명 전이라면 이 조항은 적용되지 않는다.
수첩에 적었다. '9조 허점: 계약 전 특별한정승인 신청 → 9조 적용 불가. 신청 후 서명하면 기신청 절차는 소급 금지 원칙으로 보호.'
서아는 수첩을 내려다봤다. 손글씨가 빽빽했다. 두 시간 동안 적은 것들. 법 조항, 계약서 조항, 둘 사이의 틈. 틈이 있었다. 좁았지만 있었다.
전화기를 봤다. 새벽 두 시 십칠분. 은솔에게 전화하기엔 늦었다. 서아는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아침 여덟 시에 만나자. 할 얘기 많아. 특별한정승인 관련.'
보내고 나서 노트북을 닫았다. 방이 어두워졌다. 스탠드를 켰다. 천장 대신 책상 위만 밝혀졌다. 메모지의 2016.03.17이 빛 아래 놓여 있었다. 서아는 그 숫자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잠이 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숫자들이 순서를 바꿔가며 줄을 섰다. 23억, 89일, 7조, 9조. 그 사이에 KC-0317이 끼어들었다.
눈을 떴을 때 스탠드가 여전히 켜져 있었다. 시계를 봤다. 여섯 시 사분. 네 시간도 못 잤다. 서아는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와 같은 운동화를 신었다.
은솔에게서 답이 와 있었다. '8시 OK. 어디서?' 서아가 답했다. '강남역 2번 출구 카페.'
카페에 먼저 도착한 건 서아였다. 구석 자리에 앉아 수첩을 펼쳤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지갑에 만 원이 한 장 남았다.
은솔이 여덟 시 정각에 들어왔다. 노트북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서아를 보자마자 앉으며 가방을 열었다. 인사보다 서류가 먼저였다. 은솔이 그런 사람이었다.
"어젯밤에 찾아봤어. KC 코드."
은솔이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 법률 데이터베이스가 떠 있었다. 서아가 보낸 사진이 한쪽에 열려 있었다.
"한성회 채권 양도 내부 코드 맞아. 근데 공식 문서에는 안 나와. 내부 전산에서만 쓰는 거야."
"아버지가 그걸 왜 가지고 있었을까."
은솔이 서아를 봤다. 2초. 은솔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그 질문은 네가 답해야 할 거라고. 서아도 알고 있었다.
"그건 나중에 풀자. 먼저 이거 봐."
서아가 수첩을 밀었다. 은솔이 수첩을 들고 읽었다. 눈이 빨랐다. 반 페이지를 읽는 데 10초. 서아가 쓴 글씨를 은솔은 해독할 줄 알았다. 3년을 같은 사무실에서 일한 사이였다.
"특별한정승인."
"응. 9조에 허점이 있어."
은솔이 수첩을 내려놓고 노트북으로 계약서 사본 사진을 열었다. 9조를 확대했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 없이 읽고 있었다. 30초.
"이거 일부러 빼놓은 건 아닐까?"
서아가 은솔을 봤다.
"함정이라는 거야?"
"한성회 법무팀이 특별한정승인을 몰랐을 리 없잖아. 빼놓은 거면, 네가 이걸 찾기를 기다린 거일 수도 있어."
서아는 그 가능성을 이미 생각했다. 새벽 세 시에. 한서진이 일부러 틈을 남겨둔 것. 서아가 그 틈을 찾아 들어오는 걸 보려는 것. 시험.
"함정이어도 상관없어."
은솔이 고개를 들었다.
"특별한정승인 신청 자체는 법적 권리야. 함정이든 아니든 신청이 유효하면 채무 구조가 바뀌어. 바뀐 채무 구조 위에서 계약을 다시 짜는 게 내 수정안이야."
서아의 목소리가 사무적이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채권자에게 설명하던 톤. 감정을 빼고 사실만 쌓는 방식. 은솔은 그 톤을 알았다. 서아가 결심했을 때 나오는 목소리.
"수정안 뼈대 잡아줘. 내가 살 붙일게."
은솔이 노트북을 서아 쪽으로 돌렸다. 두 시간 동안 카페에서 수정안을 만들었다. 은솔이 법률 용어를 잡았고, 서아가 숫자를 맞췄다. 커피가 식었다. 서아는 마시지 않았다. 집중하면 목마름을 잊는 타입이었다.
열 시에 카페를 나왔다. 서아의 가방 안에 수정안 인쇄본이 들어 있었다. A4 네 장. 한서진에게 보여줄 서류.
"조심해."
은솔이 말했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강남역에서 한성회 건물까지 도보 7분. 어제 같은 길이었다. 하지만 어제는 계약서를 분석하러 갔고, 오늘은 역제안을 들고 갔다. 같은 건물, 다른 무게.
1층 로비. 검은 양복의 남자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서아가 들어서자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도 이름을 묻지 않았다.
12층. 카펫 위를 운동화가 밟았다. 어제와 같은 무음. 복도 끝 문 앞에 오민재가 서 있었다. 어제와 같은 자세. 양손이 앞으로 모아져 있었다.
"오셨습니까."
같은 인사. 서아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문 앞에 섰다. 오민재가 문을 열었다.
방 안. 어제와 같았다. 책상, 의자 두 개, 소파, 통유리 창. 서울이 내려다보였다. 오늘은 비가 갠 뒤여서 하늘이 흐릿한 회색이었다. 햇빛은 없었지만 방은 밝았다. 유리가 빛을 모으는 방식이었다.
한서진이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어제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서류가 없었다. 책상 위가 비어 있었다. 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서아는 이번에는 앉았다. 의자가 어제와 같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 낮은 의자. 시선 차이가 생기는 높이. 서아는 등을 의자에 붙이지 않았다. 허리를 세우고 가방에서 수정안을 꺼냈다. A4 네 장을 책상 위에 놓았다.
"수정안 가져왔습니다."
한서진이 서류를 내려다봤다. 손을 뻗지 않았다. 읽지 않고 서아를 봤다.
"직접 설명해."
서아는 수정안 첫 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9조 수정입니다. 원안은 계약 기간 중 상속 관련 법적 절차 개시 금지. 수정안은, 계약 체결 전에 개시된 법적 절차는 본 조항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한서진의 눈이 서아의 손가락 끝에서 서류 위로 내려갔다. 1초. 다시 서아의 얼굴로 올라왔다.
"계약 전."
"네. 특별한정승인 신청을 계약 서명 전에 하겠다는 뜻입니다."
한서진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한 번 두드려졌다. 어제와 같은 동작이었다. 리듬 없는 타격. 계산 중이라는 신호.
"특별한정승인이 받아들여지면 채무 구조가 바뀌어."
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진이 핵심을 바로 짚었다. 채무 구조가 바뀌면 계약의 기초가 흔들렸다. 서아를 묶는 23억이라는 숫자 자체가 줄어들 수 있었다.
"바뀌어도 0은 안 됩니다. 상속 재산 범위 내의 채무는 남아요. 아버지 명의 부동산 잔여분, 퇴직금 수령분. 대략 1억 8천에서 2억 사이로 추산했습니다."
서아의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숫자를 말할 때 서아는 가장 안정적이었다. 감정은 모호하지만 숫자는 정확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배운 것. 채권자 앞에서 울면 지지만, 숫자를 대면 대화가 된다.
"23억이 2억으로."
한서진이 말했다. 서아를 보는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어제는 서류를 평가하는 눈이었다. 오늘은 달랐다. 서아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시선. 무게가 있었다. 온도는 없었다.
"회장님들 세계엔 계약이 법보다 위겠죠."
서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제 세계엔, 법이 아직 완전히 안 죽었어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냉방기 소리가 없었다. 어제는 들렸던 소리. 오늘은 꺼져 있었다. 방의 온도가 어제보다 반 도쯤 높았다. 서아는 그 차이를 팔뚝으로 느꼈다.
한서진이 수정안을 집었다. 처음으로 서류를 만졌다. 첫 장을 읽었다. 두 번째 장. 세 번째 장. 넘기는 속도가 빨랐다. 읽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보는 것이었다. 네 번째 장에서 멈췄다.
"마지막 항목. 열람 범위 확대."
서아가 끄덕였다. 3화에서 합의한 '열람 가능, 반출 불가, 사본 항목별 승인'에 더해, 채권 조각의 원채권자 정보와 양도 이력까지 열람 범위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KC 코드가 뭔지 아시죠."
한서진의 손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0.5초. 서아는 세고 있었다. 한서진이 반응하기까지의 시간. 0.5초는 짧았다. 예상했다는 뜻이었다.
"어디서 들었어."
질문이었지만 물음표가 붙지 않는 억양이었다. 경로를 추적하는 문장.
"아버지 유품에서 나왔습니다."
한서진이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반듯하게. 모서리를 가지런히 맞추는 손이 정확했다. 서아는 그 손가락을 봤다. 길고 건조한 손가락. 펜 굳은살이 없는 손.
오민재가 문 옆에서 미세하게 자세를 바꿨다. 무게 중심이 왼발에서 오른발로 옮겨진 것. 서아는 시야 끝으로 그 변화를 잡았다. KC 코드가 단순한 분류 번호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한서진이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서아를 내려다보는 각도가 달라졌다. 위에서 아래로. 하지만 올려보는 서아의 시선이 피하지 않았다.
"수정안 두 가지는 검토할게."
서아는 기다렸다. '두 가지'라고 했다. 수정안 항목은 네 가지였다. 나머지 두 가지는 거절이라는 뜻인지, 보류라는 뜻인지.
"9조 수정과 열람 범위 확대. 이 두 개는 내 쪽에서 검토해야 해."
"나머지 두 항목은요."
"위약금 감액은 안 돼. 해지 통보 기간 7일도 안 돼."
서아는 수첩을 꺼내 적었다. 거절 항목. 위약금, 해지 기간. 승인 가능 항목. 9조, 열람 범위. 한서진이 수첩을 보고 있었다.
"대신."
한서진이 말했다. 서아의 펜이 멈췄다.
"나도 조건 하나 추가하지."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한서진의 얼굴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의 무게가 달라져 있었다. 앞의 문장들보다 이 한 문장에 더 많은 것이 실려 있었다.
"계약 기간 중 거주지를 삼성동 한성 대저택으로 지정한다."
서아의 손가락이 수첩 위에서 멈췄다. 3조. 거주지 지정. 3화에서 서아가 정확한 주소가 없다고 지적했던 조항이었다. 한서진이 그 허점을 메웠다. 주소를 특정해서.
삼성동 한성 대저택. 한서진의 집이었다.
"같은 건물에 사는 겁니까."
"같은 집이야."
서아의 등이 의자에 닿았다. 의도하지 않은 동작이었다. 0.5초 만에 등을 다시 떼고 허리를 세웠다. 한서진의 눈이 그 움직임을 따라갔을 것이다. 서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같은 집. 한서진의 영역 안에 들어가는 것. 3일간의 유예 기간에도 '어디 가는지 알려달라'고 했던 사람이, 아예 같은 지붕 아래를 요구하는 것.
"거부하면요."
"수정안 전체가 없던 일이 돼."
서아는 수첩에 적었다. '삼성동 대저택 거주 의무. 거부 시 수정안 전체 폐기.' 손글씨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펜을 쥔 검지의 힘이 평소보다 강했다.
서아는 숨을 한 번 쉬었다. 들어가면 윤호에게서 멀어진다. 집에서, 골목에서, 편의점 처마 밑에서 우산을 들고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서 멀어진다. 그 생각이 지나갔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검토 후 답변드리겠습니다."
서아가 수첩을 닫고 가방에 넣었다. 의자에서 일어섰다. 한서진은 일어서지 않았다.
"내일 자정까지야. 3일의 마지막 날."
서아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시선을 맞추고 돌아섰다. 문 쪽으로 걸었다. 오민재가 문을 열었다.
복도를 걸었다. 카펫 위의 무음. CCTV 세 개가 서아의 등을 찍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기다리는 동안 손을 봤다.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손바닥이 축축했다. 땀이었다.
1층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비가 갠 뒤의 공기가 축축했다. 서아는 건물을 등지고 걸었다. 삼성동 대저택. 한서진의 집. 들어가면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으면 9조 수정도, 열람 범위 확대도 없었다. 특별한정승인 카드가 손에 있어도, 쓸 수 있는 테이블에 앉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전화기를 꺼냈다. 은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9조랑 열람 범위는 검토해준대. 대신 거주지 조건 추가됐어. 삼성동.' 보내고 나서 주머니에 넣었다.
윤호에게는 보내지 않았다. 뭐라고 써야 할지 몰랐다. '한서진 집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라고 쓸 수는 없었다. 7조가 아니더라도, 그 문장은 서아의 입에서 나올 수 없었다.
강남역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사람이 많았다. 어제와 같은 풍경이었다. 서아는 그 사이에 서서 숨을 쉬었다. 내일 자정까지. 시간이 줄고 있었다.
서아가 나간 뒤, 한서진은 수정안 네 장을 다시 집었다. 세 번째 장, 열람 범위 확대 항목 옆에 서아의 손글씨가 있었다. 'KC-0317 관련 원채권자 정보 포함 여부 확인 요망.' 서아는 입으로는 KC 코드를 언급했지만, 서류에도 남겨둔 것이었다.
한서진은 그 글씨를 손가락으로 한 번 짚었다. 오민재를 보지 않고 말했다.
"법무팀 말고, 내가 직접 검토해."
문이 닫힌 뒤, 수정안은 서랍이 아니라 책상 위에 놓였다. 어제의 계약서 사본 옆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