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비 오는 날의 검은 차
비가 시작된 건 오후 여섯 시였다. 예보에 없던 비였다. 서아는 편의점 앞 처마 밑에 서서 비닐봉지를 왼손에 걸었다. 삼각김밥 두 개와 생수 한 병. 저녁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했지만, 지금은 그게 전부였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운동화 코를 적셨다. 서아는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등이 편의점 유리에 닿았다. 안에서 알바생이 한 번 쳐다봤다가 고개를 돌렸다.
전화기를 꺼냈다. 은솔에게 보낸 메시지에 아직 답이 없었다. '수정안 작업 도와줘. 만나서 얘기하자.' 보낸 지 네 시간. 은솔이 이렇게 늦는 건 처음이었다. 법무사 시험 준비 중에도 카톡은 세 시간 안에 확인하는 사람이었다. 서아는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집에서 나온 건 한 시간 전이었다. 집 앞 골목에 낯선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검은 세단. 제네시스 G80. 주차 위치가 어중간했다. 집 현관을 보기에 딱 맞는 각도. 시동이 걸려 있었다. 배기구에서 하얀 연기가 나왔다. 서아는 그 차를 보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편의점까지 걸어 나온 것이었다. 번호 끝 네 자리. 7782. 수첩에 적지 않았다. 머릿속에 넣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 빠른 리듬이었다. 뛰고 있었다.
"야, 우산도 없이 뭐 해."
차윤호였다. 투명한 비닐우산을 들고 있었다. 편의점 우산이었다. 태그가 아직 달려 있었다. 방금 산 것이다. 숨이 조금 가빴다. 뛰어왔다는 뜻이었다.
"윤호야. 왜 여기 있어?"
"이모네 갔다 오는 길이야. 골목에서 너 봤어."
윤호가 우산을 서아 쪽으로 기울였다. 자기 오른쪽 어깨가 비에 젖고 있었다. 후드 티셔츠가 어깨 선을 따라 진하게 물들었다. 서아는 우산 아래로 들어가지 않았다. 처마 밑이면 충분했다.
"밥은?"
서아가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윤호가 봉지 안을 들여다봤다. 입이 한 번 벌어졌다 닫혔다. 말을 삼킨 것이었다. 삼킨 말은 2초 뒤에 나온 것과 달랐다.
"삼각김밥이 밥이냐."
"두 개면 밥이야."
윤호가 비닐봉지를 가져가려 했다. 서아가 손을 뺐다. 윤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붙잡지 않았다. 윤호는 늘 그랬다. 한 번 뻗고, 한 번 거절당하면 내리는 사람. 두 번 붙잡는 법이 없었다. 서아는 그게 고마우면서 가끔 서늘했다. 놓을 줄 아는 사람은, 언젠가 진짜로 놓는다.
"집에 있어야지, 이 비에."
"집이 좀 답답해서."
윤호가 편의점 옆에 우산을 접어 세웠다. 처마 밑으로 들어왔다. 서아보다 머리 반 개는 큰 키가 처마 끝에 가까웠다. 빗방울이 윤호의 이마 위를 스쳤다. 윤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은솔이는?"
"연락이 안 돼."
"걔가? 이상하네."
서아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은솔은 업무 메시지에 늦게 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네 시간이 넘었다. 서아는 창 너머 편의점 안을 봤다. 알바생이 음료 냉장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평범한 저녁이었다. 밖에서만 평범하지 않았다.
윤호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시선이 서아에게서 벗어났다. 도로 쪽을 보고 있었다. 입이 닫혀 있었다. 서아가 그 시선을 따라갔다. 맞은편 도로. 가로수 아래. 검은 세단이 한 대 서 있었다.
서아의 등이 굳었다. 같은 차종이었다. 제네시스 G80. 같은 색. 하지만 번호판이 달랐다. 끝 네 자리 3314. 집 앞의 7782가 아니었다. 다른 차였다.
"저 차."
윤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아져 있었다. 평소 볼륨의 반이었다.
"아까부터 세 번째야. 지켜주는 거면 티를 덜 내든가."
서아가 윤호를 봤다. 윤호는 도로를 보고 있었다. 눈이 좁아져 있었다. 장난도, 투박함도 빠진 얼굴. 턱선이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서아는 그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중학교 때, 골목에서 서아를 따라오던 취객을 윤호가 막아섰을 때. 같은 눈이었다. 위험을 읽은 눈. 감정보다 판단이 먼저 반응한 눈.
"세 번째?"
"네 집 앞에 한 대. 여기 오는 길 사거리에 한 대. 그리고 저거."
서아는 사거리의 차를 보지 못했다. 윤호는 봤다. 서아가 놓친 것을 윤호가 세고 있었다.
"언제부터 봤어?"
"네 집 앞에서. 이모네 가려고 골목 들어서는데 차가 이상했어. 주차인데 시동이 안 꺼져 있었거든. 사거리에서도 같은 차종이 있길래 혹시 해서 봤더니 사람이 타고 있었어. 운전석이랑 조수석."
윤호가 서아를 봤다. 시선이 직선이었다. 돌려 말하지 않는 눈.
"서아야. 뭐야 이거."
서아는 대답을 골랐다.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계약의 존재 자체가 7조에 걸렸다. 위반 시 전체 무효에 채무 원상복구. 입을 여는 순간 23억이 다시 목을 죄는 것이다. 하지만 윤호는 이미 차를 세 대나 세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믿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 일 때문에 좀 복잡해."
"그건 알아. 복잡한 거랑 차 세 대가 따라붙는 건 다른 문제야."
서아는 입을 다물었다. 윤호가 맞았다. 복잡함과 감시는 다른 무게였다.
맞은편 세단의 운전석 창이 2센티미터쯤 열려 있었다. 담배 연기가 빗속으로 스며 나왔다. 얇은 줄기가 빗방울에 부딪혀 흩어졌다. 서아는 12층을 떠올렸다. 오민재 쪽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검은 양복들은 전부 무취였다. 냄새로 존재를 드러내는 건 그쪽 방식이 아니었다. 이 차는 달랐다. 다른 쪽이었다.
서아의 머릿속에서 두 개의 선이 동시에 그려졌다. 오민재가 보낸 감시 인력.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 AP구파라고 했던가. 채권 조각을 유통하는 쪽. 서아를 둘러싼 시선이 한쪽이 아니었다. 두 세력이 같은 사람을 보고 있었다. 서아는 편의점 처마 밑에 서서 그 교차점 위에 있었다.
"윤호야."
"응."
"고마운데,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자."
윤호의 턱이 굳었다. 입이 열릴 뻔했다가 닫혔다. 3초. 윤호가 코로 숨을 내쉬었다. 빗소리 사이로 그 숨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근데 하나만."
윤호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비닐 지퍼백이었다. 안에 종이가 접혀 있었다. 빗물이 닿지 않도록 지퍼를 꼭 닫아둔 상태였다.
"네 아버지 짐 정리할 때 나온 거야. 이모가 버리려다 내가 챙겼어."
서아가 지퍼백을 받았다. 무게가 거의 없었다. 종이 한 장. 서아는 지퍼백을 열지 않고 비닐봉지 안에 넣었다. 비가 묻으면 안 됐다.
"뭔데?"
"나도 몰라. 숫자 같은 거 적혀 있던데."
윤호가 우산을 집었다. 펼쳤다. 서아 쪽으로 내밀었다.
"가져가."
"넌?"
"뛰면 돼."
서아는 우산을 받지 않았다. 윤호가 우산을 서아의 비닐봉지 위에 올려놓았다. 거절을 기다리지 않았다. 놓고 돌아섰다. 한 발자국이 물웅덩이를 밟았다.
"연락해. 안 하면 찾아간다."
윤호가 비를 맞으며 걸었다. 뛰지 않았다. 서아가 보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등을 곧게 펴고 걸었다. 후드가 젖어서 머리카락이 목 뒤에 붙어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서아는 윤호가 사라진 뒤에도 5초를 더 서 있었다. 맞은편 세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운전석 창의 담배 연기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나왔다. 윤호를 봤을 것이다. 윤호의 얼굴을, 키를, 걸어간 방향을. 서아의 목 뒤가 서늘해졌다. 한서진이 12층에서 윤호의 이름을 불렀다. 이 차의 사람도 이미 알고 있었다.
비닐우산을 폈다. 빗소리가 우산 위에서 갈라졌다. 서아는 집 쪽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감시 차량의 반응을 확인하고 싶었다. 걸으면서 시야 끝으로 세단을 봤다.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따라오지 않았다. 이동 감시가 아니라 정점 감시였다. 집 근처에 고정된 유형. 서아는 그 차이를 머릿속에 기록했다.
두 블록을 돌아 카페에 들어갔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비닐봉지에서 지퍼백을 꺼냈다. 손가락이 젖어 있어서 종이를 만지기 전에 냅킨으로 닦았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원본 서류를 다룰 때 배운 습관이었다. 젖은 손은 잉크를 번지게 한다.
종이를 펼쳤다. A5 크기의 메모지였다. 모서리가 누렇게 변해 있었다. 오래된 종이. 아버지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서아는 그 글씨를 수백 번 봤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채무 서류에 적힌 아버지의 서명을 대조했을 때, 획의 기울기와 끝 처리까지 외웠다. 이건 그 글씨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 세 줄.
KC-0317-A KC-0422-B KC-0917-C
서아의 눈이 첫 번째 줄에 머물렀다. KC. 알파벳 두 글자. 뒤에 하이픈, 네 자리 숫자, 다시 하이픈, 알파벳 한 글자. 서류 번호 체계였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채권 양도 서류를 다루면서 이런 구조를 본 적이 있었다. 분류 코드 + 일련번호 + 등급. 채권 조각마다 고유 번호가 있다면, 이건 그 번호의 일부일 수 있었다.
KC. 서아는 그 두 글자를 입 안에서 굴렸다. 어디서 본 적이 있었다. 서류 더미 어딘가에서 이 두 글자를 지나친 기억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기억하고 있었다.
삼각김밥을 뜯었다. 한 입 먹었다. 씹으면서 메모지의 세 줄을 다시 봤다. 숫자 네 자리. 0317, 0422, 0917. 날짜일 수 있었다. 3월 17일, 4월 22일, 9월 17일. 단순한 일련번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네 자리를 두 개씩 쪼개면 전부 달력 위에 놓을 수 있는 숫자였다.
전화기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메모지 전체를 한 장, 각 줄을 확대해서 세 장. 사진을 클라우드에 올렸다. 원본은 지퍼백에 넣어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원본을 건드리지 않는다. 사본으로 일한다. 3화에서 한서진 앞에 사본을 가져간 이유와 같았다.
은솔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이거 봐줘.' 사진 네 장을 첨부했다. 보내고 나서 시계를 봤다. 오후 일곱 시 사십분. 3일 유예의 첫날이 저물고 있었다.
삼각김밥 두 번째를 꺼내 먹었다. 카페 창 너머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빗줄기를 노랗게 물들였다. 서아는 커피를 시키지 않았다. 지갑 안에 만 원이 두 장 남아 있었다. 카페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사치였다.
메모지의 첫 번째 줄이 눈앞에 남아 있었다. KC-0317-A.
전화기가 울렸다. 은솔이었다.
"야, 미안. 폰이 꺼져 있었어."
"괜찮아. 사진 봤어?"
"방금 봤어. 이거 어디서 났어?"
"아버지 유품이야. 윤호가 가져다줬어."
전화기 너머로 은솔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짧았지만 날카로운 호흡이었다. 무언가를 알아본 사람의 숨소리.
"서아야. KC가 뭔지 알아?"
"아직 확인 못 했어."
"계약건. 한성회에서 채권 양도할 때 쓰는 내부 분류 코드야. 사무실에서 한 번 본 적 있어."
서아의 손가락이 삼각김밥 위에서 멈췄다. 채권 양도 분류 코드. 아버지가 그 코드를 메모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채권의 내부 구조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명의만 빌려준 사람이 내부 코드를 알 리 없었다. 단순한 방패막이가 아니었다.
"뒤에 숫자는?"
"거기까지는 모르겠어. 근데 서아야, 이거 한성회 내부 양식이야. 외부에서 볼 수 있는 문서가 아니거든."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 너머로 빗줄기가 가로등을 흐렸다. 아버지가 한성회 내부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도망간 채무자가 아니라, 안에 있던 사람이었을 수 있었다. 서아가 알고 있던 아버지와, 이 메모지가 보여주는 아버지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 수정안 작업도 같이 해야 해."
"알겠어. 시간이랑 장소 보내줘."
전화를 끊었다. 서아는 메모지 사진을 다시 열었다. 첫 번째 줄. KC-0317-A. 0317. 이 숫자가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메모지를 지퍼백에서 다시 꺼냈다. 뒤집었다. 뒷면에 연필로 쓴 글씨가 있었다. 앞면보다 흐렸다. 힘을 빼고 쓴 글씨. 급하게 적은 것처럼 획이 흘러 있었다.
날짜 하나.
2016.03.17
서아의 손이 멈췄다. 2016년 3월 17일. 10년 전이었다. KC-0317의 0317과 같은 숫자. 우연이 아니었다. 날짜가 번호 안에 들어 있었다. 채권 조각의 번호 체계에 날짜가 포함돼 있다면, 이 세 줄은 세 개의 시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2016년 3월. 서아는 그 시간을 되짚었다. 아버지가 아직 회사에 다니던 때였다. 물류회사 재무팀장.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넥타이를 매던 사람. 아직 빚이 터지기 전. 아직 사라지기 전. 서아가 열일곱이던 해.
그 날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아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메모지 뒷면에 적을 만큼. 연필로, 급하게, 힘을 빼고.
뒷면 사진도 찍었다. 클라우드에 올렸다. 메모지를 지퍼백에 넣고 가방을 닫았다. 삼각김밥 포장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왔다. 비닐우산을 폈다. 윤호의 우산이었다. 손잡이에 아직 편의점 태그가 달려 있었다. 2,500원. 서아는 태그를 떼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골목 입구에서 한 번 멈춰 섰다. 아까 있던 검은 세단은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에 오토바이가 한 대 서 있었다. 배달 오토바이처럼 보였지만, 배달 가방이 없었다. 뒷좌석에 헬멧이 하나 걸려 있었다. 번호판이 진흙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서아는 그 오토바이를 지나쳐 걸었다. 집 앞까지 등 뒤의 시선을 느꼈다. 느낌이라고 부르기엔 구체적이었다. 누군가 서아의 걸음 속도를 재고 있는 것 같은 감각.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금장치를 두 번 확인했다. 체인까지 걸었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 가방에서 지퍼백을 꺼냈다. 메모지를 책상 위에 놓았다. 스탠드를 켰다. 불빛 아래서 아버지의 글씨가 더 선명해졌다.
2016.03.17
서아는 그 숫자를 수첩에 옮겨 적었다. 아버지가 남긴 숫자. 아버지가 알고 있었던 날짜. 사라지기 전에 메모지 뒷면에 연필로 적어둔 것.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적은 건지, 자신을 위해 적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수첩을 덮었다. 스탠드를 끄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자고 싶지 않았다. 불빛 아래, 메모지의 연필 글씨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서아는 누워서 천장을 봤다. 윤호의 등이 떠올랐다. 비를 맞으며 뛰지 않고 걸어간 등. 젖은 후드 아래 목 뒤에 붙은 머리카락. 그리고 세단 안의 담배 연기. 빗속으로 스며 나오던 얇은 줄기. 두 개의 이미지가 겹쳤다가 갈라졌다.
내일 은솔을 만나야 했다. 수정안도 써야 했다. 한서진에게 내 조건을 넣겠다고 했다. 3일 중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줄고, 풀어야 할 것은 늘었다.
밖에서 비가 계속 내렸다. 처마를 때리는 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렸다.
2016.03.17.
그 날짜가 눈 뒤에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