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무릎 대신 질문
강남역 4번 출구에서 도보 7분. 건물 외벽에 간판이 없었다. 유리가 검은색이었다. 안이 보이지 않는 종류. 서아는 건물 앞에서 한 번 멈춰 위를 올려다봤다. 18층. 꼭대기 두 개 층의 유리 색이 나머지와 달랐다. 더 진했다.
1층 로비에 안내 데스크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서아가 들어서자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이름을 묻지 않았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12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복도가 조용했다.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는 종류였다. 서아는 운동화를 신고 왔다. 이 바닥에 어울리지 않는 신발이었지만, 뛰어야 할 때 뛸 수 있는 신발이었다.
복도 끝에 문이 하나 있었다. 오민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서류 가방은 없었다. 양손이 앞으로 모아져 있었다. 병원에서 봤을 때와 같은 자세였다.
"오셨습니까."
오민재가 문을 열었다. 서아는 들어가기 전 복도를 한 번 돌아봤다. CCTV가 세 개. 엘리베이터 앞, 복도 중간, 문 위. 전부 서아를 향해 있었다.
방 안은 넓었다. 넓은데 가구가 적었다. 책상 하나, 의자 두 개, 소파 하나, 통유리 창. 서울이 내려다보였다. 오후 햇빛이 유리를 통해 들어왔지만, 방 안의 온도는 서늘했다. 냉방이 아니라 구조가 만드는 서늘함이었다.
한서진이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서류를 보고 있었다. 서아가 들어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서아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밀어놓았다. 봉투가 서류 위로 미끄러져 한서진의 손등 앞에서 멈췄다.
"읽었습니다."
한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서아를 봤다. 서 있는 서아와 앉아 있는 한서진. 시선의 높이가 서아 쪽이 위였다. 서아가 의도한 각도였다.
"앉아."
"서서 할 얘기예요."
한서진의 손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펜을 내려놓았다. 등을 의자에 붙이고 서아를 올려다봤다. 표정은 병원에서와 같았다. 읽히지 않는 얼굴. 하지만 자세가 달랐다. 여기는 이 사람의 영역이었다. 의자 하나 권하는 것도 명령이었고, 거절하는 것도 도전이었다.
"2조부터 말씀드릴게요."
서아가 봉투에서 계약서 사본을 꺼냈다. 은솔에게 보낸 사진을 출력한 것이었다. 원본이 아니라 사본을 가져온 건 의도적이었다. 원본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것.
"계약 기간 2년. 그런데 해지 조건이 6조에 있어요. 당사자 일방의 서면 통보 후 30일. 2년 묶어놓고 30일 통보로 풀 수 있으면, 이건 기간이 아니라 장식이에요."
오민재가 문 옆에 서 있었다. 시선이 서아와 서진 사이를 오갔다. 한서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3조, 거주지 지정. 삼성동이라고 적혀 있는데, 정확한 주소가 없어요. 등기부등본 확인이 안 되는 거주지 조항은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억지로 끌고 가도 불법 감금이에요."
서아의 손가락이 계약서 위를 짚었다. 오른손 검지의 펜 굳은살이 종이 위에 눌렸다. 한서진의 시선이 그 손가락 끝에 머물렀다.
"4조, 외부 접촉 사전 승인제. 민법 제103조 반사회적 법률행위에 해당할 소지가 있어요. 성인의 통신과 이동을 제한하는 사적 계약은 공서양속 위반으로 무효 주장이 가능합니다."
서아가 숨을 한 번 쉬었다. 목이 마르지 않았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수백 건의 서류를 설명하면서 익힌 호흡이었다. 멈추는 타이밍을 알고 있었다. 상대가 반론할 틈을 주는 게 아니라, 다음 말의 무게를 키우는 것.
"5조 위약금 7억. 채무 총액 대비 30%에 해당하는 위약금은 부당이득 반환 청구 대상입니다. 법원에서 감액하면 2억 이하로 내려갈 수 있어요."
한서진이 팔짱을 끼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가 책상 위를 두 번 두드렸다. 리듬은 없었다. 생각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7조."
한서진이 말했다. 서아가 멈췄다. 7조를 아직 꺼내지 않았는데 한서진이 먼저 번호를 불렀다. 서아가 어디를 겨냥하는지 이미 읽은 것이다.
"7조는 마지막에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지금 해."
서아는 계약서를 한 장 넘겼다. 7조 부분을 책상 위에 폈다. 손글씨가 형광등 아래서 또렷했다.
"7조, 비밀 보호. 다른 조항은 전부 법무팀 양식인데 이것만 직접 수정하셨어요. 법무팀에 맡기지 못한 내용이라는 뜻이겠죠."
오민재의 자세가 바뀌었다. 문에 기대고 있던 어깨가 떨어졌다. 서아는 그 변화를 시야 끝으로 잡았다. 오민재가 반응했다는 건, 7조의 손글씨가 누구 것인지 오민재는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계약의 존재 자체를 비밀로 하겠다. 위반 시 전체 무효에 채무 원상복구. 이건 저를 묶는 조항이 아니에요. 이 계약이 알려지면 곤란한 쪽은 제가 아니니까."
한서진이 의자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하지만 앉은 자세의 무게 중심이 앞으로 옮겨졌다. 양손이 책상 위에 놓였다. 방어가 아니라 집중이었다.
서아는 여기서 멈춰야 했다. 법적 분석은 여기까지가 안전선이었다. 하지만 서아의 입이 그 선을 넘었다. 밤새 7조를 보면서 떠오른 질문 하나가 목 안쪽에서 올라왔다.
"저를 사려는 건 이해해요. 빚이 있으니까. 그런데 이건 너무 비싸요. 23억짜리 채무 정리에 혼인 계약이라니. 감정까지 들켰잖아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냉방기 소리가 들렸다. 아까까지는 들리지 않던 소리였다.
한서진의 턱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를 악문 것이 아니었다. 삼킨 것이었다. 말을 삼킨 것인지, 다른 무엇을 삼킨 것인지 서아는 알 수 없었다.
"감정?"
"사업이면 변호사를 보내면 됩니다. 새벽에 직접 오실 이유가 없어요. 계약서에 미리 서명까지 해놓고, 가칭 버전은 회수도 안 하셨어요. 보여주고 싶었던 거잖아요. 두 가지 버전이 있다는 걸."
서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평탄했다. 떨림이 바깥으로 나오지 않도록 호흡을 가슴이 아니라 배로 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채권자를 상대할 때 배운 방법이었다. 상대의 눈을 보되, 시선을 고정하지 않는 것. 서류와 눈을 번갈아 보는 리듬을 유지하는 것.
한서진이 서아를 봤다. 병원 대기실에서 처음 사람을 보는 눈으로 바뀌었을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서아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종류의 시선이었다.
"다 했어?"
"6조 해지 조건의 서면 통보 기간을 30일에서 7일로 바꿔주시면 다 한 거예요."
한서진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멈췄다. 3초. 서아는 세고 있었다. 한서진이 반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재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병원에서는 1초였다. 지금은 3초. 더 오래 걸린다는 건, 더 많이 계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앉아."
두 번째 명령이었다. 서아는 이번에는 앉았다. 서 있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었다. 앉는 것은 양보가 아니라 다음 단계였다.
의자가 낮았다. 앉으니 한서진의 시선이 위에서 내려왔다. 서아는 등을 의자에 붙이지 않았다. 허리를 세웠다. 시선의 높이 차이를 자세로 줄이는 방법. 가방을 무릎 위에 놓았다. 양손이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했다.
"민재."
한서진이 불렀다. 오민재가 문 옆에서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네."
"자정 시한 72시간 연장해. 채권자 여섯 쪽에 통보."
서아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 72시간. 3일이었다. 자정까지 6시간이 채 남지 않은 상태에서 한서진이 시한을 늘렸다. 서아가 요구하기 전에. 서아는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무릎 위의 손가락이 한 번 접혔다 펴졌다.
"3일이면 뭘 하시겠습니까."
오민재가 물었다. 서아가 아니라 한서진에게. 한서진은 오민재를 보지 않았다. 서아를 보고 있었다.
"3일 동안 계약서를 수정할 수 있게 해줘. 내 조건도 넣을 거야."
서아가 말했다. 한서진의 시선 각도가 바뀌었다. 서아의 손에서 얼굴로. 서류를 평가하는 눈이 아니었다. 상대를 측정하는 눈이었다.
"조건을 넣겠다고?"
"계약은 쌍방입니다. 한쪽만 조건을 걸면 그건 명령이에요."
한서진이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처음이었다. 이 방에 들어온 뒤로 한서진은 계속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뒤로 기댄 건 긴장이 풀린 게 아니었다. 거리를 만든 것이었다. 전체를 보려는 자세.
"뭘 넣을 건데."
"아버지 관련 서류 열람권. 채권 조각의 원채권자 정보. 한성회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 관련 기록 전부요."
서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아버지를 말할 때만 그랬다. 서아는 그걸 알지 못했다. 한서진은 알아차렸다.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0.5초. 서아는 그 흔들림을 보지 못했다.
"열람은 돼. 반출은 안 돼."
"사본 제작은요."
"항목별로 승인."
서아는 수첩을 꺼내 적었다. '열람 가능. 반출 불가. 사본 항목별 승인.' 한서진이 수첩을 보고 있었다. 서아가 적는 속도를 보는 것인지, 적는 내용을 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더."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3일 동안 외부 접촉 제한은 적용 안 되는 거죠."
한서진의 눈이 좁아졌다. 미세한 변화였다. 서아가 외부 접촉이라는 단어를 꺼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한 도 내려갔다. 서아는 그 변화를 피부로 느꼈다. 팔뚝에 소름이 돋았지만 소매가 가려주었다.
한서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윤호."
이름이 나왔다. 서아가 꺼내지 않은 이름을 한서진이 먼저 꺼냈다. 서아의 손이 수첩 위에서 멈췄다. 펜촉이 종이 위에 눌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윤호의 이름이 이 방에서 나온다는 건, 한서진이 서아의 바깥 세계까지 들여다봤다는 뜻이었다.
"제 지인이요."
"알아."
짧았다. 그 두 글자 안에 들어 있는 정보의 양을 서아는 가늠할 수 없었다. 알고 있다는 건 조사했다는 뜻이었다. 윤호의 이름, 주소, 서아와의 관계까지. 서아의 목 뒤가 서늘해졌다.
"3일은 줄게. 검토하고, 조건 넣고, 수정안 가져와."
한서진이 일어섰다. 키가 컸다. 서아가 앉아 있으니 그 차이가 더 선명했다. 한서진이 책상을 돌아 서아 쪽으로 걸어왔다. 거리가 두 걸음까지 좁혀졌다. 서아는 일어서지 않았다.
한서진이 멈춰 섰다. 내려다봤다. 서아가 올려다봤다. 시선이 교차했다. 둘 사이 거리는 두 걸음. 서아의 무릎과 한서진의 구두 끝 사이에 카펫 문양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한서진이 웃었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엔 작았다. 입꼬리의 한쪽이 올라간 것. 눈은 웃지 않았다. 하지만 병원에서, 그리고 이 방에서 30분 동안 돌처럼 굳어 있던 얼굴이 처음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좋아. 3일. 대신 그 3일 동안, 넌 내 허락 없이 아무 데도 못 가."
서아는 일어섰다. 수첩을 가방에 넣었다. 계약서 사본은 책상 위에 두고 갔다.
"허락을 구하진 않을 거예요. 다만 어디 가는지는 알려드리죠.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서아가 문 쪽으로 걸었다. 오민재가 문을 열었다. 서아가 나가기 직전, 등 뒤에서 한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정이라고 했지."
서아가 멈추지 않았다. 복도로 나갔다. 카펫 위를 운동화가 밟았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심장 소리는 귀 안쪽에서 울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손을 봤다.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네 개 찍혀 있었다. 주먹을 쥐고 있었다는 걸 그때 알았다.
1층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바깥 공기가 따뜻했다. 봄이었다. 건물 안에서는 계절을 잊고 있었다. 서아는 건물을 등지고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 배기가스와 꽃가루가 섞인 공기. 서늘한 12층보다 이쪽이 나았다.
운동화 끈을 한 번 고쳐 묶고 걸었다. 3일이라는 시간이 생겼다. 하지만 3일 동안 한서진의 시야 안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화기를 꺼냈다. 윤호의 이름 위에 손가락이 멈췄다. 한서진이 윤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전화를 거는 것 자체가 윤호를 끌어들이는 것일 수 있었다.
서아는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대신 은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3일 유예 받았어. 수정안 작업 도와줘. 만나서 얘기하자.'
강남역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사람이 많았다. 서아는 그 사이에 서서 숨을 쉬었다. 이 사람들 중 아무도 서아가 방금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른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서아가 나간 뒤, 한서진은 책상 위에 남은 계약서 사본을 집었다. 서아가 접은 자국이 있었다. 7조 옆에 연필로 가느다란 선이 그어져 있었다. 한서진은 그 선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민재."
"네."
"수정안 가져오면, 내가 먼저 봐."
오민재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한서진은 사본을 서랍에 넣지 않았다. 책상 위, 서아가 앉았던 의자 쪽을 향한 자리에 놓아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