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압류 딱지 아래
빨간 딱지가 세 장이었다.
현관문 왼쪽에 두 장, 오른쪽에 한 장. '채권추심 통지'라는 글자가 골목 끝에서도 보였다. 빨간색은 그런 용도로 쓰이는 색이었다. 알리려는 게 아니라 드러내려는 것.
서아가 골목을 돌아섰을 때, 누군가 그중 한 장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있었다. 등이 넓었다. 겨울도 아닌데 점퍼를 걸친 뒷모습. 서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거 떼면 안 돼. 공무집행방해야."
차윤호가 돌아봤다. 손에 딱지 한 장이 반쯤 찢긴 채 들려 있었다. 얼굴에 잠이 덜 깬 자국이 있었다. 눈이 부어 있었다. 새벽부터 여기 있었다는 뜻이었다. 점퍼 주머니에서 편의점 영수증이 삐져나와 있었다.
"공무집행이면 최소 공무원이 와서 붙여야 하는 거 아냐. 이거 채권업체가 겁주려고 붙인 거잖아."
윤호의 말이 맞았다. 법원 집행관이 아닌 사설 추심업체 딱지는 법적 효력이 없었다. 효력이 없어도 효과는 있었다. 이웃이 보고, 소문이 돌고, 사람의 얼굴이 바뀌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새벽 다섯 시쯤. 화장실 가려다 창문으로 봤는데 검은 차가 있더라. 차가 가고 나니까 이거 붙어 있었어."
서아는 가방 끈을 조였다. 새벽 다섯 시. 병원에서 추심 실무자 네 명이 물러난 게 다섯 시 즈음이었다. 병원과 집을 동시에 쳤다. 두 팀이 움직인 것이다.
윤호가 남은 딱지를 떼지 않고 문 앞에 섰다. 서아에게 길을 비켜주는 게 아니라, 딱지와 서아 사이를 막는 자세였다.
"들어가."
서아가 말했다. 윤호가 움직이지 않았다.
"밥 먹었어?"
"윤호야."
"안 먹었으면 라면이라도 끓여. 냉장고에 계란 넣어뒀어."
서아는 열쇠를 꺼냈다. 윤호가 비켜섰다. 문을 여는 동안 윤호의 시선이 골목 입구를 한 번 훑었다. 확인하는 눈이었다. 서아는 그걸 봤지만 모른 척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냄새가 달랐다. 누군가 환기를 시킨 흔적이었다. 거실 창문이 손가락 두 개 폭만큼 열려 있었다. 윤호가 미리 들어왔다 나간 것이다. 싱크대에 컵 하나가 엎어져 있었다. 윤호가 물을 마시고 간 자국.
서아는 신발을 벗고 가방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지퍼를 열었다. 봉투 두 개. 채무 확인서 봉투와 결혼 계약서 봉투. 나란히 놓으니 두께 차이가 선명했다.
윤호가 현관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신발은 벗지 않았다. 문지방에 서서 서아의 손을 봤다.
"그거 뭔데."
"서류야."
"서류가 두 개야. 하나는 아까 내가 본 빨간 딱지 종류고, 나머지 하나는?"
서아는 결혼 계약서 봉투를 식탁 안쪽으로 밀었다. 윤호가 눈치를 챘다. 서아가 숨기는 게 서류의 내용이 아니라, 서류를 보고 있는 자신의 표정이라는 걸.
"나중에 얘기할게."
"나중이 있으면 좋겠다."
윤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걱정하는 사람이 쓰는 톤이었다. 서아는 식탁 의자를 당겨 앉았다. 윤호를 보지 않았다. 보면 대답하게 될 것이었다.
"동네에 얘기 돌아?"
서아가 물었다. 윤호가 신발을 벗었다.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부엌으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었다. 컵에 물을 받아 식탁 위에 놓았다.
"201호 아줌마가 어제 저녁에 물어봤어. 서아 아버지 사업 접었냐고."
서아는 물컵을 잡았다. 잡기만 했다. 마시지 않았다.
"뭐라고 했어."
"모른다고 했지. 근데 아줌마 눈이 이미 아는 눈이었어."
서아의 손가락이 물컵 위에서 미끄러졌다. 물이 출렁였다. 201호는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김장을 함께 하던 집이었다. 그 집 아줌마가 아는 눈으로 봤다는 건, 이 동네 전체가 안다는 뜻이었다.
서아는 물컵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땀인지 물인지 구분하지 않았다.
"창피한 건 네가 아니고, 이 동네 입이야."
윤호가 말했다. 서아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웠다. 목 안쪽까지 차가운 게 내려갔다. 대답 대신 물을 마시는 건 서아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윤호도 알고 있어서 더 묻지 않았다.
"고마워."
"고맙긴. 딱지 하나 떼다 말았는데."
윤호가 웃지 않았다. 입만 움직이고 눈은 서아의 손을 보고 있었다. 오른손 검지에 오래된 펜 굳은살이 있었고, 그 옆에 종이에 베인 자국이 새로 생겨 있었다. 윤호는 그것까지 봤을 것이다. 말하지 않았을 뿐.
"나 좀 혼자 있을게. 전화할 데가 있어."
윤호가 현관으로 갔다. 신발을 신으면서 한 번 더 돌아봤다.
"문 잠가."
문이 닫혔다. 서아는 3초를 세고 자물쇠를 돌렸다. 윤호의 발소리가 계단을 내려가는 게 들렸다. 한 층, 두 층.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서아는 문 앞에 서 있었다. 5초. 숨을 내쉬었다. 길게. 윤호 앞에서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그때 알았다. 편한 사람 앞이라서 더 그랬다.
식탁으로 돌아왔다. 결혼 계약서 봉투를 열었다. 종이 한 장짜리 최종본을 식탁 위에 펼치고, 옆에 채무 확인서 열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수첩과 펜을 꺼냈다.
전화기를 들었다. 최은솔의 번호를 눌렀다. 두 번 울리고 받았다.
"서아야, 이 시간에 전화하면 안 좋은 일이지."
"은솔아, 혼인 계약서 한 장 보내줄 테니까 봐줘. 지금 급해."
"혼인 계약서? 너 결혼해?"
"아버지 빚 건이야. 채권자 쪽에서 계약을 들이밀었어."
최은솔이 2초 침묵했다. 최은솔에게 2초는 길었다. 보통 0.5초 만에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사진 찍어서 보내. 조항 전부. 서명란이랑 인감도."
서아는 계약서를 한 장씩 사진 찍어 보냈다. 최종본 한 장, 그리고 대기실에서 본 가칭 버전 세 장까지. 가칭 버전은 가방 안에 남아 있었다. 한서진이 회수하지 않았다. 실수가 아니었다. 저 정도 사람이 서류를 실수로 남기지 않았다.
사진을 보내는 동안 서아의 눈이 계약서 위를 다시 훑었다. 첫 번째 읽기는 금액과 기간이었다. 두 번째는 조항의 구조였다.
1조부터 6조까지는 법무팀 표준 양식이었다. 사적 계약에 구속력을 최대한 얹은 형태. 4조의 '사전 승인제'가 눈에 걸렸다. 외출, 통신, 면회 전부 상대 허락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구금에 가까웠다.
문제는 7조였다.
'제7조. 비밀 보호.' 인쇄체가 아니었다. 인쇄된 문구가 지워지고, 그 위에 검은 펜으로 새 문장이 적혀 있었다.
'본 계약의 존재, 내용, 당사자 간 접촉 사실 일체를 제3자에게 공개할 수 없다. 위반 시 계약 전체가 즉시 무효 처리되며, 채무 원상복구 및 위약금이 동시 발생한다.'
서아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손글씨의 필압이 고르지 않았다. 처음 두 글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뒤로 갈수록 글씨가 작아졌다. 급하게 쓴 게 아니었다. 여러 번 고쳐 쓴 흔적이었다.
전화기에서 최은솔의 목소리가 나왔다.
"서아야, 이거 민법상 혼인 계약이 아니야. 채무조정 합의서에 동거 의무를 껴넣은 거야. 혼인신고 의무가 빠져 있어."
"알아. 결혼이 아니라 구속이야. 법적으로 빠져나갈 틈 있어?"
"5조 위약금 7억은 과도해서 감액 청구 가능해. 근데 시간이 걸려. 최소 6개월."
6개월.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12시간도 안 됐다.
"7조 봤어?"
"봤어. 이상하다. 다른 조항은 전부 법무팀이 작성한 양식인데, 7조만 직접 수정했어. 비밀 유지를 이렇게 강하게 거는 건 상대가 숨기는 게 있다는 뜻이야."
서아는 수첩에 적었다. '7조 --- 손글씨 수정. 비밀 보호. 위반 시 전체 무효 + 채무 원상복구.' 그 아래 물음표를 하나 찍었다.
비밀 보호가 왜 이렇게 중요한가. 계약의 존재 자체가 알려지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서아에게 불리한 조항이 아니라, 한서진에게 불리한 조항이었다.
"은솔아, 하나만 더. 특별한정승인 신청 기한이 채무 확인일로부터 3개월 맞지?"
"맞아. 근데 그건 상속 채무일 때 얘기야. 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잖아."
"알아. 그냥 확인하는 거야."
통화가 끝났다. 서아는 전화기를 식탁에 내려놓고 계약서 7조를 다시 봤다. 손글씨를 만지지 않았다. 대신 기울여서 빛에 비춰봤다. 잉크 건조 흔적이 균일하지 않았다. 한 번에 쓴 게 아니라 최소 두 번에 나눠 쓴 것이었다.
법무팀 양식 위에 직접 손을 댄다는 건, 법무팀에 맡기지 못하는 내용이라는 뜻이었다. 조직의 서류를 조직 밖에서 고쳤다. 서아는 그 사실을 수첩에 따로 적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서아는 수첩을 덮고 일어섰다.
모니터에 윤호의 얼굴이 찍혀 있었다. 손에 편의점 봉지를 들고 있었다. 서아는 문을 열었다.
"삼각김밥이랑 우유. 안 먹으면 문 앞에 놓고 갈 거야."
윤호가 봉지를 내밀었다. 서아는 받았다. 손이 닿을 뻔했지만 닿지 않았다. 윤호가 먼저 손을 뺐다.
"그 서류, 아까 봉투 얇은 거. 좋은 내용은 아니지."
서아는 봉지를 식탁에 놓으며 대답했다.
"아버지 빚 정리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어. 대신 조건이 붙었어."
"어떤 조건."
서아가 잠깐 멈췄다. 혼인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는 게 처음이었다. 병원에서 계약서를 읽을 때는 활자였다. 지금은 사람에게 말해야 했다.
"계약결혼이야."
윤호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2초. 3초. 그리고 턱이 한 번 움직였다. 이를 악문 것이었다. 주먹이 점퍼 주머니 안에서 쥐어지는 게 천의 주름으로 보였다.
"누가."
"한성회 총괄 사장. 한서진이라는 사람이야."
윤호가 문틀에 기대던 어깨를 세웠다. 한성회라는 이름을 아는 눈이었다. 이 동네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재개발, 건물 매입, 상가 정리. 한성회가 지나간 자리에는 늘 빈 가게와 이사 간 사람들이 남았다.
"그 계약 냄새부터 이상하다. 23억 갚아주겠다고? 그 사람들이 자선사업 하는 거 본 적 있어?"
"없지."
"그럼 안 하면 되잖아."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윤호도 자기가 한 말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안 하면 된다는 말은 23억을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라는 뜻이었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건 둘 다 알고 있었다.
침묵이 3초 넘었다. 윤호가 먼저 시선을 내렸다.
"또 혼자 버티려 하지 마. 그게 제일 짜증 나."
윤호가 돌아섰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무거웠다. 평소보다 한 박자 느렸다. 서아는 문을 닫고 자물쇠를 돌렸다.
식탁으로 돌아왔다. 삼각김밥을 뜯었다. 한 입 베어 물고 씹었다.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삼켰다. 배가 고프다는 걸 잊고 있었다. 윤호는 그걸 알고 온 것이다.
서아는 김밥을 다 먹고 우유를 마셨다. 손을 씻었다. 물기를 닦고 다시 계약서 앞에 앉았다.
7조를 오려내고 싶었다. 1조부터 6조까지는 서아를 구속하는 조항이었다. 7조만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조항이 보호하는 건 서아가 아니었다.
계약의 존재가 알려지면 곤란한 쪽. 서아가 아니라 한서진이었다.
서아는 수첩을 펴고 적었다. '7조를 지렛대로 쓸 수 있는가?' 물음표를 두 개 찍었다.
창밖으로 오후 햇빛이 들었다. 빨간 딱지의 그림자가 커튼 위에 얇게 비쳤다. 서아는 커튼을 치지 않았다. 보고 있어야 했다. 이 집이 어떤 상태인지, 밖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자정까지 8시간. 서아는 전화기를 들어 은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7조 분석 좀 더 해줘. 손글씨 필적 대조 가능 여부도.'
답장이 12초 만에 왔다. '필적 대조는 원본 있어야 해. 근데 7조, 이거 위반하면 계약 자체가 날아가는 구조야. 양날이야.'
양날. 서아는 그 단어 위에 밑줄을 그었다. 한서진이 깨뜨리고 싶지 않은 것과 서아가 무기로 쓸 수 있는 것이 같은 조항 안에 있었다.
서아는 계약서를 봉투에 넣지 않았다. 식탁 위에 펼쳐둔 채 수첩 옆에 놓았다. 오늘 밤 자정 전에 결정해야 했다. 서명하거나, 서명하지 않거나.
하지만 서아가 보고 있는 건 서명란이 아니었다. 7조의 손글씨였다. 그 글씨를 쓴 손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지 생각했다.
떨리는 손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민한 손이었다. 서아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시계를 봤다. 오후 4시 12분. 자정까지 8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서아는 펜을 들고 수첩 마지막 줄에 적었다. '서명 전에 7조를 무기로 만들 것.'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