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파산 통지
채무 총액 23억 7천만 원. 상환 기한 72시간.
서류봉투 겉면에 찍힌 숫자 두 줄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빨간 글씨로 '최종 통지'라고만 적혀 있었다.
새벽 4시 17분. 병원 복도는 형광등 하나가 끊어질 듯 깜빡이고 있었다. 소독약 냄새가 코 안쪽까지 배어 있었다. 윤서아는 아버지의 휴대폰을 왼손에 쥔 채 봉투 입구에 손가락을 넣었다.
종이가 잘리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손끝에 종이날이 스쳤지만 피는 나지 않았다. 그 정도 상처에 반응할 여유가 없었다.
봉투 안에는 A4 용지 열두 장이 들어 있었다. 첫 장은 채무 확인서. 둘째 장부터 열한 번째 장까지, 채권자가 전부 달랐다. 같은 빚이 열 개로 쪼개져 있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3년을 일하면서도 이런 구조는 본 적이 없었다. 한 건의 원채권이 열 조각으로 분리되어, 각기 다른 이름 아래 유통되고 있었다.
채권 조각. 이름은 서아가 붙인 게 아니었다. 열두 번째 장 하단, 괄호 안에 인쇄체로 적혀 있었다. '본 채권은 분할 양도된 조각채권이며, 원채권자의 동의 없이 재양도가 완료된 상태입니다.'
재양도. 아버지 이름으로 만들어진 빚이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는 뜻이었다. 원채권자가 누구인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한 명이 아니었다. 네 명. 발소리의 간격이 일정했다. 훈련된 걸음이었다. 서아는 봉투를 가방 안에 넣고 지퍼를 잠갔다. 휴대폰을 주머니로 옮기는 데 2초. 시선을 들어 올리는 데 1초.
검은 정장 네 벌이 형광등 아래 멈춰 섰다. 맨 앞의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윤태국 씨 보호자 되십니까."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명함에는 법무법인 이름 대신 '한성 자산관리'라는 네 글자가 찍혀 있었다. 서아는 명함을 받지 않았다.
"새벽에 병원까지 오신 건, 급하신 분이 따로 계시다는 뜻이겠죠."
남자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명함을 서아의 가방 위에 올려놓았다.
"윤태국 씨의 미상환 채무 건으로 나왔습니다. 상환 의사가 없으실 경우, 오전 9시부로 법적 절차에 들어갑니다."
서아는 가방 위의 명함을 집었다. 뒤집었다. 뒷면에 손글씨로 숫자가 적혀 있었다. 23억 7천만. 봉투 겉면과 같은 숫자. 그 아래 한 줄. '상환 불가 시 잔여 자산 일괄 처분 및 연대보증인 추심 개시.'
연대보증인. 서아의 이름이었다.
언제 보증을 섰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 서류 더미 사이에 섞여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류는 사람의 성격을 증명하지 않았다.
"보증 서류 사본은 있습니까."
서아가 물었다. 남자는 서류 가방에서 얇은 파일 하나를 꺼냈다. 서아는 첫 페이지를 펼쳤다.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 필체가 아버지 것이었다. 대필이었다.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파일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 아래턱이 단단해지는 걸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로 종이 끝이 흔들렸다. 그것만 잡아두었다.
"이 서명은 제 필체가 아닌데요."
"서명 진위 여부는 저희 소관이 아닙니다. 채무 확인과 상환 안내가 업무입니다."
남자의 말투에는 굴곡이 없었다. 이런 대화를 수백 번 해본 사람의 목소리였다.
"72시간이라고 하셨죠. 법적으로는 내용증명 수령 후 14일이 기본인데, 72시간은 어디서 나온 기한입니까."
남자의 눈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뒤에 선 세 명 중 하나를 힐끗 봤다. 서아는 그 시선의 방향을 기억해뒀다.
"그건 저희가 정한 기한이 아닙니다. 위에서 내려온 겁니다."
위. 서아는 그 단어의 무게를 쟀다. 법무법인이 아니라 자산관리. 추심 실무자가 새벽 4시에 병원까지 올 이유는 법적 절차에 없었다. 누군가 이 사람들을 보낸 것이다.
빚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었다. 빚을 보여주러 온 것이다. 무대를 만들고, 관객석에 서아를 앉힌 것이다.
네 명이 물러난 뒤, 복도에는 서아만 남았다. 등 뒤 벽에 기대앉았다. 바닥이 차가웠다. 봉투를 다시 꺼내 열두 장을 한 장씩 넘겼다.
채권자 이름 열 개를 전부 수첩에 옮겨 적었다. 손이 떨리지 않도록 한 획씩 천천히 썼다. 일곱 번째 채권자의 이름 옆에 괄호가 있었다. '(한성회 자산관리 위탁)'. 나머지 아홉 개에는 없는 표기였다.
서아는 그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6시 30분. 창밖이 희끄무레해졌다.
서아는 수첩을 덮고 일어섰다. 병실 문을 열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어젯밤과 같았다. 심전도 모니터의 숫자만 미세하게 달랐다. 3일째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침대 옆 탁자에 아버지의 지갑이 있었다. 서아는 열지 않았다. 안에 뭐가 남아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가족사진 한 장. 모서리가 접혀 있었다. 카드는 전부 정지 상태였다.
아버지의 손을 봤다. 링거 줄이 꽂힌 손등에 검버섯이 있었다. 중견 물류회사 재무팀장이던 사람의 손이 이렇게 마른 적은 없었다. 서아는 이불 끝을 끌어올려 손까지 덮었다.
채권 조각. 열 조각은 위험 분산이 아니었다. 원채권자를 지우는 구조였다. 서아는 침대 난간을 잡았다가 놓았다. 지문이 남지 않을 만큼 짧게.
병실을 나가기 전, 심전도 모니터의 숫자를 한 번 더 확인했다. 69, 70, 68. 일정한 범위 안에 있었다. 그것만이 이 방에서 유일하게 정상인 것이었다.
복도로 나오자, 아까와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커피가 아니었다. 가죽과 향수. 비싼 냄새였다. 이 병원에 어울리지 않는 종류였다.
엘리베이터 앞에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검은 코트. 어깨선이 반듯했다. 아까 네 명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추심 실무자는 구겨진 양복을 입었다. 이 사람의 옷에는 주름이 없었다.
남자가 돌아섰다. 서아와 눈이 마주쳤다. 서아는 한 발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가방 끈을 왼손으로 옮겼다. 오른손을 비워두는 건 습관이었다.
"윤서아 씨."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 이름이 아니라 서아의 이름을. 남자의 뒤에서 또 한 명이 나타났다. 안경을 쓴 사람이었다.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쪽은 명함부터 내밀었다. '한성회 비서실 오민재.'
"한성회 총괄 사장 한서진입니다. 윤태국 씨 건으로 직접 뵈러 왔습니다."
오민재가 말했다. 앞에 선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서아는 코트 남자의 얼굴을 봤다. 나이는 서아와 비슷하거나 한두 살 위. 표정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표정을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총괄 사장이 새벽에 직접 오시기엔, 23억은 좀 적은 액수 아닙니까."
서아가 말했다. 오민재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한서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앉아서 얘기하자."
한서진이 처음 입을 열었다. 반말이었다.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서진이 복도 끝 대기실을 향해 걸었다. 오민재가 문을 열었다. 서아는 3초를 세고 따라 들어갔다. 끌려가는 건 아니었다. 세는 동안 선택한 것이었다.
대기실은 좁았다. 플라스틱 의자 네 개, 자판기 하나, 창문 없음. 한서진은 의자에 앉았다. 다리를 꼬지 않았다. 등을 붙이지도 않았다. 어디서든 그 공간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었다.
오민재가 서류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아까 추심 실무자가 가져온 봉투와 크기가 같았다. 두께가 달랐다. 이쪽이 더 얇았다.
"아버지 빚은 내가 정리할 수 있어. 23억 전부."
한서진이 말했다. 서아는 봉투를 보지 않았다. 한서진의 눈을 봤다. 형광등 아래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었다.
"대가가 뭡니까."
"봉투를 열어."
서아는 봉투를 집었다. 무게가 거의 없었다. 종이 서너 장. 첫 장을 꺼내자 상단에 제목이 찍혀 있었다. '혼인 계약서(가칭).'
서아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장을 넘겼다. 계약 기간, 거주 조건, 외부 접촉 제한, 위약금 조항. 세 번째 장에 서명란 두 개. 한쪽에는 이미 한서진의 이름이 있었다.
서아는 계약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천천히.
"협박은 많이 들어봤는데, 서류로 하는 건 처음이네요."
한서진의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앉은 자세가 미세하게 앞으로 기울었다.
"협박이 아니야. 제안이지."
"제안은 거절할 수 있어야 제안입니다. 72시간 안에 23억을 갚든가 결혼을 하든가. 선택지가 아니라 통보예요."
서아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채무 상담을 수백 건 처리하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목소리가 흔들리면 숫자도 흔들린다.
한서진이 서아를 봤다. 처음으로 시선의 질이 달라졌다. 서류를 보는 눈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아버지 빚은 니 잘못이 아니야. 알고 있어. 채권 조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서아의 등이 곧아졌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말이 소독약 냄새보다 날카롭게 들어왔다. 아버지의 빚이 설계된 것이라면, 이 남자는 설계자 쪽이거나 설계도를 가진 사람이었다.
"알고 계시면서 왜 정리해주시겠다는 겁니까."
"내 이유는 내 거야."
짧았다. 서아는 더 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대답할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계약서를 다시 집어 세 번째 장을 폈다. 오른손 검지의 굳은살이 종이 위에서 한 줄씩 내려갔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수천 장을 넘긴 손이었다.
"계약 기간 2년, 거주지 지정, 외부 접촉 사전 승인제. 위약금 7억. 이건 결혼이 아니라 구금이에요."
"조건은 바꿀 수 있어."
"그럼 본질은 안 바뀐다는 거네요."
한서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았다. 양손이 보이는 상태였다. 오민재가 서류 가방을 닫았다. 대기실 문을 열었다.
한서진이 먼저 나갔다. 복도에서 멈춰 서아를 돌아봤다. 형광등 빛이 코트 위로 떨어졌다.
"오늘 자정까지야. 그 전에 채권자 열 명 중 여섯이 동시에 움직여. 압류, 가처분, 채무불이행 통보까지. 그때는 계약서도, 유예도 없어."
서아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돈은 오늘 끊겼고, 체면은 방금 끝났어요. 그럼 이제 남은 건 선택이네요."
한서진의 걸음이 멈췄다. 1초. 다시 걸었다.
오민재가 뒤따르기 전, 탁자 위에 봉투 하나를 더 놓고 갔다. 아까 것보다 더 얇았다.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문을 닫았다.
서아는 봉투를 열었다. 종이 한 장. 결혼 계약서 최종본이었다. 가칭 버전이 아니었다. 인감 날인이 찍혀 있었다. 법적 효력을 갖출 준비가 이미 끝난 서류였다.
서명란을 봤다. 한서진의 서명은 아까와 같았다. 그 옆, 빈칸 위에 서아의 이름이 인쇄체로 찍혀 있었다.
오늘 만들어진 서류가 아니었다. 인쇄 상태, 종이의 질감, 인감의 건조도. 최소 며칠 전에 준비된 것이었다. 추심 실무자가 새벽에 오고, 한서진이 직후에 나타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무대. 순서. 타이밍. 전부 짜여 있었다. 서아는 그 사실을 알았다. 상대도 서아가 알기를 원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서아는 계약서를 봉투에 넣고,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지퍼를 잠그는 손이 정확했다.
병실 쪽에서 모니터 소리가 고르게 울렸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서아는 복도 끝 창문으로 걸어갔다. 해가 올라오고 있었다. 서울은 밝아지고 있었지만, 이 복도에는 아직 새벽이었다. 자정까지 16시간.
수첩을 다시 꺼내 채권자 목록 옆에 한 줄을 적었다. '한서진 --- 사전 서명 완료. 추심 직후 등장. 채권 구조 파악 중.' 밑줄을 그었다.
이 남자가 빚을 만든 쪽인지, 빚을 산 쪽인지는 아직 몰랐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연히 온 게 아니었다. 퍼즐이 맞춰지려면 조각이 더 필요했다.
수첩을 덮었다. 펜을 주머니에 넣었다. 창밖으로 검은 세단 한 대가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서아는 번호판 끝 네 자리를 외웠다.
돌아서서 병실 앞을 지나갔다. 문틈으로 모니터의 초록 불빛이 새어 나왔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주저앉을 것이고, 주저앉으면 다시 일어서는 데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한서진은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오민재가 지하 주차장을 눌렀다.
"서명하겠습니까."
오민재가 물었다. 한서진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검은 가죽 표지.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첫 페이지를 열지 않았다. 표지를 한 번 쓸고 주머니에 넣었다.
"해."
엘리베이터 숫자가 내려갔다. 한서진의 손가락이 주머니 안에서 수첩 표지를 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