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오늘은 오지 마
4월 27일 월요일, 오후 1시 52분.
중간고사 첫날이 끝났다.
오전에 국어와 수학을 봤다. 국어는 무난했다. 비문학 지문이 길었지만 구조를 먼저 잡으니까 풀렸다.
수학은 마지막 서술형이 걸렸지만 나머지는 괜찮았다. 이차함수 후반 부분이 나왔는데, 편의점에서 같이 풀었던 문제와 비슷한 유형이었다.
'여기가 편하다.'
강수현이 풀이 순서를 알려줬던 부분이 그대로 나왔다. 대입 순서. x를 먼저 빼고 y를 넣는 것.
오전 과목이 끝났다는 해방감이 교실을 채웠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따뜻했다. 4월 끝자락의 바람이었다. 교정의 나무에 초록 잎이 무성해지고 있었다.
"야, 수학 마지막 뭐 나왔어?"
"이차함수 활용이었는데 난이도가."
"나 찍었어."
"나도 반은 찍었어."
"반이면 그래도 낫지. 나는 전부 찍었거든."
"수학 전부 찍으면 어떡해."
"어쩔 수 없잖아. 수학이 나를 버렸어."
웃음이 교실 여기저기서 터졌다. 시험이 끝난 직후의 소음이었다. 책을 집어넣는 소리, 가방 지퍼 소리, 여기저기서 답 맞추는 소리.
박지훈이 윤시하한테 왔다.
"수학 어땠어?"
"마지막 빼고 괜찮았어."
"마지막 그거 아무도 못 풀었어."
"너는?"
"국어가 망했어. 비문학 지문이 뭐야 그게."
"공부 안 했으니까."
"팩트 폭력하지 마."
"사실이잖아."
"사실이어도 좀."
종례가 짧게 끝났다. "시험 잘 봤고, 내일도 화이팅."
교문으로 쏟아져 나왔다.
4월 마지막 주의 오후였다. 햇살이 교문 바닥에 깔려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벚꽃 시기는 지났지만 가로수 잎이 연두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시험 해방감과 4월의 공기가 섞여서 교문 밖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흩어졌다.
'집중해야 하는데.'
교문을 나오면서 걷는데.
"시하야."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김하늘이었다. 걸어오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학원 가방이 아닌 학교 가방만 들고 있었다. 시험 날이라 학원이 쉬는 것 같았다. 교복 카라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나란히 걸었다. 교문 밖 보도블럭 위에서. 아이들이 주변을 지나갔다.
"수학 어땠어?"
"마지막 서술형이 좀."
"나도. 그것만 빼면 괜찮았는데."
"국어는?"
"국어는 잘 봤어. 비문학이 좀 길었지만."
"비문학 진짜 어려웠어."
"그래? 나는 괜찮았는데." 김하늘이 웃었다. "비문학은 패턴이 있거든. 구조를 먼저 잡으면 돼."
"다음에 가르쳐 줘."
"약속했잖아. 카페에서."
걷다가 김하늘의 손이 왔다.
윤시하의 손을 잡았다.
"수고했어."
1초. 잡았다가 놓았다.
짧았다. 그런데 분명했다. 교문 앞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에서.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손바닥에 온도가 남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1초였는데 온도가 남아 있었다. 손가락이 스친 감촉이 손등까지 올라왔다.
김하늘이 앞을 보면서 걸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런데 귀가 조금 붉었다. 김하늘의 귀가 붉은 건 처음 봤다. 항상 완벽한 사람의 유일한 틈.
'왜 이러는 걸까.'
"왜 그래."
"왜 그러긴. 수고했으니까."
"손잡는 건 좀."
"좀 뭐." 김하늘이 앞을 보면서 웃었다. "싫었어?"
대답하지 않았다. 싫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싫다고 말할 수 없는 게 문제였다.
그때 시선이 느껴졌다.
교문 쪽을 봤다.
강수현이 교문을 나오고 있었다. 교복 그대로. 가방을 한쪽에 걸고. 교문 기둥 옆을 지나면서 이쪽을 봤다.
'저 사람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것을 봤다.
강수현의 걸음이 느려졌다. 한 발. 반 발. 멈추지는 않았지만 속도가 바뀌었다. 가방끈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입이 아주 조금 열렸다가 닫혔다.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손에서 뭔가가 빠져나간 것 같은. 눈이 넓어졌다가 좁아졌다. 그 안에 뭔가가 흔들리다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돌아왔다. 무표정이 제자리로 왔다. 가면이 아닌 무표정. 진짜 아무것도 없는 얼굴이 아니라 전부 넣어두는 얼굴. 강수현이 교문을 지나 언덕 방향으로 걸어갔다. 평소보다 걸음이 빨랐다. 교복 뒤가 작아졌다.
'저 사람은.'
윤시하가 그 순간을 포착했다. 지금까지 본 어떤 표정과도 달랐다.
김하늘이 옆에서 말했다.
"오늘 좋은 날이다."
"응."
"언덕 같이 내려갈까?"
"나 잠깐 편의점 들를 건데."
"그래. 나 먼저 간다." 김하늘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내일 봐."
"내일 봐."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달빛 편의점이 보였다. 간판에 오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메시지였다. 강수현에게서.
'오늘은 오지 마.'
멈췄다.
언덕 중간쯤이었다. 편의점까지 30미터도 안 남은 곳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교복 넥타이가 흔들렸다.
메시지를 다시 봤다. 다섯 글자. 오늘은 오지 마.
처음 있는 거절이었다. 강수현은 '와도 돼'라고 말한 적은 있었다. '올 거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맘대로 해'라고 한 적도 있었다. 오지 말라고 한 적은 없었다.
'저 사람은.'
편의점 간판이 보였다. 불이 켜져 있었다. 유리문 너머로 냉장고 불빛이 보였다. 안에 강수현이 있을 터였다. 편의점 조끼를 걸치고, 카운터 뒤에 서서.
문 앞까지 걸어갔다. 손잡이에 손을 올리려다가 멈췄다.
열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이 문을 열 수 없는 날이었다. 냉장고 소리가 유리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렸다. 안이 보였다. 밝은 형광등, 선반 위의 과자들, 카운터 위 계산기.
'저 사람은.'
핸드폰을 다시 봤다. '오늘은 오지 마.'
오늘은, 이라고 했다. 내일은 괜찮다는 뜻일까. 아니면 다시 오지 말라는 뜻일까. 오늘만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일까. 아까 본 것 때문인지.
모르겠었다.
모르겠는데 숨이 짧아졌다. 아까 강수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방끈을 잡은 손. 느려진 걸음.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의 얼굴.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던 것. 넓어졌다 좁아진 눈.
'저 사람은.'
편의점 간판 불빛이 얼굴에 닿았다. 유리문에 자기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교복을 입은 자기 모습.
돌아섰다. 문을 열지 못한 채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학원가 골목에서 치킨 냄새가 올라왔다. 시험 끝난 아이들이 몰려가는 것 같았다. 웃음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4월의 저녁 바람이 불었다.
집 골목에 들어서면서 핸드폰을 한 번 더 봤다. '오늘은 오지 마.'
'집중해야 하는데.'
오늘은.
그 '오늘은'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채로 집 현관을 열었다.
신발을 벗으면서 잠깐 멈췄다.
아까 김하늘이 잡았던 손.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짧았는데 감촉이 손에 남아 있었다.
'왜 이러는 걸까.'
그리고 강수현의 메시지. 다섯 글자.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그냥 닫힌 문 같은 다섯 글자.
둘 다, 같은 날.
하나는 열었고 하나는 닫았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이 보였다. 하얀 천장에 저녁 빛이 들어와 있었다. 주황빛이 천천히 어두워지는 중. 방 안이 조용했다.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렸다. 째깍. 째깍. 시간이 가고 있었다.
'저 사람은.'
내일 학교에서 강수현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모르겠었다.
내일이면 시험 이틀째였다.
내일이면 5월.
오늘 열리지 않은 문이 내일은 열릴까.
'저 사람은.'
그게 오늘 남은 마지막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