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시험 1주일 전
4월 22일 수요일, 오전 8시 40분.
칠판 옆에 중간고사 일정표가 붙어 있었다. 4월 27일 월요일 시작.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5일간.
빨간 글씨로 쓴 날짜 옆에 과목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빨간 글씨가 유난히 진했다. 담임이 직접 쓴 글씨였다.
교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생각이 많아진다.'
책상 위에 교과서와 프린트물이 쌓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책상 위에는 포스트잇이 교과서 옆에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쉬는 시간에 떠드는 목소리가 줄었다.
교과서를 펴거나 핸드폰으로 강의를 보는 아이들이 늘었다. 삼각관계 소문이 잠시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시험 스트레스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번 주 교실의 공기는 소문이 아니라 시험이 지배하고 있었다.
"야, 수학 범위 어디까지야?"
"이차함수 끝까지."
"끝까지? 진짜?"
"선생님이 어제 말했잖아."
"나 아직 중반까지밖에 안 했는데."
"그건 네 문제지."
"냉정하다."
"냉정한 게 아니라 사실이야."
교실 여기저기서 시험 관련 대화가 오갔다. 프린트물이 돌고, 필기 사진이 단톡방에 올라왔다. 시험 일주일 전 특유의 긴장과 초조함이 교실에 깔렸다.
쉬는 시간.
김하늘이 교과서를 들고 윤시하 자리로 왔다.
"이 부분 같이 보자. 어차피 나도 해야 하니까."
자연스럽게 옆에 앉았다. 교과서를 펴면서 형광펜으로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분홍색. 김하늘의 시그니처 색이었다.
"여기 출제 확률 높아. 선생님이 두 번 강조했으니까."
"고마워."
"이 공식 외웠어?"
"반쯤."
"반쯤이면 위험해. 시험에서 반쯤은 0점이야."
"무섭게 말하네."
"사실이니까." 김하늘이 웃으면서 말했다. 학교에서의 밝은 미소였다. 카페에서 본 얼굴과 달랐다. 학교에서는 다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가면이 매끄럽고 완벽했다.
"여기 보면 패턴이 있어. 이렇게 묶으면 외우기 쉬워."
"진짜네."
"내가 정리해 둔 거야. 나중에 사진 찍어가."
"고마워. 진짜."
"비문학 쪽은?"
"거기가 약해."
"비문학은 구조를 먼저 잡으면 돼. 논지 파악이 핵심이야."
"가르쳐 줘."
"시험 끝나고 카페에서. 약속이야."
"약속이라고 하면 안 지키면 안 되는 건데."
"그래서 약속이라고 하는 거야."
윤시하가 김하늘을 봤다. 밝은 표정이었다.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 뒤에 카페에서 보았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미소가 빠진 얼굴. 피곤한 눈. 엄마 얘기를 했던 목소리. 두 개의 얼굴이 같은 사람 안에 있었다.
김하늘이 밝게 웃었다.
점심시간이 됐다. 급식실에서 박지훈과 밥을 먹었다. 오늘 메뉴는 돈까스였다. 소스가 진하게 뿌려져 있었다. 돈까스를 자르면서 바삭하는 소리가 났다.
소스가 식판 위에 퍼졌다. 밥 위에 돈까스를 올리고 한 입 크게 먹었다. 바삭한 빵가루와 부드러운 고기, 진한 소스가 한꺼번에.
'왜 이러는 걸까.'
"돈까스 맛있다."
"응."
"시험 끝나면 한바탕 하겠다."
"뭐가."
"쌓인 것들이 풀릴 거 아니야."
"공부나 해."
오후 수업이 끝나고 하교 시간. 수요일이었다. 강수현이 학교 끝나고 바로 편의점에 가는 날.
윤시하가 편의점 문을 밀었다. 냉장고 소리가 들어왔다. 익숙한 소리. 강수현이 카운터 안에 있었다. 편의점 조끼를 걸치고 영수증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집었다. 계산대 앞에 섰다.
"공부 안 해?"
강수현이 바코드를 찍으면서 물었다.
"여기가 더 집중돼."
"거짓말."
"반쯤 거짓말."
"반쯤이면 반은 진짜라는 거잖아."
"맞아. 집보다 여기가 편해."
"편한 게 집중이랑 같은 건 아닌데."
"비슷하지 않아?"
"아니."
"왜?"
"편하면 풀어지잖아. 집중은 긴장이 있어야 돼."
"그러면 여기는 편하면서 긴장되는 곳이야."
"뭔 소리야."
"너 있으니까."
강수현의 바코드 찍는 손이 멈칫했다. 삑 소리가 한 박자 늦게 났다. 금액을 부르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빨랐다. 잔돈을 내밀 때 손끝이 닿을 뻔했다.
윤시하가 온수기에서 물을 부었다. 뚜껑을 닫고 창가 자리로 갔다.
라면이 익는 동안 창밖을 봤다. 언덕 위로 교복 차림 학생들이 띄엄띄엄 내려가고 있었다. 학원 방향으로.
시험 일주일 전의 하교 풍경이었다. 평소보다 걸음이 빠르고 고개가 숙여져 있었다. 핸드폰을 보는 게 아니라 생각을 하면서 걷는 걸음이었다.
'저 사람은.'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삼각김밥 포장지를 뜯었다. 참치마요. 뜨거운 국물이 입 안에 퍼졌다. 매콤하고 짭짤한 편의점 라면의 맛이었다.
온수기에서 물을 미리 받아놓는 소리가 났다.
윤시하가 봤다. 강수현이 온수기 옆에 종이컵을 놓고 뜨거운 물을 받아두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다. 다음에 리필할 때 쓰라는 뜻이었다. 말하지 않고 하는 배려였다.
"고마워."
"뭐가."
"물."
"알아서 한 건데."
손님이 두어 명 들어왔다 나갔다. 학원 가방을 멘 중학생이 삼각김밥을 사 갔고, 퇴근하는 아저씨가 맥주 캔을 샀다.
강수현이 바코드를 찍고 잔돈을 주고 인사하는 게 보였다. 기계적이지 않았다. 짧지만 정확한 동작이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편의점 밖이 어두워졌다. 가로등이 하나씩 켜졌다. 학원가 쪽 불빛이 밝아지면서 언덕 위가 더 어둡게 보였다.
편의점 안은 형광등이 밝았다. 윤시하는 교과서를 꺼내서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창가 자리에서. 라면 국물 냄새와 교실 등 불빛 아래에서.
'저 사람은.'
밤 9시가 넘었다. 윤시하가 가게를 나가려고 일어섰을 때, 강수현이 카운터 뒤쪽에서 교과서를 꺼내는 게 보였다.
수학 교과서였다.
카운터 안 좁은 공간에서 교과서를 펴고 공부를 시작했다. 구부정한 등. 형광등 아래 혼자. 형광펜이 없었다. 볼펜 하나로 밑줄을 긋고 있었다. 한 색으로. 김하늘처럼 세 가지 색이 아니라. 볼펜 하나.
"수학 어디까지 했어?"
강수현이 올려다봤다. 나가려던 사람이 다시 서 있으니까. 눈이 살짝 넓어졌다.
"이차함수 후반."
"나도 거기 막혀. 내일 와서 같이 풀까."
"여기서?"
"응. 편의점에서."
"미쳤어?"
"반쯤."
"반쯤 미친 건 미친 거야."
"그래서 같이 풀자. 나 혼자 풀면 막히면 그냥 넘기거든. 같이 하면 물어볼 수 있잖아."
"내가 잘하는 것 같아?"
"잘 모르는데. 같이 막히면 같이 막히는 거지."
강수현이 윤시하를 봤다. 2초.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렸다. 돌아가는 볼펜이 딸깍 소리를 냈다. 한 번. 두 번.
"맘대로 해."
거절이 아니었다.
"가게."
"응."
문을 밀고 나왔다.
편의점 유리창 너머를 봤다. 강수현이 카운터 안에서 교과서를 보고 있었다. 구부정한 등. 천장 조명이 비추는 좁은 공간. 볼펜이 종이 위를 긁는 게 보였다. 볼펜 하나로 수학을 풀고 있었다.
언덕을 내려가면서 연서동 저녁 불빛이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학원가 간판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집 현관을 열면서 신발을 벗었다. 방으로 들어가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교과서를 꺼내서 책상 위에 펼쳤다. 이차함수 후반. 볼펜을 집었다. 한 문제를 풀다가 멈췄다.
'저 사람은.'
편의점에서 강수현이 볼펜 하나로 수학을 풀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구부정한 등. 형광등 아래. 형광펜 없이.
내일은 형광펜을 가져가자.
내일 편의점에서 같이 수학을 풀 수 있다는 것.
그걸로 오늘은 됐다.
'저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