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중학교 때 얘기
4월 21일 화요일, 저녁 7시 34분.
달빛 편의점 안은 라면 냄새로 가득했다.
윤시하가 창가 자리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면을 들어 올리면서 국물이 김을 내뿜었다.
뜨거운 김이 유리창에 닿아서 얇게 물방울이 맺혔다. 냉장고가 윙윙거렸다. 카운터 뒤에 강수현이 서 있었다. 편의점 조끼를 걸치고, 영수증 통을 정리하면서 가끔 창밖을 봤다.
'저 사람은.'
언덕에 사람이 드문 시간이었다. 가로등이 하나 켜져 있었다. 나머지는 아직 어둠 속이었다.
편의점 불빛이 언덕 위에서 가장 밝았다. 카운터 위에 핫도그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소시지 냄새가 라면 냄새와 섞였다. 편의점 특유의 냄새. 여러 가지가 섞여서 하나가 된 냄새.
편의점 루틴이 자리잡은 풍경이었다. 윤시하가 오고, 라면을 먹고, 강수현이 카운터 안에서 일하고, 가끔 대화가 오가거나 오가지 않거나.
말이 없어도 괜찮은 시간. 냉장고 소리가 배경음이고, 라면 냄새가 공기를 채우는, 그런 시간.
'저 사람은.'
"오늘 손님 많았어?"
"보통."
"보통이 몇 명인데."
"세는 거 아니야. 오면 오는 거고 안 오면 마는 거야."
"궁금하잖아."
"궁금할 게 뭐가 있어. 편의점이야."
"편의점도 궁금할 수 있지."
"이상한 애."
"이상하다는 말 많이 듣는다."
"알아. 이상하니까."
강수현이 영수증을 정리하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윤시하를 보지 않고 웃는 거였다. 편의점 조명 아래에서 그 입가가 보였다. 웃는 게 맞았다.
편의점 문이 열렸다. 밖에서 바람이 들어왔다.
낯선 얼굴이었다.
여자애가 들어왔다. 교복은 아니었다. 사복 차림에 숄더백을 메고 있었다. 밝은 표정이었다.
'저 사람은.'
에너지가 있는 타입처럼 보였다. 머리가 짧고 귀걸이가 하나 달려 있었다. 들어오면서 편의점 안을 한 번 훑다가 카운터를 봤다.
"야!"
강수현의 손이 멈췄다. 영수증 통을 잡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눈이 가늘어졌다. 경계하는 쪽이었다. 어깨가 올라갔다. 학교에서 보는 강수현의 자세로 돌아갔다. 방금까지 풀려 있던 어깨가 1초 만에 경직됐다.
"여기서 일해? 듣고 왔어."
"왜 왔어."
"만나러 온 거지. 오랜만이잖아. 1년? 2년?"
"안 만나도 됐는데."
"차갑다. 여전히."
여자애가 웃으면서 음료 코너로 갔다. 냉장고를 열고 음료 하나를 집었다. 포도 주스였다. 냉장고 문이 닫히면서 찬 공기가 빠져나왔다. 계산대 앞에 서면서 윤시하를 봤다.
"남자친구야?"
강수현의 귀가 빨개졌다. 목까지 올라왔다. 조명 탓이 아니라 확실한 붉은 기운이었다.
"아니거든."
"왜 이렇게 빨개져."
"안 빨개졌거든. 계산해."
"부정하는 거 보니까 진짜네."
"아니라니까." 강수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평소에 없는 톤이었다. 편의점에서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 날카로운데 날카로운 줄 모르는 목소리.
여자애가 웃으면서 돈을 냈다. 강수현이 바코드를 찍었다. 삑. 잔돈을 돌려줬다. 동작이 기계적이었다. 빨리 보내고 싶은 것처럼. 잔돈을 카운터 위에 놓는 힘이 세서 동전이 돌았다. 딩그르르.
여자애가 잔돈을 받으면서 강수현을 봤다. 표정이 달라졌다. 밝은 쪽에서 진지한 쪽으로.
"수현아."
강수현이 봤다. 눈이 가늘었다.
"중학교 때 너 완전 달랐는데." 말투가 가벼웠다. 그런데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그때는 웃기도 했잖아. 같이 매점에서 빵 사 먹고, 체육 시간에 몰래 빠져서 옥상에서 놀고. 기억나? 점심시간에 교실에서 노래 틀어놓고."
편의점이 조용해졌다. 냉장고 윙윙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강수현의 행주가 멈췄다. 행주를 잡고 있지 않았다. 카운터 모서리를 잡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하얘질 만큼. 관절이 드러날 정도로.
"그만해."
두 글자. 낮고 또렷했다. 편의점 안에 울렸다. 냉장고 소리를 뚫고 울렸다.
여자애가 분위기를 읽었다. 가벼운 톤이 사라졌다. 잠깐 강수현을 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뭔가 더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참았다.
"알겠어. 미안."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가기 전에 윤시하 옆을 지나쳤다. 잠깐 멈춰서 작게 말했다. 귓속말처럼. 강수현이 들을 수 없는 거리에서.
"걔가 센 척하는 거야. 원래 그런 애 아닌데. 중학교 때 웃는 거 예뻤어."
문이 열리고 닫혔다. 편의점 밖에서 발소리가 멀어졌다.
편의점이 냉장고의 저음로 돌아왔다. 바깥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윤시하는 라면을 내려다봤다. 면이 불어 있었다. 여자애가 들어오고 나가는 사이에 시간이 흘렀다. 국물을 한 숟가락 마셨다. 아까보다 덜 뜨겁고 더 짰다.
강수현이 카운터를 닦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걸레가 카운터 위를 지나가는 소리만 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같은 자리를 닦았다.
'저 사람은.'
네 번째에 행주를 멈추고 개서 접었다. 접은 행주를 카운터 아래에 놓았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떨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해 보였다.
윤시하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 침묵은 달랐다. 뭔가를 건드렸다는 걸 아는데 어디까지 건드려진 건지 모르는 종류였다. 편의점의 평소 침묵이 아니라 무언가가 깨진 뒤의 침묵이었다.
창고 문이 열렸다. 정태식이 나왔다. 두 사람을 봤다. 강수현의 얼굴을 봤다. 아무 말 없이 다시 창고로 들어갔다. 문 닫는 소리도 조용하게 했다. 정태식이 읽는 게 빨랐다.
'저 사람은.'
윤시하가 라면을 다 먹고 일어섰다. 쓰레기를 버리면서 카운터 앞에 섰다.
강수현은 카운터 아래를 정리하고 있었다. 정리할 게 없는 곳을.
"아까 그 애."
강수현의 손이 느려졌다.
"이름이 뭐야?"
"한예린."
"중학교 동기?"
"응."
"자주 만나?"
"안 만나. 오늘 처음이야. 여기 온 거."
"친했어?"
"…친했지."
그 한마디가 무거웠다. 과거형이었다.
더 묻지 않았다. 강수현이 더 말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더 물으면 닫힌다.
"가게. 수고해."
강수현이 봤다. 무표정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표정이 아니었다. 뭔가가 있는데 내보내지 않는 표정. 눈 아래가 조금 달라 보였다. 피곤함인지 다른 것인지. 입이 조금 열렸다가 닫혔다. 뭔가 말하려다 안 한 것.
"응."
"내일 편의점 오는 날이지?"
"수요일이."
"그럼 수요일에."
"맘대로 해."
문을 밀고 나왔다.
4월 저녁 공기가 들어왔다. 편의점 안보다 차가웠다. 언덕 위에서 바람이 불었다. 편의점 간판 불빛이 등 뒤에 있었다.
걸으면서 한예린이 한 말이 돌아왔다.
'걔가 센 척하는 거야. 원래 그런 애 아닌데. 중학교 때 웃는 거 예뻤어.'
강수현의 원래 모습. 그게 어떤 건지 궁금했다. 같이 매점에서 빵 사 먹던 강수현. 체육 시간에 옥상에서 놀던 강수현.
교실에서 노래 틀어놓던 강수현. 웃는 게 예뻤다던 강수현. 지금은 웃지 않는 강수현. 그 사이에 뭐가 있었을까.
물어봐야 할까. 물어보면 강수현이 대답할까.
대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직은.
'저 사람은.'
그런데 '아직은'이라는 말은, 언젠가는 대답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 '언젠가'가 오길 기다리는 건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었다. 다만 궁금한 건 확실했다.
언덕 아래 학원가 불빛이 보였다. 연서동 저녁이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