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카페라떼, 두 잔
4월 17일 금요일, 오후 5시 12분.
청명 학원가 카페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금요일 오후라 학원이 일찍 끝나는 날이었다. 학원 전 시간을 때우려고 들어왔다. 카페 문을 열면서 종이 딸랑 울렸다. 안쪽에서 에어컨 바람이 나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날씨 앱을 봤다. 내일 맑음. 별일 없는 금요일 오후였다.
'바람이 분다.'
카페 안에 재즈 음악이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가 낮게 깔렸다. 중간중간 더블베이스가 들어왔다. 원두 갈리는 냄새가 카운터 쪽에서 올라왔다. 쓴 냄새와 고소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바리스타가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의자에 기대앉아 창밖을 보면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쓰고 차가웠다. 얼음이 잔 안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창밖으로 학원가 골목이 보였다. 간판들이 줄지어 있었다. 영어학원, 수학학원, 논술학원. 아이들이 오가고 있었다. 가방을 메고 걷는 교복 차림들.
카페 문이 열렸다. 종이 딸랑. 올려다봤다.
'바람이 분다.'
김하늘이었다.
학교 가방이 아닌 학원 가방을 들고 있었다. 한 손에 종이가 접혀 있었다. 들어오다가 윤시하를 봤다.
잠깐 멈칫했다가 웃었다. 입이 먼저 웃고 눈이 따라오는 순서였다. 놀란 표정이 웃음으로 바뀌는 전환이 자연스러웠다.
"여기 자주 와?"
"두 번째야."
"나는 세 번째." 김하늘이 카운터 쪽으로 가면서 말했다. "학원 전에 잠깐 쉬려고."
"학원 몇 시야?"
"여섯 시. 아직 시간 있어."
"뭐 학원?"
"영어. 금요일은 영어야."
"영어도 잘하잖아."
"잘하는 거랑 더 잘해야 하는 거랑 다르잖아."
주문하고 음료를 받아서 윤시하 맞은편에 앉았다. 카페라떼였다. 따뜻한 것. 잔을 감싸 쥐면서 창밖을 봤다. 잔 위에 라떼 아트가 있었다.
나뭇잎 모양. 김이 올라왔다. 카페라떼 냄새가 테이블 위에 깔렸다. 우유와 에스프레소가 섞인 부드럽고 쓴 냄새.
윤시하가 김하늘 손에 있는 종이를 봤다. 접혀 있어서 내용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험지 형식 같았다.
가장자리에 빨간 펜 자국이 비쳤다. 접힌 부분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접혀 있었다. 작게 만들어서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처럼.
'왜 이러는 걸까.'
김하늘이 그 시선을 느꼈다.
"이거?" 종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학원 모의고사. 오늘 나왔어."
"어땠어?"
"떨어졌어."
"많이?"
"한 등급."
"한 등급이면 올릴 수 있잖아."
"올릴 수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야." 김하늘이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창밖을 봤다. 말투가 가벼웠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날씨 얘기를 하듯.
그런데 카페라떼를 잡은 손끝이 떨렸다. 아주 미세하게. 잔이 흔들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손가락 끝의 미세한 진동. 잔을 감싸 쥔 양손의 힘이 고르지 않았다. 오른손이 더 세게 잡고 있었다.
"그럼 뭐가 문제야?"
"떨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야."
"시험 하나 못 보면 어때."
"어때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괜찮은 집이니까야."
그 말에 윤시하가 잠깐 멈췄다.
김하늘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멈췄다. 미소가 사라졌다. 굳은 것도 아니고 무너진 것도 아닌, 그냥 빠진 것.
미소라는 옷을 벗은 것처럼. 아래에 있는 얼굴이 보였다. 피곤한 얼굴. 눈 아래에 그림자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보이지 않던 그림자.
"그게 안 되는 집이야, 우리."
목소리가 낮아졌다. 학교에서 쓰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밝고 부드럽고 조율된 목소리가 아니라, 그냥 나오는 목소리. 숨을 좀 쉬고 나서 말하는 목소리.
"엄마가. 성적이 떨어지면." 잠깐 멈췄다. 카페라떼를 내려다봤다. 라떼 아트의 나뭇잎이 흐려지고 있었다. 김이 줄어들면서 나뭇잎 모양이 녹아가고 있었다. "실망하는 게 아니라 걱정을 해. 과하게. 딸이 뒤처지면 어쩌나 하는 식의 걱정. 그 걱정이 더 무거워."
"걱정이 무겁다는 게."
"화를 내면 화를 내는 거로 끝이잖아. 걱정은 끝이 없어. 계속 보고, 계속 확인하고, 계속 물어봐. 오늘 뭐 했어, 학원은 집중했어, 잠은 몇 시에 잤어. 시험 결과 나왔어, 등수 몇이야, 등급 뭐야." 김하늘이 카페라떼를 내려다봤다. "그래서 떨어지면 안 돼. 한 번이라도."
"힘들겠다."
"힘든 건 아니야. 익숙한 거지." 김하늘이 잔을 천천히 돌렸다. 돌아가면서 라떼 아트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냥 갈색 액체가 됐다. "익숙해진 게 더 무서운 거 같기도 하고."
"왜 무서워?"
"안 힘든 줄 아니까. 힘든 건데 안 힘든 줄 알고 사니까. 그게 정상인 줄 알고."
윤시하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페 안에 재즈 음악이 흘렀다. 피아노가 느린 템포로 연주하고 있었다. 바리스타가 잔을 닦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해도 돼."
김하늘이 올려다봤다. 눈이 촉촉했다. 울 것 같은 건 아니었다. 빛이 반사된 건지, 그 아래에 뭔가가 고인 건지. 속눈썹이 떨렸다.
"전에도 그런 말 했잖아." 윤시하가 말했다. "웃는 거 피곤해 보인다고."
"그때 내가 뭐라고 했었지."
"그런 말 하는 사람 처음이라고."
"맞아." 김하늘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미소가 아니었다. 그냥 근육이 움직인 것처럼. 의지가 아닌 반사. "너 앞에서만 그런 말 들어."
"그러면 나한테만 피곤하다고 해."
"그게 되면 좋겠는데." 김하늘이 창밖을 봤다. 학원가 골목에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학원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직은 잘 안 돼. 오래 연습한 거라."
"연습?"
"웃는 거. 괜찮은 척하는 거. 완벽한 척하는 거. 전부 연습이야. 중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부터?"
"응. 성적표 받고 나서부터. 엄마가 울었거든. 내가 떨어졌을 때. 화를 낸 게 아니라 운 거야. 그때부터 떨어지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
잠깐 두 사람 사이가 조용했다. 피아노 소리가 멈췄다가 다시 시작됐다. 새로운 곡이었다. 아까보다 느린 멜로디. 음이 하나씩 떨어지듯 내려왔다.
김하늘이 카페라떼를 마셨다. 천천히. 반쯤 남았을 때 잔을 내려놓으면서 시계를 봤다. 손목시계였다. 작고 은색인.
"학원 가야 해."
"응."
"오늘 고마워."
"뭘."
"그냥. 들어줘서. 이런 얘기 아무한테도 안 하거든."
"아무한테도?"
"아무한테도."
일어서면서 가방을 챙겼다. 학원 모의고사 결과지를 접어서 가방 안에 넣었다. 주름이 생기지 않게 조심스럽게. 시험지를 다루는 손이 섬세했다.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멈췄다. 돌아봤다.
웃음이 아닌 표정이었다. 미소가 사라졌던 그때와 같은 얼굴. 입이 열렸다. 닫혔다. 뭔가를 말하려다 안 한 것처럼. 눈이 잠깐 흔들렸다. 한 발 앞으로 나가려다 멈춘 것 같은.
그리고 걸어 나갔다. 학원 방향으로. 걸음이 빨랐다. 종이 딸랑 울렸다.
'집중해야 하는데.'
윤시하는 테이블을 봤다.
카페라떼 잔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자기 거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이 거의 녹아 있었다. 하나는 김하늘이 두고 간 카페라떼. 반쯤 남아 있었다. 김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밖을 봤다. 김하늘이 학원가 골목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학원 가방이 어깨에서 흔들렸다. 걸음이 빨랐다.
카페 안에 재즈 음악이 계속 흘렀다. 피아노 소리가 낮게. 바리스타가 새 주문을 준비하는 소리가 났다.
'왜 이러는 걸까.'
카페라떼가 식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