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쉬는 시간, 10분
4월 16일 목요일, 오전 10시 31분.
두 번째 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종이 울리자마자 교실이 풀어졌다. 의자 끄는 소리, 핸드폰 꺼내는 소리, 화장실 간다고 나가는 발소리. 윤시하는 교과서를 덮으면서 목을 돌렸다. 뒷목이 뻣뻣했다. 2교시 수학이 50분 동안 칠판만 보게 만들었다.
복도 정수기 앞에 사람이 없었다. 윤시하가 물을 마시러 갔다. 교실 문을 나서면서 복도의 찬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교실 안보다 온도가 2도 정도 낮았다. 복도 창문이 열려 있어서 바깥 바람이 들어오는 중.
'쉬는 시간이 짧다.'
정수기 버튼을 누르면 물이 나오는 소리. 찬물이었다. 한 모금 마시면서 복도 창밖을 봤다. 운동장에 체육 수업을 하는 반이 있었다. 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누군가 휘슬을 부는 소리가 창문 너머로 흐려져서 들려왔다. 아이들이 트랙을 도는 게 보였다. 교복이 아닌 체육복 차림들. 운동장 가장자리 벚나무에 잎이 나 있었다. 연두색이 밝았다.
발소리가 들렸다. 운동화가 복도 바닥을 밟는 소리.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일정한 보폭의 소리.
강수현이 정수기 쪽으로 걸어왔다. 직접 온 게 아니라 원래 정수기를 쓰러 온 거였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 핸드폰도 없었다.
'저 사람은.'
쉬는 시간에 핸드폰 없이 다니는 사람이 드물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게 됐다. 정수기 앞, 복도 구석. 다른 아이들은 교실 안에 있거나 화장실에 간 시간이었다.
윤시하가 물을 마시고 비켜주려는데 강수현이 버튼을 눌렀다.
물이 나왔다. 강수현이 마셨다. 물 넘기는 소리가 짧게 났다.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다. 정수기 물이 턱을 타고 한 방울 떨어졌다.
"야."
강수현이 물을 마시면서 말했다. 정수기를 보면서. 윤시하를 보지 않으면서.
"집에 할머니밖에 없어."
뜬금없었다. 이유도 배경도 없었다. 정수기 물을 마시면서 툭 던지듯 한 말.
그런데 툭 던진 게 아니라 결심하고 내놓은 말인 것 같기도 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물 마시는 소리에 섞여서 나온 말이었다.
윤시하가 봤다. 강수현은 정수기를 보고 있었다. 윤시하를 보지 않았다. 정수기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있었다. 누르지는 않으면서. 손가락이 버튼 가장자리를 더듬고 있었다. 뭔가를 잡으려는 듯한 동작.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왜 할머니밖에 없는지. 부모님은 어디 있는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말이 입까지 올라왔다가 멈췄다. 지금 물으면 강수현이 입을 다물 것 같았다. 방금 연 문을 다시 닫힐 테니까.
'저 사람은.'
"편의점 끝나고 집까지 멀어?"
우회했다. 강수현이 꺼낸 것과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셈이었다.
강수현의 손이 정수기 버튼 위에서 잠깐 멈췄다.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예상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표시. 할머니 얘기를 받아서 할머니를 물어볼 줄 알았는데 편의점을 물어봤다.
"걸어서 15분."
"늦게 끝나면?"
"늦어도 아홉 시 반이야. 정태식 사장이 그 이상은 안 시켜."
"정태식 사장님 괜찮은 분이네."
"괜찮다기보단 규칙적인 사람이야. 아홉 시 반이면 끝내는 거야."
"할머니 걱정 안 해?"
"할머니가 나보다 강해."
"그래도 혼자 기다리시잖아."
"그건." 강수현이 잠깐 멈칫했다. 정수기 버튼을 한 번 눌렀다. 물이 나왔다 멈췄다. "알아."
"밥은 제대로 먹어?"
"왜 그걸 물어."
"궁금하니까."
"할머니가 해놓고 가셔. 출근 전에. 밥솥에 밥이랑 냉장고에 반찬이랑."
"할머니도 일하시는 거야?"
"응. 낮에. 식당에서."
"뭐 하시는 건데?"
"주방 보조. 설거지랑 재료 손질이랑."
"힘들지 않아?"
"내가 뭘 아냐. 안 힘들다고 하시니까."
"할머니들 다 그러시잖아. 안 힘들다고."
강수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인정이었다.
"그럼 저녁에는?"
"저녁에는 집에 계셔.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거네."
"기다린다기보단 그냥 있는 거지." 강수현이 정수기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물이 나왔다. 마시지 않았다. 그냥 흐르는 걸 봤다. 물이 배수구로 빠져나가는 소리가 났다. 졸졸.
"뭐가 달라, 기다리는 거랑 있는 거랑."
"기다리면 걱정하는 거잖아. 있으면 그냥 있는 거고."
"같은 거 아니야?"
"달라."
"어떻게?"
"기다리면 시계를 보잖아. 그냥 있으면 안 봐."
"할머니 시계 봐?"
강수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물이 멈췄다. 정수기가 조용해졌다. 복도에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운동장에서 휘슬 소리가 다시 들렸다. 체육 수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윤시하가 정수기 물을 한 번 더 마셨다. 찬물이 목을 내려갔다.
"할머니한테 뭐라고 불러?"
"할머니."
"이름은?"
"왜 물어."
"궁금하니까."
"박순자." 강수현이 짧게 말했다. "왜."
"그냥. 이름이 궁금했어."
강수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상한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그런데 눈 안에 따뜻한 뭔가가 지나갔다. 아주 짧게.
복도에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강수현이 정수기에서 손을 뗐다. 손을 내리면서 교복 주머니에 넣었다. 학교에서의 자세로 돌아갔다.
짧은 대답들이었다. 한 문장씩. 그 이상은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한 문장들이 모이면 뭔가가 보였다. 할머니와 둘이 사는 것.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
'저 사람은.'
할머니도 낮에 식당에서 일하시는 것. 설거지와 재료 손질. 저녁에 혼자 기다리시는 것. 시계를 보시는 것. 안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것.
쉬는 시간 10분 안에 나눈 대화였다.
많지 않은데 무거웠다.
종이 울렸다.
'생각이 많아진다.'
강수현이 먼저 돌아섰다. 교실 쪽으로 걸어가면서 한마디. 돌아보지 않고.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걱정이라고 단정한 건 강수현 쪽이었다. 윤시하는 걱정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었다. 편의점 끝나고 집까지 멀어, 라고 물었을 뿐이었다.
밥 제대로 먹어, 라고 물었을 뿐이었다. 그걸 걱정이라고 받아들인 건 강수현이었다. 스스로 이름을 붙였다. 남이 자기를 걱정한다는 걸 인식한 셈이었다.
강수현의 등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교복 뒤가 보였다. 단추 하나가 풀린 교복. 묶은 머리 아래 목덜미. 걸음이 빨랐다. 교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윤시하는 교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으면서 교과서를 폈다. 글씨가 눈에 안 들어왔다.
'저 사람은.'
이차함수 그래프가 교과서 위에 그려져 있었는데, 포물선이 아니라 다른 뭔가로 보였다. 급식실의 빈 자리. 편의점의 좁은 카운터. 정수기 앞에서 흐르는 물.
박지훈이 옆에서 물었다.
"어디 갔다 와?"
"정수기."
"정수기에서 뭐 했는데 그 표정이야."
"무슨 표정."
"뭔가 생각하는 표정."
"그냥 물 마셨어."
"거짓말." 박지훈이 웃으면서 교과서를 폈다. "뭔가 있었는데 안 말하는 거지."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싶다.
그 감정의 이름이 뭔지 아직 모르겠었다. 무서움은 아니었다. 호기심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냥,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다는 것.
할머니와 사는 것도,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도,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라고 말하면서 걱정이라고 먼저 이름 붙인 것도.
'여기가 편하다.'
교과서 위에 시선을 놓았다.
10분이었다. 쉬는 시간 10분.
그 안에서 뭔가가 바뀐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