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 요새 카르카스의 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날 선 칼날에 살점이 베여 나가는 감각이었다. 차갑다는 통각을 넘어 뼛속까지 시린 고통이 밀려왔다. 손에 쥔 푸른 얼음 결정은 장갑을 뚫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얼려버렸지만, 쥠을 풀지는 않았다. 나침반 로드스톤의 바늘이 미세하게 떨리며 북쪽 성벽을 가리켰다. 바늘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혼의 파장이 짙은 구역일수록 공기의 질감이 달라진다. 이곳은 쇠 냄새가 났다. 피보다 오래된, 수백 년간 동토에 눌러붙은 비릿한 금속의 악취였다. 성벽 아래 쌓인 눈더미를 지나 좁은 통로로 진입했다. 발밑에서 얼음이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렸다. 로드스톤을 외투 안으로 밀어 넣고 걸음 수를 세었다. 열둘. 열셋. 열넷. 숫자를 세는 행위는 오래된 방어 기제였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신경계의 틈새를 파고들 때, 숫자는 그 소음을 잠시나마 억눌러주었다. 통로 끝 돌벽에 검은 물이 배어 나왔다. 손을 가져다 대자 손가락 끝이 마비되며 이질적인 감각이 흘러들었다. 잔향이었다. 죽은 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체온. 즉시 손을 거뒀다. 의뢰는 단순했다. 카르카스 성채에서 숨진 상인의 유언 석판을 회수해 황금 평원 에란델의 유족에게 전달하는 것. 수수료는 사흘 치 식비에 불과한 메모리아였다. 비참할 정도로 적은 보상이었으나 거절하지 않았다.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유언 석판은 통로 안쪽 방에서 발견했다. 잿빛 돌바닥에 반쯤 파묻힌 표면에는 숫자와 이름이 빽빽했다. 상인의 미련은 결국 채무 목록이었다. 받지 못한 돈과 돌려받지 못한 물건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이 챙겨야 할 몫을 계산하고 있었다. 석판을 등짐에 넣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숫자를 세다 죽은 망자. 그 모습이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은 애써 지워냈다. 카르카스를 벗어나는 데는 두 시간이 소요됐다. 성채의 잔상 현상은 예상보다 지독했다. 북문 구역의 지형이 뒤틀려 방향을 잃었고, 정화의 등불이 꺼지기 직전에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등불의 심지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음에는 예비 심지를 넉넉히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외벽에서 한참을 내려가자 작은 집결지가 보였다. 이름 없는 교역 거점이었다. 폐창고를 개조한 건물들과 천막 몇 동이 전부인 곳. 메모리아 거간꾼이나 갈 곳 없는 부랑자들이 모여드는 밑바닥이었다. 레나는 구석진 천막 앞에 앉아 손톱 밑을 파내고 있었다. "왔네." 걸음을 멈추자 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목소리였다. "기다렸나." "아니. 심심해서." 레나가 몸을 일으켰다. 시안보다 두 뼘은 작은 체구였지만, 허리춤에 매달린 가죽 주머니 네 개는 묵직해 보였다. 저 안에 든 메모리아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석판은." "여기 있다." 레나가 천막 안으로 고개를 까닥이며 물었다. "근데 그것 때문에 날 찾아온 건 아니지?" 대답 없이 천막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불필요한 대화에 낭비할 기력은 없었다. 레나는 언제나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었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해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그 넉살이 피곤했으나 이제는 내버려 두었다. 제지하는 데 드는 에너지가 더 아까웠기 때문이다. 내부에는 낡은 탁자와 빛이 새어 나오는 랜턴이 놓여 있었다. 흔들리는 불빛이 레나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탁자 맞은편에 앉은 레나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조금 전의 장난기는 사라지고 계산적인 안광이 그 자리를 채웠다. "얼마나 남았지?" 외투 안쪽에서 작은 석재 판을 꺼냈다. 사자 의회가 발부한 채무 명세서였다. 표면에 새겨진 수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검게 변색되고 있었다. 명세서를 받아 든 레나가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부모님이 대단한 분들이었네." "……." "이걸 갚으려면 평생 미련 배달만 해도 모자라겠어. 다음 생까지 저당 잡혀야 할 수준인데." "알고 있다." "그리고 남은 기한은 열여섯 일이야. 여기 적혀 있네." 대답 대신 팔뚝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끝에 닿는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열여섯 일. 그 기간 내에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면 사자 의회는 영혼 소거를 집행한다. 그것은 죽음보다 참혹한 형벌이었다. 망자는 미련이라도 남기지만, 소거된 존재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다. 역사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증발하여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두렵지 않다고 스스로를 속이려 했으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레나가 가죽 주머니 하나를 풀었다. 보랏빛 보석이 탁자 위로 굴러 나왔다. 표면에 균열이 가득한 불량품처럼 보였지만, 그 틈새로 기묘한 기운이 일렁였다. 레나는 보석을 손가락으로 집어 천천히 밀어 보냈다. "복수심에 미쳐 죽은 전사의 잔향이 담긴 4단계 메모리아야. 이걸 쓰면 공명 효율이 두 배로 뛰어. 처리할 수 있는 미련의 밀도가 달라진다는 소리지." "침식 위험이 높을 텐데." "당연하지. 하지만 넌 침식보다 더 무서운 게 있잖아." 시안의 시선이 레나에게 고정됐다. "부모님이 왜 이런 채무를 남겼는지, 마지막에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알아내야 하잖아. 기한을 넘기면 소거야. 네가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르는 채로 끝난다고." 천막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레나가 주머니를 건네며 나직이 덧붙였다. "기억은 화폐일 뿐이야. 네가 지불할 수 있는 만큼만 가져와." 턱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기억을 판다는 것은 존재가 옅어짐을 의미했다. 탈육신화의 전조였다. 메모리아를 사용할 때마다 가장 선명하고 감정이 짙은 기억부터 대가로 지불된다. 시장 가치가 높은 기억부터 빠져나가는 방식이었다. "어떤 기억이 사라질지 선택할 수 없지." "그래." "부모에 관한 기억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인가." 레나의 표정이 찰나의 순간 흔들렸다. "그렇다면……." 말을 끝맺지 않았다. 탁자 위의 메모리아를 응시했다. 균열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복수심. 누군가 분노를 품고 죽으며 남긴 감정의 찌꺼기였다. 부모에 관한 기억을 상실하는 것은 근원적인 공포였다. 진실을 마주하기도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기한은 열여섯 일. 손을 뻗어 메모리아를 움켜쥐었다. 팔뚝에서 어깨로, 다시 목덜미로 서늘한 감각이 치고 올라왔다. 뇌 안쪽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격통에 이를 악물었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협곡이었다. 발밑으로 아득하게 꺼진 골짜기의 전경이 뇌리에 박혔다. 생전 본 적 없는 장소가 환영처럼 쏟아졌다. 짙은 안개와 진흙 냄새, 그리고 코가 아닌 영혼을 찌르는 피의 악취가 진동했다.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울음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의 목소리가 뒤엉켜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왔다. 고막이 아니라 뼈 마디마디가 울리는 진동이었다. 손을 펼치자 보라색 메모리아가 탁자 위로 떨어졌다. 천막 틈새로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레나가 기묘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도, 무심함도 아닌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통곡의 골짜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방금 그 메모리아에서 봤다." "……." "전사 한 명의 복수심으로는 이런 소리가 날 수 없어. 수백 명, 그 이상의 원념이다. 이걸 어디서 구했지?" 레나는 대답을 피하며 다른 메모리아를 정리하는 척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레나." 침묵이 랜턴 불빛보다 무겁게 내려앉았다. 레나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계산적인 눈매는 사라지고, 오랫동안 숨겨온 진실을 들킨 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걸 느꼈다면 네 공명도가 예상치를 훨씬 상회한다는 뜻이겠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맞아. 중요한 건 따로 있지." 레나가 주머니를 움켜쥐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 메모리아를 쥔 순간, 골짜기가 너를 인지했다는 거야."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인지했다고?" "통곡의 골짜기는 이백 년 전 폐쇄됐어. 그런데 이 메모리아가 유통되고 있다는 건 누군가 그곳을 열었다는 증거야. 그리고 네가 방금 그 부름에 응답한 거고." 바닥에 떨어진 보라색 결정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균열 사이로 골짜기의 악취와 무수한 목소리가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감각이 있었다. 자신을 향해 고정된 거대한 시선. 손바닥 안에서 보라색 돌이 서늘하게 빛났다. 균열이 하나 더 갈라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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