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을 어긴 자에게는 오직 소거만이 있을 뿐이다.”
에드릭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시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등 뒤로 9단계 공명도를 가진 영혼의 잔향이 거대한 파도처럼 일렁였다. 금빛으로 갈무리된 영혼의 파편들이 허공을 메웠다. 그것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다. 실체화된 거대한 압력이 지면을 짓눌렀다.
시안은 왼쪽 팔뚝을 강하게 쥐어뜯었다. 손톱이 살점을 파고들며 생생한 통증을 전달했다. 타인의 고통이 신경계를 타고 밀려오는 공명 현상을 억제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뇌리를 찌르는 비명과 원망의 목소리들이 에드릭의 등 뒤에서 쏟아져 나왔다.
“시안, 내 뒤로 붙어.”
바르가스가 거대한 방패를 바닥에 박아 넣었다. 묵직한 쇳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그는 고장 난 로드스톤을 품에 넣으며 선봉에 섰다. 전사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9단계 공명자 앞에서는 베테랑 전사의 기개도 한낱 낙엽에 불과했다.
레나는 이미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나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주변의 바위 틈새와 능선을 훑었다. 도망칠 경로를 계산하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사방을 에워싼 의회의 집행 부대는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영혼 종속령 위반, 그리고 금지된 유산의 소지.”
에드릭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서 응집된 메모리아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너의 존재는 이제 의회의 기록에서 지워질 것이다. 네가 가진 그 부정한 기억과 함께.”
시안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에드릭의 움직임을 살폈다. 15미터. 에드릭의 보폭은 일정했다. 그가 허공을 밟을 때마다 지면의 잔상 현상이 억제되며 물리적 좌표가 고정되었다. 시안의 머릿속에서 수치가 나열되었다. 적의 공격 범위, 영혼의 파장 주동기, 그리고 아군이 버틸 수 있는 시간.
“바르가스, 3초 뒤에 왼쪽으로 굴러요.”
시안의 짧은 명령에 바르가스는 대답 대신 방패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에드릭의 손끝에서 황금빛 빛줄기가 쏘아져 나갔다. 직선으로 뻗어오는 파괴적인 권능이었다. 바르가스가 상체를 숙이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서 있던 자리가 굉음과 함께 증발했다. 흙먼지가 피어오르기도 전에 에드릭은 이미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안은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품 안의 등불을 꺼냈다. 정화의 등불은 이미 희미한 빛만을 내뿜고 있었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제물로 바쳐 얻은 짧은 평화는 이제 한계였다.
“레나, 가지고 있는 메모리아 전부 내놔요.”
“미쳤어? 이건 내 전 재산이야!”
레나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지만, 시안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죽으면 재산도 의미 없다는 거, 상인인 당신이 제일 잘 알 텐데.”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에드릭의 두 번째 공격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위 파편이 튀어 레나의 뺨에 상처를 냈다. 핏방울이 맺히는 것을 본 그녀는 욕설을 내뱉으며 품 안의 주머니를 던졌다.
시안은 공중에서 주머니를 낚아챘다. 그 안에는 순도가 일정하지 않은 저급 메모리아들이 가득했다. 누군가의 슬픔,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 그리고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이 결정체가 되어 손바닥을 자극했다.
신경계가 비명을 질렀다. 수십 명의 인생이 한꺼번에 뇌로 유입되는 감각은 고문에 가까웠다. 시안은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눈앞이 번쩍이며 생전 본 적 없는 통곡의 골짜기 전경이 환영처럼 쏟아져 내렸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 이름 모를 병사의 마지막 유언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아직도 저항하는가. 가련한지고.”
에드릭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거대한 문장을 그렸다. 의회의 낙인이 시안의 머리 위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영혼 소거형의 시작이었다. 낙인이 완성되면 시안의 자아는 산산조각 나 의회의 거대한 저장소로 귀속될 터였다.
시안은 자신의 팔을 쥐어뜯던 손을 놓았다. 대신 그 손으로 바닥의 흙을 움켜쥐었다.
“바르가스, 방패를 버리고 뛰어오세요!”
바르가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줄과도 같은 거대한 방패를 내던지고 시안을 향해 돌진했다. 에드릭의 권능이 방패를 때려 부수는 순간, 바르가스는 시안의 옷덜미를 잡아채며 몸을 날렸다.
폭발의 충격파가 등 뒤를 덮쳤다. 시안은 공중에서 메모리아 주머니를 으깼다. 결정체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며 불규칙한 영혼의 잔향을 만들어냈다. 에드릭의 정교한 마법 체계에 노이즈가 발생했다.
“이게 무슨……!”
에드릭의 미소가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질서를 숭상하는 그에게 무작위로 섞인 저급한 영혼들의 파동은 오물과도 같았다. 낙인의 형성이 지연되었다. 0.5초. 시안이 계산한 반격의 틈이었다.
시안은 바닥에 굴러떨어지며 품 안에서 벼려둔 영혼의 파편을 꺼냈다. 그것은 부모의 유품 중 유일하게 남은, 출처를 알 수 없는 검은 금속 조각이었다.
“에코 마법, 공명 개시.”
시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는 자신의 마나를 쥐어짜 내는 대신, 주변에 흩어진 저급 메모리아의 잔향을 강제로 흡수했다. 공허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금지된 방식이었다.
육신이 비명을 질렀다. 타인의 기억이 시안의 자아를 잠식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를 지워가며 그 빈자리에 죽은 자들의 미련을 채워 넣었다.
손 끝에서부터 온기가 사라졌다. 피부가 반투명해지며 등 뒤의 풍경이 비쳐 보이기 시작했다. 탈육신화의 전조였다.
“시안! 몸이……!”
레나의 비명이 들렸지만 시안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에드릭의 가슴팍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금속 조각이 공명을 일으키며 비정상적인 진동을 뿜어냈다. 그것은 의회의 질서와 정반대되는, 완벽한 무(無)의 파동이었다.
에드릭의 등 뒤에서 일렁이던 황금빛 파도가 순간적으로 멈췄다. 9단계 공명자가 펼친 절대적인 영역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시안의 손이 에드릭의 법복을 스쳤다.
“너, 정체가 뭐냐.”
에드릭의 목소리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그는 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시안이 뿌려놓은 메모리아 가루들이 족쇄처럼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죽은 자들의 미련이 산 자의 권능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시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미각을 자극했지만, 곧 그 감각조차 희미해졌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소리가 멀어졌다. 세상의 좌표에서 자신의 위치가 소실되고 있었다.
“바르가스, 지금이에요.”
시안의 말에 바르가스가 품 안의 고장 난 로드스톤을 에드릭의 발치로 던졌다. 로드스톤은 시안의 공허 마법과 반응하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바늘 두 개가 미친 듯이 회전하며 공간의 뒤틀림을 극대화했다.
잔상 현상이 폭발했다. 통곡의 골짜기가 수백 년 전의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강제 환원되었다. 늪지가 솟구치고 절벽이 무너져 내렸다. 의회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공간의 틈새로 빨려 들어갔다.
에드릭은 분노 서린 눈으로 시안을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의 권능을 집중시켜 폭주하는 공간을 고정하려 애썼다.
“네놈이 감히 의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느냐!”
“질서가 아니라, 억압이겠죠.”
시안은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에드릭의 눈을 마주 보았다.
자신의 몸은 이제 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해져 있었다. 손가락 끝은 이미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진 상태였다. 의식이 대지 전체로 퍼져나가는 기이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이것이 공허의 마법사가 겪는 탈육신화의 끝이었다. 존재의 소멸이자, 동시에 만물과의 합일.
“시안! 정신 차려! 이대로 가다간 너 진짜 사라진다고!”
레나가 달려와 시안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으나, 그녀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시안의 몸은 그저 일렁이는 아지랑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시안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영혼의 진동이 직접 레나와 바르가스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먼저 가세요. 저는 여기서 이 자를 붙잡아 두겠습니다.’
“헛소리하지 마라, 꼬맹아!”
바르가스가 포효하며 시안을 들쳐 메려 했다. 하지만 그의 거친 손바닥 역시 시안의 투명한 가슴을 그대로 통과했다.
에드릭이 거대한 빛의 창을 만들어 시안을 겨누었다. 공간의 뒤틀림 속에서도 그의 살기는 정확히 시안의 핵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죽지도 살지도 못한 망령이 될 뿐이다.”
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남은 마력을 전부 쏟아부어 금지된 공허의 마법, ‘망각의 수의’를 시전했다. 자신의 존재를 지불하여 주변의 모든 정보를 지워버리는 극단적인 마법이었다.
빛의 창이 날아왔다. 동시에 시안의 몸이 수만 개의 파편으로 부서져 내렸다.
골짜기 전체가 눈부신 백색광에 잠겼다. 소리도, 색깔도, 고통도 사라진 무색의 공간이 펼쳐졌다. 에드릭의 당황한 고함이 멀어졌다.
시안은 자신의 의식이 대지의 흙 속으로, 흐르는 검은 강물 속으로, 그리고 흩날리는 안개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인간으로서의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세상의 모든 미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찾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안의 목소리도, 에드릭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골짜기 깊은 곳,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최초의 미련’이 내뱉는 한숨이었다.
시안은 마지막 힘을 다해 눈을 떴다. 투명해진 시야 너머로 에드릭의 경악한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무너진 절벽 틈새에서 거대한 검은 손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시안은 금지된 공허의 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육신이 투명해지며 의식이 대지로 흩어지는 탈육신화 현상이 시작되었다.
“이제부터는 누구의 기억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