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뒤틀린 잔상
등불의 빛이 사그라들자 골짜기의 공간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시안은 텅 빈 머릿속을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 귓가를 맴돌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니, 목소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이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정화의 등불을 사용한 대가는 예상보다 가혹했다. 기억의 한 귀퉁이가 날카로운 칼에 잘려 나간 듯 매끄럽고 서늘했다.
하얀 가면을 쓴 자들이 거리를 좁혀왔다. 그들이 든 검은 등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발목을 감쌌다. 기괴한 고음의 휘파람 소리가 다시 한번 골짜기를 울렸다. 바르가스가 거대한 방패를 앞세우며 시안의 앞을 막아섰다. 쇠붙이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정적을 깼다.
“정신 차려라, 묘지기.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바르가스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시안은 심호흡을 하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팔뚝을 강하게 쥐어뜯으며 통증으로 의식을 붙들었다. 손톱이 살점을 파고들자 희미한 정신이 돌아왔다. 공명 현상 때문에 주변의 부정한 기운이 신경계를 타고 흘러들었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며 식은땀이 흘렀다.
가면 무리 중 하나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마나가 실타래처럼 엉겨 붙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마법이 아니었다. 죽은 자의 잔향을 강제로 끌어올려 구현하는 에코 마법의 변질된 형태였다. 공기 중의 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날카로운 얼음 파편으로 변했다.
“비켜라, 거인. 우리가 원하는 건 그놈뿐이다.”
가면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감정이 거세되어 있었다. 바르가스는 대답 대신 방패를 바닥에 강하게 내리찍었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지면이 진동했다. 그는 시안을 힐끗 돌아보며 짧게 덧붙였다.
“내 뒤에 붙어 있어라. 이놈들은 예사롭지 않다.”
시안은 바르가스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의심하고 몰아세우던 남자의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 단순한 고용 관계 이상의 기류였다. 바르가스의 눈빛에는 시안의 희생을 목격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묘한 동질감이 서려 있었다. 자신 또한 무언가를 잃어본 적이 있다는 침묵의 긍정이었다.
그때, 덤불 속에서 레나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평소의 쾌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하지만 시안의 눈에는 그녀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주변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레나는 시안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시안! 괜찮아? 세상에, 얼굴색 좀 봐. 기억이… 기억이 얼마나 사라진 거야?”
레나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했지만, 손길은 차가웠다. 그녀는 시안의 주머니 속에 든 메모리아의 감촉을 확인하듯 슬쩍 손을 뻗었다. 시안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건드리지 마.”
“어머, 얘 좀 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방금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부모님이 의회의 첩자였다고 소리 질렀잖아.”
시안의 사고가 멈췄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머릿속 서랍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레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네 부모님은 널 버린 게 아니야. 의회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다가 숙청당한 거지. 내가 다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나만 믿어, 알았지?”
레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시안의 혼란을 틈타 가짜 기억을 심으려는 속셈이었다. 기억 밀매꾼다운 빠르고 영악한 계산이었다. 시안은 그녀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목 안쪽이 뜨거워지며 억눌린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타인의 의도가 신경계를 찔러오는 감각이 불쾌했다.
“너는 나를 이용하려 하지만, 나는 너를 믿지 않아.”
시안의 짧은 대꾸에 레나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상황을 수치화하자면 레나의 신뢰도는 영에 수렴했다.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차라리 묵묵히 앞을 지키는 바르가스였다.
가면 무리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검은 등불의 불꽃이 길게 늘어지며 채찍처럼 허공을 갈랐다. 바르가스의 방패가 검은 불꽃을 받아내며 불꽃을 튀겼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강철 방패가 부식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화염이 아니었다. 영혼을 갉아먹는 침식의 불길이었다.
시안은 품 안에서 로드스톤을 꺼냈다. 바늘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부정한 파장을 가리켰다. 이 공간의 뒤틀림을 유지하는 핵이 근처에 있었다. 그는 바르가스의 뒤를 돌아 뛰기 시작했다.
“어디 가!”
레나가 소리쳤지만 시안은 멈추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폐부는 타들어 가는 듯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밀리면 영원히 이 골짜기의 잔상 속에 갇히게 된다. 시안은 자신의 손목을 깊게 찔렀다.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자 공명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대지 밑에 잠들어 있던 수천 개의 미련이 아우성치며 뇌를 두드렸다. 시안은 고통을 집어삼키며 땅속에 박힌 기괴한 말뚝을 찾아냈다. 그것은 사자 의회의 인장이 찍힌 영혼 구속구였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골짜기를 망령의 소굴로 유지하고 있었다.
시안은 남은 마력을 쥐어짜 내어 구속구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태웠다. 치밀어 오르는 비명을 억누르며 그는 구속구를 비틀어 뽑아냈다. 우드득, 하고 공간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등불의 불꽃이 순식간에 꺼졌다. 하얀 가면 무리가 당황한 듯 멈춰 섰다. 공간의 좌표가 정상으로 돌아오며 주변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바르가스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구의 몸을 날려 가면 무리 중 하나를 들이받았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걷히는 안개 너머로 수십 개의 정연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망령이나 밀매꾼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철저히 훈련된 군대의 진군이었다.
골짜기의 능선 위로 은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중심에는 화려한 장식의 법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사자 의회의 집행관, 에드릭이었다. 그는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일말의 온기도 없었다.
에드릭은 천천히 손을 들어 시안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에 서린 차가운 살기가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병사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고, 그 끝은 정확히 시안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찾았다, 잃어버린 유산.”
에드릭의 목소리가 골짜기 전체를 공명시키며 낮게 깔렸다. 그는 마치 길을 잃은 어린양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시안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가진 그 등불, 그리고 네 속에 잠든 부모의 죄악. 이제 의회의 품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시안은 자신의 팔뚝을 더욱 세게 쥐었다. 손등 위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바르가스는 검을 고쳐 쥐며 시안의 옆으로 다가왔고, 레나는 이미 퇴로를 찾느라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포위망은 빈틈이 없었다. 에드릭의 차가운 시선이 시안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전원, 무릎을 꿇어라. 사자의 뜻에 거역하는 자는 존재의 소멸뿐이다.”
에드릭이 계단을 내려오듯 허공을 밟으며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뒤틀렸던 지형이 의회의 질서 아래 강제로 고정되었다. 시안은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에드릭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 깊은 어둠 속에서, 그는 자신이 잊어버린 무언가가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에드릭의 손이 공중에서 가볍게 휘둘러졌다.
“집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