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충격이 방패를 때렸다. 콰앙! 금속음이 늪지의 무거운 공기를 찢었다. 바르가스의 무릎이 진흙탕에 박혔다. 탁한 물이 허벅지까지 튀었고, 비릿한 악취가 코 안쪽을 찔렀다.
“으윽, 끝도 없군!”
바르가스가 이를 악물며 신음했다. 시안은 방패 뒤에서 ‘혼의 그릇’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유리 원반 위로 세 줄의 금이 선명했다.
“바르가스, 버텨. 횟수가 얼마 안 남았어.”
“말은 쉽지! 이놈들 숫자가 계속 늘어난다고!”
바르가스의 외침과 동시에 사방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뼈와 미련이 마찰하며 공기를 갈아내는 기괴한 진동.
“일곱.” 시안이 차갑게 숫자를 읖조렸다. “정면 넷, 좌측 둘, 그리고 뒤쪽… 아니, 다섯이다. 늘어났어.”
“빌어먹을, 뒤쪽까지? 공명도는 얼마나 확보했어!”
“알아서 하겠다. 넌 앞이나 막아.”
시안이 혼의 그릇에 정신력을 흘려보내자, 원반 위로 창을 든 군인의 잔상이 떠올랐다. 복수도 분노도 아닌, 돌아가지 못한 자의 막연한 후회. 시안은 그 잔향을 강제로 끌어당겨 오른손에 감았다.
쉬이익!
방패 옆으로 파고들던 망령의 중심부를 시안이 손날로 그었다. 안개가 갈라지듯 형체가 흩어졌다.
“하나. 남은 건 열넷 이상이다. 움직여!”
“알았다니까!”
바르가스가 방패를 밀어붙이며 전진했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시안이 멈춰 섰다. 시안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왜 그래? 멈추면 죽어!”
“바르가스, 발밑을 봐.”
시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바르가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1분 전 지나왔던 뒤틀린 버드나무 세 그루가 정면에 다시 나타나 있었다.
“이게 뭐야? 왜 방금 지나온 곳이 앞에 있어?”
“뒤를 봐. 뒤도 똑같아.”
바르가스가 급히 몸을 돌렸다. 뒤쪽 역시 핏빛 늪과 동일한 나무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공간이 접힌 것이다.
“잔상 현상이야. 미련의 밀도가 임계치를 넘었어. 구역 자체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고착된 거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소리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망령들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접힌 공간 안에서 증식하듯 늪 아래서 솟아올랐다. 하나, 둘, 다섯… 수십 개의 찌그러진 얼굴들이 수면을 뚫고 올라왔다.
“시안! 혼의 그릇은?”
“금이 네 줄로 늘어났어. 길어야 두 번이다.”
“제장! 방법이 그것뿐인가? 레나가 준 거 말이야.”
시안의 손이 품속으로 들어갔다. ‘정화의 등불’. 은빛 기름이 담긴 작은 유리 용기. 점화하는 순간 현실의 좌표를 고정해 탈출구를 열어주지만, 대가가 가혹했다.
“그건 기억을 태워야 해. 이 정도 규모의 뒤틀림을 풀려면… 아주 선명하고 강렬한 기억이어야 한다.”
“지금 네 기억 따질 때야? 내가 죽게 생겼는데!”
바르가스의 방패에 네 마리의 망령이 한꺼번에 들이받았다. 콰드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바르가스가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오래 못 버텨! 대가가 뭐든 당장 써!”
시안은 등불을 꺼내 들었다. 유리 표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스물도 안 된 나이, 하지만 이미 수많은 기억을 파먹힌 채 살아온 껍데기.
‘남은 건 하나뿐인데.’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의 선율. 아버지가 머리를 쓸어내리던 온기. 열두 살 이전의 기억 중 가장 온전하게 남은 마지막 조각이었다.
“기억 하나쯤 사라져도 상관없어.”
시안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그는 주저 없이 정신력을 등불로 밀어 넣었다.
화아악!
푸른 불꽃이 일었다. 시안의 두개골 뒤쪽에서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치밀었다. 머릿속에서 작은 부엌과 식탁, 그리고 여자의 목소리가 일그러지며 타들어 갔다. ‘다, 라, 파’ 세 음의 선율이 비명처럼 흩어졌다.
“끄으윽…!”
시안이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등불의 빛이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쩌적, 지형이 갈라지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가 늪지에 진동했다. 망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증발했다.
“열렸다! 시안, 가자!”
바르가스가 시안의 팔을 낚아채듯 잡고 뛰었다. 안개가 걷히고 골짜기의 가장자리가 보였다. 안전지대에 도달하자마자 시안이 바닥에 쓰러졌다. 손에서 놓친 등불이 진흙 위에 굴렀다.
“하아, 하아… 살았군. 어이, 시안. 괜찮아?”
바르가스가 시안을 부축해 세웠다. 하지만 시안의 눈동자엔 아무런 초점이 없었다. 텅 빈 인형처럼, 그는 자신의 손을 멍하니 내려다볼 뿐이었다.
“시안? 정신 차려. 뭘 태운 거야?”
“…….”
“중요한 기억이었냐고 묻잖아!”
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모르겠어.”
“뭐?”
“무언가… 아주 따뜻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나.”
바르가스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시안의 어깨를 꽉 쥐었다. 떨리는 시안의 손을 자신의 투박한 손으로 감싸며, 바르가스가 낮게 읊조렸다.
“네 어머니 노래였어.”
“…어떻게 알아?”
“불꽃이 타오를 때, 네가 흥얼거렸거든. 세 음짜리 아주 짧은 곡조를. 나는 분명히 들었다.”
시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세 음짜리 곡. 머릿속 빈 서랍을 미친 듯이 뒤졌지만, 잡히는 것은 서늘한 공기뿐이었다.
“내가… 노래를 불렀다고?”
“그래. 아주 소중한 걸 다루는 것처럼.”
바르가스가 시선을 피하며 등을 돌렸다. 시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늪 저편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그의 텅 빈 가슴을 관통했다.
그때였다. 멀리 숲 입구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기괴한 고음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바르가스가 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냐!”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망령이 아니었다. 레나가 보내준 지도에는 없던, 하얀 가면을 쓴 자들이 등불의 푸른 잔광을 받으며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시안의 것과 똑같은, 하지만 검은 불꽃이 일렁이는 등불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