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내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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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업계에서 '자리'는 사람을 만든다.
청담 펄리스 VVIP 라운지. 1화의 그 장소가 다시 열렸다. 같은 샴페인, 같은 소파, 같은 간접 조명. 하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1화에서는 새해 시상식 뒤풀이의 느슨한 공기가 있었다. 오늘은 달랐다. 공기에 날이 서 있었다. 이 라운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준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준의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 있었다.
서은아. 검은 원피스. 어깨가 드러나는 디자인. 좁은 어깨가 도려 눈에 띄었다. 스타일리스트가 골랐을 것이다. 이준은 그 선택이 의도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좁은 어깨를 드러내면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 이미지의 언어. 이 업계에서 옷은 패션이 아니라 메시지였다.
이준은 차콜 수트에 넥타이 없이. 첫 번째 단추를 풀었다. '편안하지만 통제된' 인상. 15년 동안 수백 번 입은 조합이었다. 오늘은 왼쪽 손목에 시계를 찼다. 평소에 차지 않는 시계를. 이유는 하나였다. 서은아의 손을 잡았을 때 시계가 서은아의 손등에 닿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기억에 남는다. 사진에도 남는다. 디테일이었다.
라운지에 들어선 것은 8시 정각이었다. 도윤이 앞에서 길을 열었다. 이준과 서은아가 나란히 걸었다. 손을 잡지 않았다. 아직은. 타이밍이 있었다.
10걸음을 걸었을 때 시선의 밀도가 바뀌었다. 라운지 안의 사람들 — 배우, 감독, 제작사 대표, 기자, 광고주 — 이 고개를 돌렸다. 속삭임이 번졌다. 이준은 속삭임의 방향과 밀도를 읽었다. 왼쪽 바 테이블에서 강하고, 오른쪽 소파 그룹에서 약했다. 왼쪽은 기자석이었다. 오른쪽은 제작사. 기자가 더 관심이 많다는 뜻이었다.
이준은 걸으면서 서은아의 걸음을 느꼈다. 반 걸음 뒤. 리허설 때 맞춘 간격이었다. 프로니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허설 때와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서은아의 호흡이 평소보다 빨랐다. 이준은 그것을 오른쪽 귀로 들었다. 귀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서은아의 입이 있었다. 반 걸음 뒤, 반 뼘 오른쪽.
박대건이 안쪽 소파에 앉아 있었다. 샴페인 잔을 들고 있었다. 1화의 그 자리. 같은 샴페인, 같은 소파, 같은 미소. 이준과 눈이 마주쳤다. 박대건이 잔을 살짝 들어 보였다. 건배의 제스처. 혹은 '잘하고 있어'의 신호.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박대건의 신호에 응답하면 설계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30분이 지났다. 이준과 서은아는 바 테이블에 서 있었다. 샴페인을 마셨다. 서은아는 잔을 입에 대기만 했다. 마시지 않았다. 이준은 그것을 알아챘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인지, 오늘 마시면 안 되는 것인지.
주변에서 사람들이 다가왔다 물러났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 눈인사만 하는 사람, 아예 시선을 피하는 사람. 세 부류였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이준에게 호의적이거나 정보가 필요한 사람. 시선을 피하는 사람은 이준에게 적대적이거나 아직 판단을 못 한 사람. 이준은 세 부류를 구별하며 라운지의 지형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때 여자 한 명이 다가왔다. 30대 후반. 명품 드레스.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이준은 그녀를 알았다. 잡지 편집장. 차서린 인터뷰를 실을 여성지의 편집장이었다.
"이준 씨, 오랜만이에요."
"네. 잘 지내셨어요."
편집장이 서은아를 보았다. 위아래로. 3초. 그 3초 안에 평가가 끝났을 것이었다. 이 업계의 사람들은 3초 안에 상대를 평가한다. 이준처럼.
"서은아 씨? 루나틱?"
"네. 안녕하세요."
서은아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라운지의 소음 속에서도 선명했다. 이준은 그 선명함을 기억해두었다. 소음 속에서 선명한 목소리는 무대에서 훈련된 것이었다.
편집장이 웃었다. 웃음에 날이 있었다.
"차서린 씨 인터뷰 곧 나와요. 이준 씨도 보시게 될 거예요."
이준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손이었다. 샴페인 잔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0.5초. 그리고 풀었다. 차서린. 그 이름이 이 자리에서 나올 줄은 알고 있었다. 최지훈이 4화에서 말했다. 인터뷰를 제안한 쪽이 차서린 본인이 아닐 수도 있다고. 편집장이 인터뷰를 언급한다는 것은 — 티저가 이미 풀렸다는 뜻이었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준이 말했다. 거짓이었다. 기대가 아니라 경계였다. 하지만 이 라운지에서 경계를 보여주는 것은 패배였다.
편집장이 돌아간 뒤 서은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서린이… 누구예요?"
이준은 서은아를 보았다. 서은아의 눈이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모르는 것이었다. 서은아는 차서린이 누구인지 몰랐다. 이 판의 모든 참여자가 알고 있는 이름을 서은아만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이준은 그 태도에 감사했다. 감사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또 불편했다.
9시. 라운지의 공기가 달라졌다.
기자 한 명이 다가왔다. 스포츠 매체. 볼펜을 들고 있었다. 녹음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강이준 씨, 잠깐 여쭤봐도 될까요?"
"네."
"열애 인정 후 반응이 갈리고 있는데요. 조작 의혹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준은 웃었다. 정확히 말하면 입꼬리를 올렸다. 이 업계에서 질문에 웃으면 여유의 표현이었다. 여유는 방어였다.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법무팀의 문장. 확정하지 않는 언어.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언어. 기자는 만족하지 않았다.
"서은아 씨에게도 한 말씀?"
서은아가 이준을 보았다. 0.5초. 이준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대답해도 됩니다'의 신호.
"좋은 분이세요."
서은아가 말했다. 세 단어. 서은아의 방어도 짧았다. 이준의 한 문장과 서은아의 세 단어. 그것으로 기자는 물러났다.
서은아가 이준의 팔을 잡았다. 가볍게. 계약서에 명시된 '자연스러운 신체 접촉' 범위 안이었다. 하지만 서은아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준은 그 힘을 느꼈다. 7화에서 잡았던 손보다 강했다. 두려움의 힘이었다.
하지만 물러난 기자의 뒤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두 번째 기자. 세 번째 기자. 네 번째는 기자가 아니라 업계 관계자였다. 질문이 칼처럼 날아왔다.
"계약이죠? 솔직히 말해주세요."
"돈 받았죠?"
"서은아 씨 빚이 5억이라던데, 그거 때문 아닙니까?"
서은아의 얼굴이 굳어갔다. 하나씩. 미소가 사라지고, 눈이 어두워지고, 어깨가 — 내려왔다. 펴고 있던 어깨가 내려오는 것을 이준은 보았다. 7화에서 잡았던 어깨. 코트를 걸쳐줬던 어깨. 그 어깨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준은 3초를 세었다. 3초.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안에 선택지를 계산했다.
하나, 법무팀 문장으로 막는다. '확인 중입니다.' 안전하지만 약하다. 둘, 침묵한다. 침묵은 인정으로 읽힌다. 약하다. 셋 — 판을 깬다.
이준은 셋을 선택했다.
3초가 끝났다. 이준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서은아보다 반 걸음 앞. 서은아의 어깨가 이준의 등 뒤에 가려졌다. 그리고 말했다.
"내 여자입니다."
라운지의 소음이 멈췄다. 1초. 2초. 3초. 3초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도, 속삭임도, 웃음소리도 사라졌다. 이준의 세 글자가 라운지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내 여자.' 법무팀이 금지한 확정 표현이었다. '연인'이 아니라 '내 여자.' 소유의 언어. 이 업계에서 소유의 언어는 최고 등급의 선언이었다. 선언은 철회할 수 없었다. 철회하면 거짓이 되고, 거짓이 되면 15년이 무너진다.
이준은 그것을 알고 말한 것이었다. 계산 끝에 나온 비계산. 통제 끝에 나온 비통제. 3초 안에 15년을 걸었다.
라운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3초의 정지가 풀렸다. 속삭임이 돌아왔다. 하지만 속삭임의 질이 달라져 있었다. 아까까지는 관찰의 속삭임이었다. 지금은 판단의 속삭임이었다. '진심이다', '연기다', '미쳤다', '멋있다'. 네 종류의 판단이 라운지를 채웠다. 이준은 네 가지를 전부 들었다. 15년의 귀였다. 하지만 어떤 판단이 맞는지는 자기 자신도 모르겠다.
누군가 라이브를 켰다. 스마트폰의 빨간 불이 라운지 구석에서 빛났다. 3초 만에 영상이 인터넷으로 나갔다. '내 여자'라는 세 글자가 텍스트가 되고, 캡처가 되고, 해시태그가 되어 퍼지기 시작했다.
서은아가 이준의 등을 보고 있었다. 반 걸음 앞에 선 등. 넓은 등이었다. 서은아의 좁은 어깨가 완전히 가려지는 넓이. 서은아는 그 등을 보며 한 가지를 알았다. 이 사람이 계산으로 이 말을 했는지, 진심으로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말을 한 순간, 이 사람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이준이 돌아보았다. 서은아를 보았다. 서은아의 눈에 아까 읽지 못했던 것이 다시 떠올라 있었다. 3화에서도, 7화에서도, 8화에서도 읽지 못한 것. 이번에는 — 이준은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신뢰였다. 가짜 연애의 상대에게 보내는, 진짜 신뢰.
이준은 그것을 읽고 — 시선을 돌렸다. 읽어버렸다. 읽지 말았어야 했다. 읽으면 계산이 무너진다. 계산이 무너지면 —
독백이 떠올랐다.
이건 연기다. 라고 말하면 편해진다.
그런데 지금은 편해지지 않는다.
10분 후.
라이브 영상 조회수 58만. 실시간 검색어 1위 '강이준 내 여자'. 2위 '서은아 강이준'. 3위 '청담 펄리스'. '조작 의혹'은 10위 밖으로 밀려났다. 코트 영상이 유튜브를 이겼듯이, 세 글자가 코트를 이겼다.
이준은 라운지 발코니에 혼자 서 있었다. 서은아는 안에 있었다. 도윤이 옆을 지키고 있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1월의 서울. 발코니에서 보이는 청담동의 야경. 한강이 멀리 보였다. 이준이 아침에 걸었던 한남대교가 빛나고 있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박대건.
[완벽했다.]
한 단어. 박대건의 평가. 이준은 그 한 단어가 불쾌했다. '완벽했다'는 것은 설계대로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이준은 설계대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 아니, 설계 밖에서 움직인 것인지 안에서 움직인 것인지 자신도 모르겠다.
발코니 아래로 청담동의 거리가 보였다. 택시가 지나갔다. 커플이 걸어갔다. 진짜 커플. 손을 잡고, 웃고, 특별한 계산 없이. 이준은 그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은 15년 동안 저렇게 걸어본 적이 없었다. 계산 없이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누군가와 걷는 것. 그런 경험이 없었다.
두 번째 진동. 최지훈.
[멋진 한 방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일 아침, 조수석 여성 기사 확정입니다. 이번에는 본인 제보.]
본인 제보. 조수석 여성 본인이 제보한 것이었다. 이준은 그 단어의 무게를 재었다. 본인이 나서면 더 이상 추측이 아니라 증언이 된다. 증언은 추측보다 무겁다. 추측은 부정할 수 있지만 증언은 부정하면 법적 분쟁이 된다.
'내 여자'라는 세 글자가 포털 메인보다 먼저 세상을 뒤집었다. 하지만 내일 아침, 다른 세 글자가 그것을 다시 뒤집을 수 있었다. '본인 제보.'
이준은 발코니 난간을 잡았다. 차가운 금속. 시계를 찬 왼쪽 손목이 난간에 닿았다. 서은아의 손을 잡기 위해 찬 시계. 그 시계의 차가움이 이준의 손목에서 발코니 난간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안쪽에서 서은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와 인사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고요했다. 라운지의 소음 속에서도 선명했다. 무대에서 훈련된 목소리. 이준은 그 목소리를 듣고 — 듣지 않으려 했다. 듣지 않으려 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7화에서 보지 않으려 한 것과 같은 이상함이었다.
은아는 그 말을 듣고도 웃지 못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이준이 라운지로 돌아왔을 때, 서은아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샴페인 잔을 들고 있었다. 여전히 입에 대기만 하고 마시지 않았다. 이준이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테이블 하나. 계약서를 펼쳤던 시크릿 룸의 테이블과 같은 거리.
서은아가 이준을 보았다.
"고마워요."
두 단어. 서은아의 방어는 항상 짧았다. 하지만 이것은 방어가 아니었다. 감사였다. '내 여자'라는 말에 대한 감사가 아니었다. 8화에서 코트를 걸쳐준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었다. 7화에서 손을 잡아준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었다. 전부에 대한 감사였다.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감정이 보인다. 감정이 보이면 — 15년이 무너진다. 하지만 15년 동안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 두 단어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준은 샴페인을 마셨다. 이번에는 반 잔을 비웠다. 잔을 내려놓았을 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최지훈.
[멋진 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일 아침 10시, 조수석 여성 본인 제보 기사 확정. 이번에는 못 막습니다.]
본인 제보. 이준은 그 두 글자를 보았다. '내 여자'라는 세 글자로 세상을 뒤집은 지 10분 만에, 다른 세 글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샴페인, 같은 소파. 하지만 1화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리고 내일이면 — 다시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