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황태자의 시선
그날은 비가 왔다.
기다리던 봄비는 아니었다. 보슬비. 땅을 적시기엔 부족하지만, 포기할 정도는 아닌 애매한 양.
아침부터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시범구역 보고서, 배급 정산, 화폐 전환 현황. 양피지가 탁자에서 넘쳐났다.
토마스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메디치안?」
「아닙니다. 평민 복장인데…… 카일 기사단장님이 매우 긴장하고 계십니다.」
카일이 긴장하는 손님.
복도로 나갔다. 카일이 서 있었다. 평소와 달리 허리가 곧게 펴지고, 턱이 살짝 들려 있었다. 상관 앞에서 취하는 자세.
현관의 남자를 보았다. 투박한 외투에 먼지 묻은 장화. 하지만 옷 아래의 자세가 달랐다. 어깨가 완벽하게 수평이고, 고개의 각도가 세상을 내려다보는 사람의 것이었다. 반 발짝 뒤에 같은 복장의 남자 둘. 평민인 척했지만, 시선이 사방을 훑는 방식이 군인이었다.
그리고 오후 햇살에 반사되는 백금발.
1화의 발코니. 나를 내려다보던 그 남자.
황태자 루시엔 드 발렌티아.
심장이 한 박자 빨라졌다. 하지만 재무팀 과장은 심장이 빨라질 때 표정이 변하면 안 된다.
「……카르테시아 백작 에스텔라.」
사형장에서의 외침과는 다른, 낮고 고요한 목소리.
「반갑습니다, 손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위장에는 위장으로 응한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궁에서 들을 수 없는 소문이 있더군. ……직접 확인하러 왔소.」
*
집무실로 안내했다. 루시엔이 탁자 위 양피지들을 보았다. 시선이 배급 장부에서 멈췄다. 한 장씩 넘겼다. 종이 넘기는 소리만 집무실에 울렸다.
「기록 방식이 독특하군. 대변과 차변을 나누어 적었소.」
복식부기. 이 사람이 알고 있다.
「입고 나간 것을 양쪽에 적으면, 한쪽이 빠졌을 때 바로 드러납니다.」
장부를 내려놓았다. 나를 보았다. 눈은 가볍지 않았다.
「질문 하나. 이 영지의 부채 총액은?」
시험이었다.
「12만 데나리우스. 이자를 포함하면 14만에 근접합니다.」
「그러면. 제국 전체의 부채는?」
맥락이 커졌다. 어디까지 보는지를 재고 있다.
침묵. 문 밖에서 카일의 숨소리가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에스텔라의 기억과 마력석 장부의 숫자들을 교차시켰다. 세수 추이, 전쟁 국채, 귀족 면세. 숫자를 세 번 돌렸다. 오차가 커도 자릿수는 같았다.
「……정확한 수치는 모릅니다. 하지만 수백 배 이상. 천 배면…… 이미 늦었죠.」
루시엔의 시선이 달라졌다. 놀람이 아니라, 확인.
「어떻게 계산했소?」
「준비금이 새고, 전쟁 국채가 불었습니다. 누수에 이자. 끝입니다.」
잠깐 말을 끊었다.
「은 함량을 깎아 버티는 건, 배 밑판을 잘라서 불을 때는 겁니다. 오래 못 갑니다.」
루시엔이 나를 보았다. 값을 매기는 눈이 아니었다. 모르간과 달랐다. '같은 판을 보는 사람'을 확인하려는 눈.
「맞소. 제국의 금고는 이 영지보다 나을 게 없소.」
루시엔이 창가로 걸어갔다. 보슬비가 유리에 맺히고 있었다.
「대공이 주변 토지를 매입하고 있다는 건 알 테고.」
「석 달 전부터. 남부 물류 장악이 목적이겠죠.」
「그것만이라면 서두르지 않소.」
돌아보았다.
「은화의 은 함량이 내려가고 있소.」
「……대공은 그걸 알고 토지를 사재기하는 겁니까. 화폐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의 결정이오. 나는 반대했지만, 전쟁 부채가 너무 크다.」
'대공은 바보가 아니야. 경제를 읽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위험해.'
루시엔이 돌아섰다.
「결론을 말하겠소. 카르테시아를 재정 개혁의 시범 사례로 만들겠소. 성과가 나면, 귀족파의 반론을 막을 명분이 생기오.」
「그건 저에게 이익이 있습니까?」
「내 이름이 걸리면 대공이 함부로 못 움직이오. 최고장도 정지되오. 대신, 당신은 결과로 갚아야 하오.」
30일. 적월 14일. 그것이 멈춘다. 하지만 새 줄이 묶인다.
「전하. 저를 도구로 쓰실 겁니까, 협력자로 쓰실 겁니까?」
한 박자 멈췄다.
「모르간은 사람을 단기로 쓰지. 나는 국가 단위로 쓰오. ……당신이 버티면, 당신 자리는 '도구'가 아니게 되겠지.」
대답이 아니었다. 프레임을 바꾼 것이다.
'보호에도 가격표가 붙는다.'
「한 가지 더. 제 보고서 복사본을 구하셨죠.」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어떻게.」
「모르간 경이 보고서를 외투에 넣은 뒤, 즉시 당신의 시종이 움직였습니다. 사형장에서도 눈은 돌아갑니다.」
입꼬리가 아주 잠깐 올라갔다. 웃음이라기보다, 승인에 가까운 반응.
「그 정도로 압축하는 사람은 드물지.」
한 박자.
「……그래서 필요하오.」
인정과 동시에 회수. 이 남자의 패턴이었다.
「감사 현장에서 눈 돌아가는 건 기본입니다.」
*
루시엔이 떠나기 직전. 현관에서 발을 멈추고, 비에 젖은 영지를 돌아보았다. 갈라진 벽, 빈 분수대, 울타리만 세워진 시범구역.
손끝이 잠깐 문틀에 머물렀다. 시찰이 아니라, 놓치기 싫은 것을 보는 시선이었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호위 둘이 소리 없이 뒤를 따랐다.
루시엔이 떠난 후, 카일이 들어왔다.
「……황실 감사가 발동됩니다. 전하가 직접 오셨다는 건, 공식 발표가 뒤따른다는 뜻입니다.」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 있었�.
「그리고 이 방문은…… 며칠 안에 귀족파에 알려집니다.」
「그러면?」
「대공이 즉시 움직입니다. 황태자가 찍은 영지를 방치하면, 귀족파의 체면이 무너지니까요.」
보호인 동시에 신호탄. 대공에게 '여기가 전장'이라고 알리는.
'……공짜 방패는 없다.'
양피지를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안도가 아니라 긴장.
창밖으로 보슬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대공은 '가격'으로 올 것이다. 칼보다 조용하고, 피보다 효과적인 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