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예정 악녀로 빙의한 재무팀 과장,
제국 남주 3명이 그녀의 경제 능력에 집착한다
1화. 사형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목이 매달릴 밧줄의 굵기를 재며, 나는 생각했다.
'이 밧줄, 대량 구매면 단가 얼마나 깎을 수 있지?'
……아, 망했다. 나 아직 재무팀 과장 사고방식이야.
정확히 삼 초 전까지 나는 한서윤이었다. 서른둘, 대기업 재무팀 과장. 기업 회생과 구조조정이 업. 야근 칠일째에 모니터 앞에서 눈을 감았고―눈을 떴더니 밧줄이 보였다.
밧줄. 그것도 교수형용.
그리고 내 발아래, 수천 명의 군중이 썩은 과일을 던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이 몸의 기억이 쏟아졌다.
에스텔라 폰 카르테시아. 카르테시아 백작가 영애. 전직 사교계의 꽃이자, 현재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악녀'.
죄목―사기적 파산.
기억을 더듬어 영지를 훑었다. 빚이 자산의 서른 배―숨만 붙어 있는 시체 같은 영지.
'부채비율 3,000%급. 좀비 기업이잖아.'
문제는 파산이 곧 범죄인 세계라는 거다. 금고가 비면 사기고, 사기는 사형이다.
……아니, 잠깐. 장부를 조작한 건 에스텔라가 아니잖아.
기억을 뒤져보니, 이 여자는 숫자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치만 하다가 살림 전부를 집사에게 맡겼고, 집사는 돈을 빼돌리며 장부를 이중으로 꾸몄다. 터졌을 때 책임은 고스란히 영주 몫.
'재무팀 감사보고서에서 백 번은 본 패턴이야. 위가 모르면 아래가 해먹는 구조.'
불현듯 전생의 기억이 칼날처럼 스쳤다.
구조조정 마지막 날. 감사보고서를 올리고 나서, 경리 과장이 울던 얼굴. 횡령을 적발했고, 나는 보고서를 올렸고, 그 사람은 잘렸다. 아이 셋. 대출. 그해 겨울 뉴스에서 그 이름을 봤다.
'……나는 늘 숫자로 사람을 잘랐다.'
밧줄이 목을 죄는 감각이 기억을 끊었다. 지금은 감상할 때가 아니다.
「에스텔라 폰 카르테시아!」
집행관이 양피지를 펼쳤다.
「사기적 파산 혐의로, 제국법 제47조에 의거하여 교수형에 처한다!」
군중이 환호했다. 귀족의 몰락은 언제나 최고의 오락이니까.
누군가 던진 썩은 과일이 어깨를 스쳤다. 에스텔라의 기억이라면 이쯤에서 울며 무릎을 꿇었겠지. 아니면 끝까지 오만하게 저주를 내뱉었거나.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것이 올라왔다. 에스텔라의 감정―이 몸에 남은 잔재. 군중을 내려다보는 경멸, 세상에 대한 분노, 누군가의 목을 비틀고 싶은 충동.
'……이건 내 감정이 아니야.'
억눌렀다.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에스텔라의 독기가 등뼈를 세워주고, 목소리에 칼날을 실어주었다.
빌려 쓰자. 야근 칠일째에도 결산을 마감한 여자다. 밧줄 따위로 흔들릴 멘탈이 아니야.
입을 열었다.
「사기가 아닙니다.」
광장이 조용해졌다. 사형수가 반박하는 건 이례적인 모양이었다.
「금고가 일시적으로 마른 것뿐입니다. 자산은 건재합니다. 파산은 결과이지, 범죄가 아닙니다.」
집행관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사형대 위에서 금고 사정을 논하는 죄수는 제국 역사상 처음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진지했다. 살아남으려면, '파산'을 '회생'으로 바꿔야 한다. 빚쟁이에게 죽은 영지보다 살아 있는 영지가 이득이라는 걸 납득시키면 된다. 회사에서 수십 번 해본 일이잖아.
그때, 단상 왼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검은 예복에 은테 안경. 입꼬리가 아래로 굳은 얼굴. 관료 특유의 냉기가 온몸에서 풍겼다.
재무대신 모르간 경. 제국의 금고를 쥔 남자이자, 황제의 가장 날카로운 칼.
모르간이 집행관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집행이 멈췄다.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값을 매기듯' 훑었다. 사람을 보는 온기 같은 건 없었다. 세수를 계산하는 눈.
그리고 그 눈에는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이 남자가 사형수에게 말을 걸러 단상까지 올라왔다는 건, 제국 금고 사정이 사형수 한 명의 제안도 검토해야 할 만큼 절박하다는 뜻이다.
「목숨을 구걸할 기회를 주마.」
구걸. 의도적인 단어 선택이다. 나를 아래에 두겠다는 심리적 압박.
'……협상 테이블에서 매일 보던 기술이네.'
에스텔라의 잔재가 속에서 들끓었다. 구걸이라니. 이 몸의 자존심이 그 단어 하나에 불타올랐다.
억누르지 않았다. 방향을 틀었다. 에스텔라의 오만함을 일부러 꺼내 입었다. 허리를 펴고, 턱을 들었다. 사교계의 꽃이 군중 앞에서 고개 숙이는 일 따위는 없다는 식의 도도함.
「구걸이 아닙니다. 제안입니다, 모르간 경.」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흥미인지 짜증인지 모르겠지만, 대화의 문이 열렸다.
나는 감옥에서 손톱으로 긁어 정리한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 유서를 쓰라고 준 종이. 유서 대신 보고서를 썼다.
양피지를 모르간 쪽으로 던지듯 내밀었다.
「채무 3년 유예. 현물세의 상당분을 화폐로 전환. 직영지 수익 상승 전망. ―카르테시아 영지의 회생 계획서입니다.」
모르간이 양피지를 받아 훑었다. 시선이 숫자 위에서 멈추는 게 보였다. 3초. 5초.
그가 시선을 멈춘 곳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장 공을 들인 한 줄.
영지에 쌓인 현물세―밀, 양모, 목재―를 담보로 상단에 외상 거래를 트는 것이다. 상단은 물건을 받고, 영지는 당장의 현금 대신 '독점 거래권'을 받는다. 돈이 없어도 돈을 도는 것처럼 만드는 구조. 빈 금고에서 현금흐름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절 처형하시면, 영지는 폐허가 됩니다. 남은 자산은 빚쟁이들 사이에서 증발하겠죠. 빚진 자가 죽으면, 빚도 같이 묻히니까요.」
모르간이 양피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서?」
「하지만 저를 살려두시면, 영지는 세수를 생산합니다. 죽은 땅에서 세금은 나오지 않지만, 살아 있는 땅에서는 나옵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모르간 경. 당신에게 필요한 건 복수가 아니라 세수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걸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군중의 웅성거림마저 잦아들었다.
모르간이 양피지를 접었다.
「Cessio bonorum.」
심장이 뛰었다. 모든 재산을 넘기는 대신 목숨을 보전하는 법적 장치. 이 세계에도 있다니.
「카르테시아의 모든 자산을 양도하겠다는 뜻인가. 그러면서 영지를 살리겠다고?」
「아닙니다. 자산 양도는 시작점일 뿐입니다.」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밧줄이 목덜미를 스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산을 넘기되, 관리권은 유보합니다. 황실이 빚쟁이라면, 황실에 이익을 돌려드리는 게 맞죠. 단, 운영은 제가 합니다.」
'빚쟁이가 감시하되, 운영은 내가 한다. 회사에서 수십 번 짠 그 틀.'
「황실의 감독 하에, 제가 직접 영지를 재건하겠습니다. 3년 안에 흑자로 전환하지 못하면―」
나는 목에 걸린 밧줄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때 이걸 쓰셔도 됩니다.」
군중이 술렁였다. 모르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정말 미세하게 올라갔다.
「……대담하군.」
「대담한 게 아닙니다. 계산한 겁니다.」
사실이었다. 모르간이 이 자리에 온 이유, 집행을 멈춘 타이밍, 양피지를 끝까지 읽었다는 사실. 이 남자는 나를 죽이러 온 게 아니야. 가치를 확인하러 온 거다.
모르간이 나를 다시 한번 훑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착각하지 마라, 카르테시아.」
그의 눈이 밧줄을 가리켰다.
「이것은 유예가 아니라 목줄이다. 네 감정이든 자존심이든, 내 장부에는 적히지 않는 항목이야. 기억해 두어라.」
차갑고, 정확한 언어였다. 이 남자에게 나는 살린 사람이 아니라 굴리는 도구다. 감정은 예산 외 항목. 인간으로서의 무게는 제로.
'……좋아. 도구도 상관없어. 도구가 주인 손에서 빠져나가는 건, 도구의 가치가 주인을 넘어설 때니까.'
그 순간, 광장 맞은편 건물 3층 발코니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누군가 커튼을 젖히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후 햇살에 반사된 백금발.
황태자 루시엔 드 발렌티아. 제국의 후계자.
'……변수가 하나 더 있었네.'
모르간의 등 뒤에는 군복 차림의 거구가 서 있었다. 흑발에 상처투성이 피부. 팔짱을 끼고 나를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
기사단장 카일 베른하르트.
재무대신, 기사단장, 황태자. 사형수 하나 처리하는 데 이 급이 모였다?
'이건 단순한 처형이 아니었구나.'
카르테시아 영지의 파산은 귀족 하나의 몰락이 아니다. 황도와 남부 항구를 잇는 물류 요충지의 소멸. 그 자리를 삼키려는 대공 레오폴트의 야심. 견제하려는 황태자의 셈법. 그 모든 이해관계의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다.
'카르테시아 영지는 생각보다 가치가 있어.'
이유가 뭐든, 일단 살아남으면 된다.
모르간이 양피지를 외투 안쪽에 넣고 집행관을 향해 말했다.
「집행을 보류한다.」
군중이 술렁였다.
「보류 사유는?」
「재정 심의가 필요하다. 황실 재무부의 권한으로 90일간 집행을 유예한다.」
90일. 한 분기.
'재무팀 과장에게 한 분기면 손익을 뒤집을 수 있는 시간이다. 턱없이 부족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모르간이 나를 돌아보았다.
「90일이다, 카르테시아 백작.」
처음으로 사형수가 아닌 작위로 불렀다.
「흑자로 전환하지 못하면, 밧줄은 아직 여기 있다.」
「충분합니다.」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협상의 제1원칙은 상대의 조건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척하는 거다.
밧줄이 풀렸다. 목을 비비며 사형대를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에스텔라의 오만함이 무릎 꺾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이 부분만은 전직 악녀에게 고마웠다.
*
광장 위, 발코니.
황태자 루시엔은 커튼 너머로 사형대를 내려서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밧줄이 풀린 목을 비비면서도, 그녀의 눈은 이미 광장을 벗어나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군중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자산을 세는 눈이었다.
루시엔의 시선이 탁자 위 서류로 돌아갔다. 영지별 세수 추이, 마력석 준비금 현황, 은화의 은 함량 변동. 제국 재정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황제와 모르간, 그리고 자신뿐이다. 죽은 영지를 살려 세수를 짜낼 수 있다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 대공 레오폴트가 지난 석 달간 카르테시아 주변 토지를 조용히 매입하고 있다는 보고서. 대공이 남부 물류를 손에 쥐면, 황실의 재정 자립은 끝난다.
「……아까 그 보고서, 복사본을 구해.」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루시엔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광장을 빠져나가는 여자의 뒷모습.
「저 여자는 대공에게도, 재무대신에게도 넘기지 않는다.」
「……전하?」
루시엔이 커튼을 내렸다.
「필요해서다.」
한 박자 뒤, 낮게 덧붙였다.
「……빼앗기기 싫어서이기도 하고.」
시종은 고개를 더 깊이 숙일 뿐, 대답하지 못했다.
*
사형장을 빠져나오며 나는 생각했다.
텅 빈 금고, 횡령당한 장부, 적대적인 귀족, 불신하는 영지민. 90일.
그리고 한 가지. 장부를 넘기다 발견한 숫자 하나.
'마력석 준비금 항목. 수입은 있는데 지출 내역이 없어.'
있어야 할 돈이 없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영지를 무너뜨렸다.
카르테시아 영지의 금고는―텅 비어 있었다.
'이번에는 숫자로 사람을 자르는 게 아니라, 숫자로 사람을 살리자.'
주먹을 쥐었다. 밧줄 자국이 남은 목이 욱신거렸다.
'90일. 갚아줄게. 이 몸이 뒤집어쓴 죄,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