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파산은 협상이다
사형장에서 돌아온 나에게 주어진 건 독방이었다. 침대 하나, 양초 하나, 창문 없음.
'……전 직장 야근실보다는 넓다.'
하지만 문제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90일. 분기 결산도 빠듯한 시간에 파산 영지를 흑자로 전환하라니.
양초 불빛 아래에서 에스텔라의 기억을 뒤졌다. 파티 드레스 목록과 보석 카탈로그 사이에서, 다행히 영지 관련 기억이 파편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빚쟁이 명단.
손톱으로 감옥 벽에 긁기 시작했다. 종이도 펜도 없으니까.
카르테시아 영지의 빚쟁이는 크게 세 부류다.
하나, 황실. 밀린 세금과 마력석 준비금 미납분. 빚쟁이가 재판관을 겸하고 있다. 최악의 조합.
둘, 대공 레오폴트. 나를 사형대에 세운 장본인.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영지 자체다. 황도와 남부를 잇는 길목을 삼키려는 것.
셋, 상단. 에스텔라가 외상으로 쓴 사치품 대금. 금액은 작지만 가장 시끄럽다.
'빚쟁이가 셋이면, 싸움은 넷이다. 나까지 포함해서.'
핵심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다는 점. 황실은 세수를, 대공은 땅을, 상단은 당장의 현금을 원한다.
벽을 긁던 손톱이 부러졌다.
*
이틀 뒤, 모르간이 독방을 찾아왔다.
검은 예복은 여전했고, 은테 안경 너머의 시선도 여전히 차가웠다. 달라진 점이라면 손에 양피지 뭉치가 들려 있다는 것.
「벽에 장부를 긁었다고 들었다.」
나는 벽 쪽을 가리켰다.
「종이를 안 주시길래요.」
모르간이 벽을 훑었다. 그의 눈이 빚쟁이 분류 기준에서 멈추는 게 보였다. 나는 금액 순이 아니라 '회수 긴급도'와 '협상 여지'라는 두 축으로 분류해뒀다.
「……독특한 분류법이군.」
「금액 순으로 줄 세우면, 큰 빚부터 달래야 한다는 함정에 빠집니다. 중요한 건 누가 급하고, 누가 기다릴 수 있느냐입니다.」
모르간이 양피지 뭉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카르테시아 영지의 공식 장부 사본.
「네 보고서를 검토했다.」
심장이 한 박자 빨라졌다. 버리지 않고 검토했다.
「숫자에는 결함이 없었다. 문제는 전제다.」
「전제요?」
모르간이 양피지 한 장을 탁자 위로 밀었다. 영지의 최근 인구 조사표였다.
「직영지 수익 상승을 전제로 했는데, 현재 영지에 농민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확인했나?」
표를 훑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확인 못 했다.
감옥에서 기억에만 의존해 쓴 보고서의 한계. 에스텔라의 기억에는 농민의 수 같은 건 없었다. 이 여자에게 영지민은 숫자가 아니라 풍경이었으니까.
「영지민의 이탈률이 60%를 넘는다.」
60%. 일하는 사람의 절반 이상이 사라진 영지. 빈 공장에서 매출을 약속한 셈이다.
전생에서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다. 현장 실사 없이 보고서를 올리는 건 재무팀 1년차도 안 하는 짓인데.
'……밧줄 앞에서도 계산했다고 큰소리쳤으면서. 전제가 틀리면 계산이 무슨 소용이야, 한서윤.'
모르간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내 당혹스러운 표정을 읽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사형대에서 보인 자신감은, 무지 위에 세운 자신감이었던 건가.」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정확히 아픈 곳을 찌른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지면 끝이다. 틀렸으면 인정하고, 수정하면 된다. 재무팀 과장이 하는 일이 그거잖아.
「맞습니다. 전제가 틀렸습니다.」
모르간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사형수가 자기 실수를 인정하는 것도 이례적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세 단계를 수정합니다.」
「첫째, 빚의 우선순위를 바꿉니다. 황실 채무를 먼저 갚는 순서로 정하고, 대공의 것은 뒤로 밀어냅니다.」
「이유는?」
「황실이 먼저 받는 위치가 되면, 영지를 존속시키는 것이 황실의 이익이 됩니다. 대공이 영지를 삼키려 해도 황실이 막겠죠.」
모르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양피지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둘째, 영지 안의 자산을 다시 평가합니다. 장부에 잡히지 않은 재산이 있을 겁니다.」
「근거는?」
「마력석 준비금입니다.」
모르간의 펜이 멈췄다.
「장부에 마력석 준비금의 수입은 있는데, 지출 내역이 없습니다. 그 돈은 어디로 갔습니까?」
침묵. 모르간의 눈이 좁아졌다. 놀람이 아니라 경계의 표정.
'이 남자, 마력석 준비금 이상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냐?'
「……셋째는?」
질문을 회피했다. 예상대로. 지금 파고들 때가 아니다.
「셋째, 영지에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합니다. 장부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창고를 열고, 토지를 밟고, 사람을 만나봐야 합니다.」
모르간이 펜을 내려놓았다.
「감옥에서 나가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직접 보지 않고 살리겠다는 건 탁상 계획입니다. 그리고 탁상 계획의 전제가 틀린다는 건, 방금 모르간 경이 증명해 주셨죠.」
모르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음인지 경멸인지 구별이 안 됐다.
「감시를 붙이겠다.」
「누구를요?」
「기사단장 카일 베른하르트.」
사형장에서 봤던 흑발의 거구.
「기사단장을 감시역으로요? 좀 과하지 않습니까?」
「과한 게 아니라 적절한 것이다. 네가 도주하면, 책임은 내가 진다.」
모르간이 일어섰다.
「내일 아침 영지로 출발한다. 준비해라.」
문이 닫혔다.
*
다음 날 새벽, 감옥 앞.
안개가 자욱한 거리에 마차 한 대가 서 있었고, 그 옆에 카일 베른하르트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컸다. 왼쪽 눈썹 위를 가로지르는 오래된 칼자국. 검 자루를 잡았던 손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카일 베른하르트 기사단장입니다.」
짧았다. 직급과 이름. 끝.
「에스텔라 폰 카르테시아입니다. 신세를 지겠습니다.」
「신세가 아닙니다. 감시입니다.」
'……포장이라는 개념이 없어.'
마차에 올라탔다. 카일은 맞은편에 앉았는데, 그의 체격 때문에 마차 안이 절반으로 줄어든 느낌이었다.
「영지까지 이틀 걸립니다.」
「네.」
「도주 시 즉결 체포합니다.」
「네.」
「……그 외에 할 말이 있습니까.」
그가 불편한 듯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대화가 서툰 사람이다.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기사단장님.」
「……말하십시오.」
「기사단의 현재 군량미 보급 상황은 어떻습니까?」
카일이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 그걸 묻습니까.」
「핵심 전력인 단장을 빼서 죄수 감시에 쓴다? 합리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모르간 경이 기사단장님을 보낸 건 저를 감시하려는 게 아니라, 기사단 보급 문제를 풀 실마리를 찾으려는 겁니다. 카르테시아 영지가 정상화되면 남부 물류가 회복되고, 군량미 조달 비용이 줄어드니까요.」
침묵이 흘렀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황도의 성문을 빠져나갔다.
「……당신.」
「네.」
「겁은 없습니까.」
「겁은 사치입니다, 기사단장님. 지금은 사치를 부릴 형편이 못 돼요.」
카일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창밖을 보았다.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경멸은 빠져 있었다.
*
이틀 후. 카르테시아 영지.
마차가 영지 경계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이해했다.
길이 없었다. 포석은 뜯겨 나가고, 수레바퀴 자국 위로 잡초가 허리까지 차 있었다.
그리고 길 옆에, 사람이 있었다.
한 여자가 마른 밭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무릎에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아이의 볼이 움푹 꺼져 있었다. 여자가 흙 위에서 뭔가를 주워 아이 입에 넣었다. 풀뿌리였다.
조금 더 가니 노인 둘이 수레에 가재도구를 싣고 있었다. 영지를 떠나는 얼굴이었다. 마차를 본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텅 빈 체념만 있었다.
'……이게 60%의 의미야.'
장부에서 본 숫자와는 다른 무게였다. 숫자는 가볍다. 하지만 풀뿌리를 먹는 아이의 볼은 가볍지 않다.
전생이 떠올랐다. 구조조정 보고서에 '인력 이탈률 47%'라고 적었다. 47%는 숫자였다. 사무실 복도에서 짐을 싸는 직원들의 얼굴을 보면서도 나는 보고서의 정합성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르게 해야 한다.'
마차가 영지 본관 앞에 멈췄다. 벽에 금이 가고, 정원은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분수대에는 물 대신 낙엽이 쌓여 있었다.
카일이 마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경비가 없습니다.」
「경비에게 줄 돈이 없으니까요.」
본관 문을 열었다. 먼지가 쏟아졌다. 에스텔라의 기억 속 화려한 샹들리에는 어디에도 없었다. 팔린 거겠지.
집무실로 향했다. 금고가 있는 방.
금고문이 열려 있었다. 문이 열려 있다는 건, 잠글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잠글 필요가 없다는 건―
텅 비어 있다는 뜻이다.
금고 안에는 동전 한 닢 대신, 장부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펼쳤다.
한 권의 장부 안에 두 개의 기록이 있었다. 앞부분은 깔끔한 필체의 공식 기록. 뒷부분은 다른 필체로 끼적인 메모들.
'이중 장부.'
수입과 지출이 맞지 않았다. 들어온 돈은 적혀 있는데 나간 내역이 없거나, 있어야 할 재산이 사라져 있었다.
「이 장부, 수입과 지출이 맞지 않습니다.」
카일이 내 어깨 너머로 장부를 보았다.
「무슨 뜻입니까.」
장부를 덮었다.
「누군가 돈을 빼돌렸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아주 체계적으로.」
카일의 표정이 굳었다.
「누가.」
「이 필체를 쓴 사람이요. 전 집사일 겁니다.」
에스텔라의 기억을 뒤졌다. 집사의 이름, 얼굴. 그런데 기억이 흐릿했다. 다른 하인들은 선명한데, 집사에 대한 기억만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다.
'……기억이 의도적으로 지워진 건가?'
본관 입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구부정한 허리, 해진 옷. 영지에 남은 하인이었다.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집사님은…… 한 달 전에 사라지셨습니다. 금고 열쇠와 함께.」
금고 열쇠. 이중 장부. 사라진 집사.
이건 단순 횡령이 아니야. 누군가 짜놓은 각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