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가 먼저 깨어났다.
왼손목 안쪽, 길이 삼 센티미터. 봉합 자국으로 보아 수술 흔적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것이 넉 달 전이었다. 원인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말 몰랐다. 다만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그 흉터가 욱신거리며 무언가를 상기시키려 했고, 하은은 떠올릴 수 없는 기억의 잔해 앞에서 이를 악물곤 했다.
오후 두 시. 서가 사이로 먼지가 떠다녔다. 느리게, 아무런 목적 없이. 서하은은 반납된 책 더미에서 한 권을 집어 바코드를 찍었다. 삐, 하는 짧은 전자음이 조용한 도서관 안에서 유난히 또렷하게 울렸다.
흉터를 엄지로 한 번 쓸었다. 매끄러운 피부 위로 미세하게 솟은 결이 손끝에 걸렸다. 이 감촉을 확인하는 것이 하루의 의식처럼 굳어져 있었다.
"서 선생님, 이거 어디 꽂아요?"
아르바이트생 수빈이 두꺼운 양장본을 들고 왔다. 표지에 뇌신경 해부도가 인쇄되어 있었다. 하은의 시선이 잠깐 그 위에 머물렀다. 뇌의 단면도. 시냅스를 연결하는 선들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익숙한 이미지였다. 어디서 봤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의학 서가. 611번대."
"아, 맞다. 감사합니다."
수빈이 돌아서자 하은은 다시 반납 도서를 분류하기 시작했다. 문학, 역사, 철학. 한 권씩 제자리를 찾아주는 단순한 반복.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팔 개월째였다. 이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이력서에는 프리랜서 에디터라고 적었다. 거짓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책장 사이를 걸으며 하은은 창밖을 보았다. 캠퍼스의 은행나무가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바람이 불면 잎사귀들이 한꺼번에 뒤집히며 은색 배를 드러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너무 평화로워서, 가끔 이상한 기분이 들곤 했다.
뭔가 빠져 있다는 느낌.
퍼즐 한 조각이 사라진 액자 같은. 완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손가락을 대면 빈 곳이 만져지는 그런 종류의 결핍.
"선생님, 점심 드셨어요?"
수빈이 다시 카운터 앞에 나타났다. 손에 편의점 삼각김밥 두 개를 들고 있었다.
"괜찮아. 나중에 먹을게."
"또요? 어제도 안 드셨잖아요."
하은이 고개를 들었다. 수빈의 표정에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 스물한 살, 경영학과 2학년.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석 달 된 아이. 하은은 삼각김밥 하나를 받아 들며 입꼬리를 올렸다.
"고마워."
비닐을 뜯었다. 참치마요. 짠맛이 혀끝에 번졌다. 커피는 블랙으로만 마시면서 이런 건 거부감 없이 먹는 자신이 묘하게 느껴졌다.
"선생님, 혹시 기자 하셨던 적 있어요?"
하은의 손이 멈췄다. 입안의 밥알을 천천히 씹었다.
"왜?"
"아니, 그냥 가끔 보면 뭔가 캐는 느낌이 들어서요. 책 정리하실 때도 분류 체계를 혼자 재설계하시잖아요. 기존 시스템이 비효율적이라면서."
하은이 삼각김밥을 내려놓았다.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귀 뒤를 향했다. 그곳에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손끝이 맨살에 닿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타투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런데 왜 자꾸 그 자리를 만지는 걸까.
"글쎄. 기억이 잘 안 나."
수빈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착한 아이다. 하은은 나머지 김밥을 마저 먹고 손을 닦았다. 손등에 밥풀이 하나 붙어 있었다. 그것을 떼어내는 동안 도서관 자동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남자였다. 키가 컸다. 흰색 셔츠에 청바지. 손에 캔버스 토트백을 들고 있었고, 가방에서 책 한 권의 모서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하은의 시선이 남자의 오른손에 닿았다. 긴 손가락. 검지와 중지 사이에 펜을 끼우는 습관이 보였다. 실제로 끼워져 있지는 않았지만 두 손가락 사이의 간격이 무언가를 끼운 채로 굳어진 형태였다.
가슴 한가운데가 조여들었다. 이유를 모르겠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분명히 모르는 사람인데, 저 걸음걸이. 왼발을 살짝 끌듯이 디디는 보폭. 어깨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인 자세.
"저기요."
남자가 카운터 앞에 섰다. 수빈이 먼저 응대하려 했지만 하은이 한 발 앞서 카운터로 다가갔다. 왜 그랬는지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네, 도와드릴까요?"
목소리가 반음 올라갔다. 하은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입술을 다물었다.
남자가 토트백에서 책을 꺼냈다. 신경외과학 개론. 낡은 표지의 모서리가 접혀 있었고 책등에는 대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이 도서관 소장본이다.
"반납하러 왔습니다. 좀 늦었는데."
하은이 책을 받아 들었다. 손가락이 닿을 뻔했다. 닿지 않았다. 바코드를 찍자 화면에 연체 정보가 떴다. 십사일 연체. 벌금은 이천팔백 원.
"연체료가 있으시네요."
"아, 죄송합니다. 바로 낼게요."
남자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오른손 엄지로 카드 칸을 밀어 올리는 동작. 하은의 눈이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 목 안쪽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남자가 물었다. 하은이 자신의 얼굴 표정을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왼손이 카운터를 짚고 있었고,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손톱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네. 괜찮아요."
카드를 받아 단말기에 대었다. 결제 완료. 영수증을 출력하는 동안 남자가 도서관 내부를 둘러보았다. 시선이 창가 열람석에 머물렀다. 햇살이 가장 잘 드는 자리.
"저 자리, 비어 있으면 앉아도 될까요?"
"네, 자유석이에요."
남자가 가방을 들고 창가로 걸어갔다. 하은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카운터 위에 영수증이 남아 있었다. 이름. 윤재하.
글자가 눈에 박혔다. 윤. 재. 하. 세 글자를 읽는 데 삼 초가 걸렸다. 한 자씩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낯선 이름이었다. 그런데 혀에 익었다. 수백 번 불러본 적 있는 것처럼.
왼손목의 흉터가 욱신거렸다.
"선생님?"
수빈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하은은 영수증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버려야 할 종이를. 보관하고 싶었다.
오후의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하은은 서가 정리를 하면서 창가 쪽을 몇 번이나 흘깃거렸다. 윤재하는 노트북을 펴고 무언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가끔 오른손을 뻗어 커피잔을 들었다. 블랙커피. 향이 서가까지 희미하게 날아왔다.
책을 꽂다가 하은은 한 권의 등에서 손을 멈추었다. 파란색 표지. 《영혼의 지도》.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읽었다. 표지를 넘기면 첫 페이지에 누군가의 메모가 적혀 있을 것 같았다.
펼쳤다. 빈 페이지였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하은은 책을 서가에 밀어 넣고 이마를 선반에 기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피부에 닿았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깨의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여섯 시가 되자 폐관 안내 방송이 울렸다. 수빈이 먼저 퇴근했고, 하은은 컴퓨터를 끄고 카운터를 정리했다. 창가를 보았다. 남자가 아직 앉아 있었다.
"저기, 폐관 시간이에요."
하은이 다가가며 말했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노을빛이 얼굴 한쪽을 물들이고 있었다. 눈 아래 그림자가 깊었다. 밤을 새운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요."
노트북을 닫으며 남자가 일어섰다. 가방을 챙기다가 볼펜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하은이 먼저 주웠다. 파란색 볼펜. 뚜껑이 씹혀서 자국이 나 있었다.
건네는 순간 손가락이 닿았다. 남자의 손끝이 차가웠다. 그런데 그 차가움이 익숙했다. 겨울에 장갑 없이 돌아다니던 누군가의 손. 하은이 그 손을 잡아 호주머니에 넣어주던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없는데.
"감사합니다."
남자가 볼펜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혹시."
하은이 입을 열었다. 말이 먼저 나왔다. 생각보다 빠르게.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남자가 멈칫했다. 하은을 바라보는 눈이 잠깐 흔들렸다. 일 초도 되지 않는 찰나였지만 하은은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관찰하는 습관. 어디서 배운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 능력.
"글쎄요. 저도 좀 그런 느낌이 드는데."
남자가 웃었다. 왼쪽 볼에만 보조개가 하나 잡혔다.
"윤재하라고 합니다. 이번 학기에 의대 쪽 연구실 배정받아서 자주 올 것 같은데, 잘 부탁드려요."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로.
"서하은이에요. 이쪽 사서 담당이고요."
두 사람이 나란히 도서관을 나섰다. 저녁 바람이 불었다. 은행나무 잎사귀가 흔들리며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은은 계단을 내려가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노을이 보라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하은 씨."
재하가 불렀다. 하은의 발이 멈추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것이 흘러내렸다. 이름 석 자가 그의 음성에 실려 고막을 울리는 순간, 몸이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익숙한 호칭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마치 잠겨 있어야 할 문이 안에서 열리는 것 같은 불쾌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돌아보았다. 재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얼굴이었다.
"다음에 커피 한잔 사도 될까요? 연체료 사과 겸."
하은은 떨리는 손을 주머니 안에 숨겼다. 목소리를 평탄하게 고르는 데 두 박자가 필요했다.
"이천팔백 원짜리 사과치고 과하네요."
"원래 빚은 크게 갚는 게 맞죠."
하은이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주머니 속에서 접힌 영수증이 손끝에 걸렸다. 이름 석 자가 적힌 종이. 버리지 못할 것 같았다.
"좋아요. 그럼 다음에."
재하가 손을 흔들며 반대편 길로 걸어갔다. 하은은 그 뒷모습이 가로등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왼발을 살짝 끄는 걸음. 오른쪽으로 기운 어깨.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잔상이 남았다.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캠퍼스 벤치 앞을 지나가는 학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뿔테 안경. 체크무늬 셔츠에 캔버스 백팩.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대학생의 차림새.
하은의 발이 멈추었다.
여자였다. 숱이 많은 단발머리. 걸음이 빨랐다. 벤치를 지나 도서관 뒤편 골목으로 접어들기 직전, 여자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하은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 초도 되지 않는 접촉. 여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알아본 것처럼.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왼손목의 흉터가 다시 욱신거렸다. 이번에는 열기를 동반한 통증이었다. 하은은 손목을 움켜쥐었다. 흉터 위로 핏줄이 푸르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여자는 이미 골목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하은은 주머니에서 영수증을 꺼내 펼쳤다. 윤재하라는 이름 아래, 아까는 없었던 글씨가 영수증 하단에 찍혀 있었다.
'611-세진'.
하은의 손가락이 그 글씨 위를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