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여자가 홀로그램 위에 손을 얹었다.
재하의 몸 안에 남아 있던 온기가 아직 하은의 손바닥에 배어 있었다. 그 잔열을 느끼면서, 하은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존재를 똑바로 바라봤다.
미래의 자신.
주름이 깊게 팬 눈가. 왼쪽 관자놀이를 가로지르는 흉터. 귀 뒤의 타투는 빛을 잃고 잿빛으로 바래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는 달랐다. 이건 자신이 될 수 있는, 혹은 이미 되어버린 한 가지 가능성이었다.
"영혼 전이 기술을 완전히 폐기하려면."
미래의 하은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오래 울었거나, 오래 침묵했거나.
"현존하는 모든 '정수'가 담긴 매개체를 소멸시켜야 해."
"매개체라면 장비를 말하는 거죠?"
하은의 물음에 미래의 자신이 고개를 저었다. 느리게. 한 번.
"너와 재하야."
요새의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아니, 원래 차가웠을 것이다. 하은의 피부가 비로소 그 온도를 감지한 것뿐이었다. 콘크리트 벽면에 맺힌 수분이 형광등 빛에 번들거렸고, 어딘가에서 환기 팬이 낮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2012년 대각성. 그때 태어난 돌연변이들의 신경 구조 자체가 영혼 직조의 앵커 포인트로 기능해."
미래의 하은이 홀로그램을 손끝으로 밀었다. 화면 위로 뇌파 그래프와 유전자 지도가 겹쳐 떠올랐다.
"너의 영혼 파장 시각화 능력, 그건 단순한 돌연변이가 아니야. 아버지가 설계한 시스템의 기저 코드 그 자체지. 너와 재하가 존재하는 한, 누군가는 반드시 이 기술을 복원해."
하은의 시선이 홀로그램 위를 훑었다. 두 사람의 파장이 겹쳐진 자리마다 붉은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하은의 청록색 파장과 재하의 것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경고등처럼 붉게 깜빡이는 빛. 아버지의 연구 노트에서 봤던 도식과 정확히 일치하는 배열이었다.
주머니 안에서 외장 하드의 모서리가 허벅지를 눌렀다. 세진이 목숨 값으로 건네준 데이터. 소울코인 거래 내역뿐 아니라 영혼 직조 기술의 핵심 알고리즘이 담겨 있다는 걸 하은은 지금에서야 이해했다. 이 하드 자체가 복원의 열쇠이자 폐기의 도화선이었다.
"소멸이라는 건…"
하은이 외장 하드를 주머니에서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금속 표면에 형광등 빛이 미끄러졌다.
"죽는다는 뜻이에요?"
"육체는 남아. 하지만 영혼은 소거돼. 기억도, 감정도, 너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파장이."
미래의 하은이 한 발 다가왔다. 낡은 군화 밑창이 콘크리트 바닥을 긁었다.
"재하의 몸 안에 남아 있는 잔류 사념도 마찬가지야. 역회전 코드를 실행하면 강준혁의 영혼뿐 아니라, 재하의 흔적까지 완전히 사라져."
하은의 손가락이 외장 하드를 쥔 채 미세하게 떨렸다. 엄지손톱이 금속 표면에 반달 자국을 남겼다. 재하의 흔적. 그의 웃음, 그의 습관, 새벽에 반복 재생하던 음성 메시지 속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우주에서 삭제된다.
"다른 방법은요."
"없어."
미래의 하은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 안쪽에 화상 자국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삼십 년을 찾았어. 다른 방법을. 이 흉터들이 그 삼십 년의 목록이야."
하은은 그 화상 자국들을 하나하나 세었다. 열일곱 개. 열일곱 번의 시도, 열일곱 번의 실패.
"그래서 과거로 온 거군요."
"마지막 시도야."
침묵이 내려앉았다. 환기 팬 소리만 공간을 채웠다. 하은은 벽에 기대 천장을 올려다봤다. 콘크리트 천장에 균열이 갈라져 있었고, 그 틈새로 지하수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물방울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작은 원이 퍼졌다가 사라졌다.
재하라면 뭐라고 했을까.
위험한 걸 알면서도 왜 혼자 파고드느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전화 속 목소리가 귓속에서 재생됐다. 그날 전화를 받았더라면. 함께 있었더라면.
하은의 왼손이 귀 뒤 타투를 더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잿빛으로 바랜 미래의 자신의 타투와 달리, 하은의 것은 아직 미약하게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재하한테 말해야 해요."
"알고 있어."
미래의 하은이 요새 안쪽의 철문을 가리켰다.
"거기 있어. 깨어난 지 한 시간째야."
하은이 철문 앞에 섰을 때, 손잡이를 잡기까지 여덟 초가 걸렸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닿았고, 녹슨 경첩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좁은 방이었다. 간이침대 하나, 접이식 의자 하나, 벽에 걸린 수액 팩 하나. 재하의 몸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재하의 얼굴을 한 남자가.
하은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영혼 파장. 강준혁의 어두운 자줏빛 파장 위로 재하의 청록색 파장이 실처럼 얽혀 있었다. 지난밤보다 청록색이 짙어져 있었다. 기억 역류가 가속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재하의 눈이었다. 눈동자 깊은 곳에 서린 경계심은 강준혁의 것이었다.
"왔어?"
목소리는 재하의 것이었다. 하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주먹을 쥐어 감췄다.
"상태는 어때요."
"머릿속이 시끄러워. 두 사람분의 기억이 동시에 재생되는 기분이야."
남자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재하의 오른손잡이 습관 그대로.
"레테 주사를 맞지 않은 지 이틀째예요. 기억 역류가 심해질 거예요."
"알아.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
남자가 하은을 올려다봤다.
"네 목소리를 들으면 역류가 아니라 하나로 합쳐지는 느낌이 들어. 마치 원래부터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하은의 입술이 굳었다. 영혼 공명. 그것이 만들어내는 환상. 재하의 감정이 강준혁의 의식 위로 떠오르면서, 이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할 얘기가 있어요."
하은이 접이식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의자 다리가 콘크리트 바닥을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영혼 전이 기술을 완전히 없애는 방법을 찾았어요."
"좋은 소식이잖아."
"대가가 있어요."
하은이 외장 하드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금속 표면에 남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재하의 얼굴이.
"우리 둘의 영혼을 소거해야 해요. 기억도, 감정도, 존재의 모든 파장을."
남자의 손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 손등에 수액 바늘이 꽂혀 있었고, 투명한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네가 사라진다는 뜻이야?"
"당신도요. 재하의 흔적도."
긴 침묵이 흘렀다. 수액 팩에서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하은은 남자의 영혼 파장을 지켜봤다. 자줏빛과 청록빛이 뒤엉키며 요동치고 있었다.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강준혁인지 윤재하인지도 모르겠는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재하의 길고 마른 손가락이 이마를 가렸다.
"그런 나한테 이런 선택을 맡기는 거야?"
"맡기는 게 아니에요."
하은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한 걸음 다가가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수액 바늘 옆, 맥박이 뛰는 자리. 피부 아래로 혈관이 푸르게 비쳤다.
"같이 선택하자는 거예요."
남자의 손이 떨렸다. 하은의 손도. 두 사람의 떨림이 맞닿은 손목을 통해 하나로 섞였다.
문이 열렸다. 정세진이었다. 왼팔에 감긴 붕대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걸음은 단단했다. 오른손에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세진이 태블릿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화면에 실시간 위성 지도가 떠 있었다. 붉은 점 수십 개가 요새를 향해 수렴하고 있었다.
"영혼관리국이 위치를 잡았어. 오민준이 직접 움직이고 있어. 도착까지 사십 분."
세진이 태블릿 위에서 두 손가락을 벌려 지도를 확대했다. 붉은 점들의 이동 경로가 선명해졌다.
"여기서 역회전 코드를 실행하려면 삼십 분이 필요해. 여유는 열 분뿐이야."
하은이 세진을 돌아봤다. 세진의 눈 밑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코드 준비는?"
"외장 하드에서 알고리즘을 추출해 뒀어. 나머지는 네 타투의 앵커 주파수와 동기화하면 돼."
세진이 주머니에서 케이블을 꺼내 외장 하드에 연결했다. 태블릿 화면이 전환되며 코드 시퀀스가 쏟아졌다. 검은 바탕 위로 녹색 문자들이 흘러내렸다. 세진의 손가락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하은은 창문 없는 벽을 바라봤다. 콘크리트 너머 어딘가에서 서울이 숨 쉬고 있을 것이다. 한남동, 성수동, 명동. 자신이 걸어 다녔던 거리들. 재하와 함께 걸었던 길들.
"내가 너를 잊어도."
남자가 말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하은 옆에 섰다. 재하의 키, 재하의 체온. 눈빛 안에는 두 사람의 영혼이 공존하고 있었다.
"우주는 우리의 흔적을 기억할 거야."
하은의 코끝이 시큰거렸다. 삼키듯 숨을 들이마셨다. 재하의 마지막 음성 메시지. 새벽마다 이불을 움켜쥐고 반복 재생하던 그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된다.
"해요."
하은이 말했다. 목소리가 반음 올라간 것을 스스로 알아차렸지만, 이번에는 감추지 않았다.
"해요. 지금."
세진이 코드 시퀀스의 마지막 줄을 입력하고 고개를 들었다. 태블릿 화면에 '역회전 준비 완료'가 떠 있었다.
"앵커 동기화를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어."
"알아요."
하은이 외장 하드를 집어 들었다. 금속 표면이 손바닥의 열기를 빨아들였다. 세진이 케이블의 다른 한쪽 끝을 하은에게 건넸다. 하은이 귀 뒤 타투 위에 단자를 가져다 댔다. 접촉 순간, 타투가 선명한 청색으로 빛났다.
남자가 하은의 빈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끼워졌다. 재하가 늘 그랬던 방식. 약지와 새끼손가락 사이로 엄지를 밀어 넣는, 그만의 손잡기.
하은의 눈에 남자의 영혼 파장이 보였다. 자줏빛이 엷어지고 있었다. 청록빛이 남자의 윤곽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재하가 돌아오고 있었다. 아니, 마지막으로 빛나고 있었다.
세진이 문 앞으로 이동해 복도를 살폈다. 먼 곳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십 분이 아니었다. 관리국이 예상보다 빨랐다.
"서둘러."
세진이 문을 닫고 안쪽에서 잠금 레버를 내렸다.
하은이 태블릿 위에 손을 얹었다. 재하의 손이—남자의 손이—하은의 손등 위에 겹쳐졌다.
"같이."
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엔터 키 위로 두 사람의 손가락이 나란히 내려갔다.
코드가 실행됐다.
요새 전체가 진동했다. 천장의 형광등이 터지듯 꺼졌다. 태블릿 화면이 검어졌다. 세진이 들고 있던 통신기기가 죽었다. 방 안을 채운 것은 어둠이 아니었다. 타투에서 뻗어 나온 하얀 빛이 벽을, 천장을, 콘크리트 균열 사이사이를 타고 퍼져나갔다.
하은은 남자의 손을 쥔 채 빛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세진이 창 없는 벽을 두드렸다. 벽 너머에서 전자 장비가 일제히 꺼지는 묵직한 소리가 연쇄적으로 울렸다. 서울 전역의 신호등이, 전광판이, 지하철 모니터가.
하얀 빛이 철문의 틈새를 뚫고 복도로, 계단으로, 지상으로 솟구쳤다.
그 빛 속에서 세진의 태블릿이 한 번 깜빡였다. 죽었던 화면 위로 단 한 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영혼 직조 프로토콜: 역회전 불가. 상위 코드 감지됨—발신자: 윤재하.'
세진이 태블릿을 하은 쪽으로 돌려 화면을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