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로 차가운 새벽 공기가 밀려들었다.
콘크리트 분진이 안개처럼 떠다니는 통로 끝, 서하은은 등에 업힌 사람의 무게를 양 어깨로 고쳐 받쳤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깊숙이 석분 냄새가 박혔다. 시야 전체가 회색이었다. 어디가 벽이고 어디가 바닥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한 발. 또 한 발.
무릎이 꺾이려 할 때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호흡이 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재하의 몸은 살아 있다. 아직 따뜻하다. 그 체온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천장에서 철근이 삐걱거리며 흔들렸다. 하은은 몸을 낮추고 오른쪽 벽면을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 균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닿았다. 바깥이 가깝다.
"여기야."
목소리가 아니라 입술만 움직였다. 등 위의 사람에게 말한 건지, 자신에게 말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균열을 따라 몸을 비틀어 넣자 콘크리트 조각이 양쪽 팔뚝을 긁었다. 피부가 쓸린 감각보다 재하의 몸이 틈에 걸리지 않도록 각도를 맞추는 것이 먼저였다.
철골 하나가 머리 위로 기울었다. 하은은 왼손으로 그것을 밀어 올리며 몸을 빼냈다. 손바닥에 녹슨 금속의 날이 파고들었으나 놓지 않았다. 재하의 머리가 철골 아래를 무사히 빠져나온 뒤에야 손을 펴 보았다. 피가 손금을 따라 흘렀다.
마지막 잔해를 넘자 하늘이 열렸다.
동쪽 수평선이 옅은 회보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폭발로 갈라진 아스팔트 위에 이슬이 맺혀 있었고,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울었다. 하은은 무릎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등에서 미끄러진 재하의 몸이 품 안으로 쓰러졌다.
연기 냄새가 머리카락에, 옷에, 피부 속까지 배어 있었다. 하은은 재하의 상체를 자신의 무릎 위에 눕혔다. 얼굴에 묻은 분진을 소매로 닦아내자 낯익은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눈은 감겨 있었다. 입술이 약간 벌어져 있었고, 미약하지만 호흡이 이어지고 있었다.
"세진 언니."
하은은 통신기를 켰다. 잡음 사이로 끊긴 신호음만 돌아왔다. 두 번째 시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버튼을 누르려는데, 폐허 오른편에서 콘크리트 조각을 밀어내는 소리가 났다.
잔해 틈으로 먼지투성이의 팔 하나가 삐져나왔다. 하은은 재하의 몸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일어섰다. 다가가서 콘크리트 조각 두 개를 걷어내자 세진이 기어 나왔다. 왼쪽 이마에서 피가 흘러 눈꺼풀까지 내려와 있었다. 전술 조끼 왼쪽 어깨판이 뜯겨 나가 있었고, 허리춤에 꽂혀 있어야 할 보조 권총의 홀스터는 비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에 감긴 응급 지혈대가 먼지 아래로 검붉게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오른손에는 클리닉의 메인 서버에서 빼낸 외장 하드가 꽉 쥐어져 있었다.
세진의 등 뒤로 보이는 잔해 사이에 부러진 소총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개머리판이 반으로 쪼개져 있었고, 총열이 휘어진 채 콘크리트 더미에 박혀 있었다. 그 옆으로 탄피 서너 개가 분진 위에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와 교전한 흔적이 분명했다.
"데이터는 확보했어."
세진은 그 말을 먼저 하고 나서야 무릎을 짚고 바닥에 앉았다. 하은이 자기 셔츠 소매를 찢어 세진의 이마에 대자, 세진이 고개를 저었다.
"나보다 재하 씨 먼저."
"언니가 피를 더 흘리고 있어."
"겉으로 보이는 피가 위험한 게 아니야. 이 정도는 압박이면 돼."
세진은 직접 천 조각을 받아 이마에 눌렀다. 다른 손으로는 여전히 외장 하드를 놓지 않았다. 그 안에 그림자 이사회의 영혼 전이 기록이 전부 들어 있었다.
하은은 다시 재하에게로 돌아갔다.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새벽빛이 그의 윤곽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던가. 병원 영안실의 차가운 조명 아래, 유리 너머로 바라보던 그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겹쳤다.
손을 뻗었다. 검지와 중지가 그의 이마에 닿았다. 미세한 체온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이마에서 관자놀이로, 관자놀이에서 광대뼈로, 광대뼈에서 턱선으로 손가락이 내려갔다. 먼지와 땀과 미세한 핏자국 아래 남아 있는 피부의 결이 익숙했다.
"재하야."
입 밖으로 나온 이름이 새벽 공기에 부서졌다. 대답은 없었다. 바람이 폐허 사이를 지나며 낮은 휘파람 같은 소리를 냈고, 먼 곳에서 소방차 사이렌이 실처럼 가늘게 들려왔다.
"증오하는 게 더 쉬웠어."
그의 눈썹 위에 붙은 콘크리트 가루를 엄지로 쓸어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멈추지 않았다.
"미워하면 안 보고 살 수 있으니까. 네 목소리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니까."
목 안쪽이 조여왔다. 삼키려 했으나 삼킬 수 없었다. 코끝이 시큰거렸고, 시야가 번졌다. 장례식 이후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 눈꺼풀 사이로 밀려 나왔다.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턱 끝에서 떨어져 재하의 쇄골 위에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멈출 수가 없었다. 입술을 깨물었으나 턱이 벌어졌고, 가슴 깊은 곳에서 소리 없는 경련이 올라왔다.
귀 뒤 타투를 문지르는 대신, 하은은 재하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볼에 갖다 댔다. 축축한 피부 위에 그의 손바닥이 닿자 눈을 감았다. 그 손의 온기가 살아 있다는 것이, 지금 여기의 현실이라는 것이 몸 전체를 무너뜨렸다.
"이제 그만 돌아와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갈라진 틈으로 새벽바람이 들어와 성대를 긁었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나를 혼자 두지 마."
말이 끝나고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무릎 위의 무게와 볼 위의 손바닥과 코끝에 걸린 비릿한 연기 냄새가 전부였다. 세진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돌렸다. 하은의 등이 들썩이는 것을 보면서도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외장 하드를 자기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통신기의 주파수를 수동으로 조절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은의 눈에서 더 이상 물기가 흐르지 않았을 때, 손바닥 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미세한 경련이 아니었다. 다섯 손가락이 하은의 볼을 감싸듯 오므라들었다. 하은은 눈을 떴다. 무릎 위의 남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홍채에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초점 없던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하은의 얼굴 위에 멈추었다. 입술이 벌어졌다. 건조한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듯한 호흡이 새어 나왔고, 그것이 음절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하은은 그의 입술을 읽었다.
눈동자가 재하의 것이었다. 따뜻하고 약간 처진 눈꼬리, 왼쪽 눈 아래 작은 점. 이 얼굴의 주인이 하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입꼬리가 미약하게 올라갔다.
하은의 손이 그의 손 위에 포개졌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 새벽 공기가 흘렀다. 폐허 위로 빛이 길어졌고, 콘크리트 잔해 사이에 자란 잡초 위로 이슬이 반짝였다.
그의 심장 박동이 하은의 무릎을 통해 전해졌다. 규칙적이고, 단단하고, 살아 있었다. 하은은 숨을 내쉬었다. 길고 느린 호흡이었다. 갈비뼈 사이에 끼어 있던 무엇인가가 그 숨과 함께 빠져나갔다.
"세진 언니."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살았어. 살아 있어."
세진이 통신기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남자의 맥박을 짚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외장 하드를 꺼내 하은의 옆에 놓았다.
"이걸로 끝낼 수 있어. 이사회 전원의 전이 기록, 소울코인 거래 내역, 피해자 명단 전부."
하은은 외장 하드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플라스틱 케이스에 금이 가 있었으나 표시등은 녹색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그것을 집어 들자 손바닥에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귀 뒤가 따가웠다.
하은은 왼손을 올렸다가 멈추었다. 타투가 있는 부위에서 미세한 열감이 퍼지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만져보니 피부 표면이 미약하게 맥동하는 느낌이었다. 전에는 없던 감각이었다.
세진이 그것을 보았다.
"하은 씨, 귀 뒤."
"왜?"
"빛나고 있어. 푸른색으로."
하은은 핸드폰을 꺼낼 여유가 없었다. 대신 세진의 눈동자에 비친 자기 모습을 읽었다. 세진의 홍채 위로 희미한 푸른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그때 무릎 위의 남자가 하은의 손을 잡았다. 아까보다 확실한 힘이었다. 다섯 손가락이 하은의 손등을 감쌌고, 엄지가 손목 안쪽의 맥박 위에 정확히 놓였다.
미소가 번졌다. 재하의 얼굴 위에 피어난 그 미소는 따뜻했고,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하은이 수백 번 보아온 웃음이었다.
입술이 열렸다.
"세 번째 서랍, 파란 봉투."
하은의 손가락이 그의 손 안에서 굳었다.
재하는 그 문장을 모른다. 준혁도 모른다. 그 서랍과 파란 봉투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 클리닉이 폭파되기 전 하은에게 암호화된 메시지를 보내온 진실위원회의 내부 고발자뿐이었다.
하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고, 남자는 여전히 재하의 미소를 입은 채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