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 복도의 냉기가 폐 속까지 파고들었다.
하은은 벽에 등을 붙인 채 모서리를 돌았다. 숨이 거칠었고, 무릎 안쪽에 세진의 피가 마르며 천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감촉이 걸음마다 따라붙었다. 복도 양편으로 파이프가 노출된 천장에서 형광등이 불규칙하게 깜빡였고, 그때마다 준혁의 얼굴이 빛과 어둠 사이에서 번갈아 드러났다.
아니. 재하의 얼굴이.
"여기야."
준혁이 철제 도어 앞에서 멈췄다. 손바닥을 보안 패널에 가져다 대자 짧은 전자음과 함께 잠금이 풀렸다. 재하의 지문이 아직 이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하은은 그 사실을 곱씹지 않으려 이를 물었다.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지하 실험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수술 조명 아래 반투명 캡슐 수십 개가 두 줄로 정렬되어 있었고, 캡슐마다 연결된 투명 호스 속에서 옅은 푸른빛의 액체가 느리게 순환하고 있었다. 소독약과 오존이 뒤섞인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하은은 입술을 손등으로 누르며 캡슐 사이를 걸었다. 유리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산소 마스크를 쓰고, 체온 유지 시트에 싸인 채 미동도 없는 사람들.
"이 사람들 전부…"
"블랙 마켓 하데스에서 거래된 육체들이야." 준혁이 캡슐 하나의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화면에 생체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흘렀다. 심박, 뇌파, 체온. "영혼이 빠진 빈 그릇. 구매자가 정해지면 각인 절차에 들어가지."
하은의 시선이 줄지어 선 캡슐 위를 훑었다. 젊은 여자.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아직 턱선에 소년의 윤곽이 남은 얼굴.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주머니 속 녹음기의 모서리가 손바닥에 눌렸다. 세진이 클리닉 서버에서 빼낸 데이터를 옮겨 담은 녹음기. 세진의 마지막 선물.
"준혁 씨."
"끝에서 세 번째." 그가 먼저 말했다.
하은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캡슐 번호 B-37. 유리 안쪽으로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강준혁의 본래 몸이었다.
좁은 턱, 깊게 패인 눈두덩, 왼쪽 관자놀이 아래 실핏줄이 비치는 피부. 재하의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하은은 캡슐 표면에 손을 대었다. 유리가 차가웠고, 그 너머의 몸은 숨을 쉬고 있었지만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이걸로 돌아갈 수 있어?"
"장치를 가동하면." 준혁이 실험실 중앙에 놓인 전이 장치를 턱으로 가리켰다. "내 영혼을 이 몸으로 되돌리고, 재하 씨의 육체를 해방시킬 수 있어."
하은의 손끝이 유리 위에서 미끄러졌다. 해방. 그 단어가 혀 위에서 쓰디쓴 맛을 남겼다.
"그러면 재하 씨는."
"비어 있는 몸이 되겠지." 준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영혼이 없는. 이 캡슐 속 사람들처럼."
전이 장치는 거대한 타원형 금속 프레임 두 개가 마주 보는 구조였다. 하은은 조작 패널 앞에 섰다. 화면에 뜬 절차를 읽었다. 영혼 분리, 주파수 동기화, 타겟 육체 수용. 마지막 항목에서 눈이 멈췄다.
'영혼 소멸 위험: 23.7%'
경고 메시지가 붉은 글씨로 깜빡이고 있었다.
"이 확률…"
"알고 있어." 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재하의 얼굴 위에 놓인 그 표정은 기묘하게 평온했다. "각오하고 온 거야."
하은이 패널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귀 뒤 타투를 왼손으로 문지르려다 멈추고, 대신 녹음기를 꺼내 조작 패널 옆에 내려놓았다. 세진이 건넨 데이터. 이곳의 모든 것을 증명할 기록.
"시작할게."
하은이 패널 위 첫 번째 스위치에 손을 올린 순간,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느린 박자. 금속 바닥을 때리는 발걸음이 실험실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서두르지 않는 보폭이었다. 이미 이 안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하은의 손가락이 스위치 위에서 굳었다. 준혁도 입구를 돌아보았다.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그 사이사이에 두 번째, 세 번째 발자국이 겹쳐 들렸다. 한 명이 아니었다.
구두 소리가 입구 앞에서 멈췄다. 짧은 정적. 그리고 느린 박수 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감동적이군."
오민준이었다.
검은 코트 자락이 형광등 아래에서 윤기를 띠었다. 오른손에 권총이 들려 있었고, 총구는 아직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뒤로 보안 요원 두 명이 복도를 막아섰다.
"서하은 기자." 오민준이 천천히 걸어왔다. 구두 소리가 금속 바닥에 부딪혀 건조하게 울렸다.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 진심으로."
하은은 패널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오민준이 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물러서." 준혁이 하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재하의 어깨가 하은의 시야를 가렸다.
오민준이 총구를 들어 올렸다. 준혁의 가슴을 겨누었다.
"쏘면 윤재하의 몸이 죽어." 하은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들이 그렇게 공들여 만든 상품이잖아."
오민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품? 아직도 그렇게 단순하게 보나." 그가 총구를 준혁에서 하은에게로 옮겼다. "윤재하의 몸은 이미 이사회에서 폐기 결정이 났어. 강준혁이 각인 실패 판정을 받은 순간."
준혁의 어깨가 굳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 방에서 누구를 쏘든." 오민준이 캡슐 사이를 지나며 손가락으로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사회는 신경 쓰지 않아."
하은은 패널 아래 비상 레버의 위치를 눈으로 확인했다. 준혁도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오민준이 멈췄다. 하은과 세 걸음 거리.
"당신을 죽이면 재하 씨도 죽는다는 거 알아." 하은이 입을 열었다.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당신을 살려두면 재하 씨의 영혼은 영원히 쉴 곳이 없고."
오민준의 눈이 좁아졌다. "영혼?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서 기자. 있는 건 뇌파 패턴뿐이야."
"그래서 이렇게 쉽게 사람을 갈아 끼우는 거지." 하은의 목소리가 반음 올라갔다. 손톱이 패널 표면을 긁었다.
오민준이 방아쇠 위에 검지를 올렸다. "레버에서 손 떼."
하은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준혁을 보았다. 재하의 눈이 실험실 조명 아래에서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가 흔들렸다. 기억 역류. 오늘 레테를 맞지 않은 것이다.
준혁이 오민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동시에 오른발로 옆에 놓인 캡슐 받침대를 걷어찼다. 금속 스탠드가 오민준의 손목을 쳤다.
총성이 천장을 뚫었다.
하은이 패널 뒤로 몸을 낮추는 사이, 준혁은 오민준의 팔을 잡아 비틀었다. 총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금속 위에서 미끄러져 캡슐 아래로 사라졌다. 오민준이 무릎으로 준혁의 복부를 가격했다. 재하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등이 전이 장치의 프레임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어차피 그 몸은 네 것도 아니잖아." 오민준이 코트 안쪽에서 두 번째 무기를 꺼냈다. 소형 전기충격기. 파란 아크가 어둠 속에서 튀었다.
준혁이 프레임을 잡고 일어섰다. 입술 끝에서 피가 번졌다. 재하의 입술에서 흐르는 피. 하은의 손이 멈칫했다.
하은은 바닥을 짚고 기어가 총을 찾았다. 캡슐 아래 어둠 속에서 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에 닿았다. 움켜쥐고 일어섰다. 양손으로 총을 잡았지만 손이 떨려 조준이 흔들렸다.
오민준이 충격기를 준혁의 목에 갖다 대려는 순간, 하은이 소리쳤다.
"멈춰."
총구가 오민준의 등을 향했다. 오민준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충격기를 든 손을 내리지 않은 채.
"쏠 수 있어?" 그가 물었다.
하은의 검지가 방아쇠 위에서 떨렸다. 오민준 너머로 준혁이 보였다. 재하의 얼굴. 터진 입술. 비뚤어진 미소.
그 순간 준혁이 하은을 바라보았다.
형광등이 한 번 깜빡이고 다시 켜졌다. 실험실이 잠깐 침묵에 잠겼다. 캡슐 속 순환액이 흐르는 미세한 기포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준혁의 입이 열렸고, 나온 것은 재하의 목소리였다. 기억 역류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온 울림.
"하은아."
그 한마디에 하은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총을 든 팔이 힘을 잃어가는 것을 느꼈지만 손가락은 방아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준혁이 미소 지었다. 재하가 웃을 때 왼쪽 볼에만 생기던 보조개가 파였다. 소독약 냄새와 금속 냄새 사이로, 하은은 기억 속 어딘가에서 재하의 셔츠 칼라에 배어 있던 섬유유연제 향을 떠올렸다. 없는 냄새였다. 여기엔 없는.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총구가 아래로 기울었다.
"잘 지내."
준혁의 입에서 나온 재하의 마지막 인사가 차가운 실험실 공기 속에 짧게 머물렀다. 하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 안쪽이 졸라붙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오민준이 움직였다. 충격기를 버리고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예비 권총. 코트 안쪽 홀스터가 비어 있었던 건 위장이었다.
총구가 하은의 가슴을 겨누었다.
"끝내자."
같은 순간, 준혁이 전이 장치의 비상 레버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아래로 당겼다.
실험실 전체가 진동했다. 천장의 형광등이 꺼지고, 캡슐마다 연결된 모니터가 일제히 붉은 경고등으로 전환되었다. 'SOUL EXTINCTION WARNING — OVERLOAD' 메시지가 모든 화면에서 깜빡였다. 프레임 사이에서 하얀 전기 아크가 튀기 시작했고, 준혁의 몸이 장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듯 프레임에 매달렸다.
오민준의 총구가 하은에서 장치로 옮겨갔다.
하은이 앞으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