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같은 방향
아르테미스 본사 52층. 오전 10시.
서윤의 통유리 오피스에 서울이 발 아래 펼쳐져 있었다. 테헤란로의 빌딩들이 아침 햇살 아래서 유리벽을 반짝이고 있었다. 맞은편에 이지우가 앉아 있었다.
커피 두 잔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김이 올라오다 말았다. 식어가는 커피 위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이네요."
이지우가 먼저 말했다. 다리를 꼬면서. 레더 재킷 대신 오늘은 네이비 블레이저. 공식적인 자리에 맞는 옷을 골랐다는 뜻이었다.
"3년이요."
서윤이 답했다.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았다. 등과 등받이 사이에 간격을 두는 것. 설희에게서 본 자세였다. 언제부터 그 자세를 따라 하게 됐는지 서윤은 알지 못했다.
"3년 동안 많이 올라오셨어요. 52층. 아르테미스 대표. 대단합니다."
"지우 씨도 JW캐피털 대표잖아요."
"규모가 다르죠."
이지우가 웃었다. 입꼬리만. 3년 전에도 이 사람은 이렇게 웃었다. 눈은 웃지 않고 입만 웃는 사람. 서윤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침묵이 왔다. 짧지 않았다. 52층의 정적은 지상과 달랐다. 차 소리도, 사람 소리도, 바람 소리도 올라오지 않는 높이. 두 사람의 숨소리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위임장 얘기는 했으니까."
이지우가 말했다.
"찬성 행사합니다. 2퍼센트. 약속대로."
"조건은."
"오늘 면담이 조건이에요. 이미 충족됐습니다."
서윤이 이지우를 봤다. 경계의 눈이었다. 2퍼센트를 주면서 면담만 요구하는 사람. 돈을 주고 얼굴만 보겠다는 거래.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가 보이지 않았다.
"면담 자체가 조건이면, 뭘 말하려는 겁니까."
이지우가 잠깐 창밖을 봤다가 서윤을 다시 봤다. 눈이 바뀌었다. 관망의 눈에서 직선의 눈으로.
"정태호요."
서윤의 손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 손가락 다섯 개가 동시에 경직되는 것을 서윤 자신은 느꼈다.
"3년 전. 정태호가 당신을 밀어낸 거."
"알려진 사실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어요."
이지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테이블 위의 커피잔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식은 커피.
"정태호가 당신을 밀어낸 건, 위에서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서윤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눈가의 근육을 잡았다. 입술의 각도를 유지했다. 3년 동안 훈련한 표정 관리였다.
"알고 있었습니다."
서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건조했다. 건조하게 만들었다.
"아니요."
이지우가 말했다.
"당신은 '누군가 지시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조직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정태호 혼자 그런 결정을 내릴 위치가 아니었으니까."
이지우가 잠깐 멈췄다.
"당신이 모르는 건 '누가' 지시했는지예요."
서윤이 이지우를 봤다. 3초. 5초. 이지우의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 사람은 답을 알고 있었다. 답을 가진 사람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 서윤은 그 방식을 알아봤다. 설희가 이사회에서 쓰는 방식이었다.
"알려줄 겁니까."
"다음에요."
이지우가 일어섰다.
"지금은 위임장만. 나머지는 다음에."
"다음이 언제인데요."
이지우가 문 앞에서 돌아봤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제가 필요해질 때요. 그때 다시 만나죠."
문이 닫혔다. 이지우의 구두 소리가 복도에서 멀어졌다.
서윤이 혼자 남았다. 커피가 식어 있었다. 두 잔 모두.
'누가' 지시했는지. 서윤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본부장의 개인적 판단이었다고. 남성 중심 조직의 구조적 문제였다고. 그렇게 정리하고 넘어갔다. 퇴직서를 쓰고, 회사를 세우고, 52층까지 올라왔다. 정리된 과거는 서랍에 넣어두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랍이 열렸다. 이지우가 열었다.
지시가 있었다. 누군가의. 정태호 위의 누군가. 그 누군가가 서윤의 이름을 지목하고 밀어내라고 했다.
왜?
서윤의 손이 커피잔을 잡았다. 식은 커피. 마시지 않았다. 잔의 차가운 표면이 손바닥에 닿았다.
───
오후 3시. 설희가 미래센터 사무실에서 서윤을 맞았다. 서윤이 위임장 현황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지우가 찬성 확정했습니다. 2퍼센트."
"좋습니다."
서윤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설희가 서류를 받으면서 서윤의 얼굴을 봤다.
평소와 달랐다. 서윤의 눈이 평소의 건조한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처리하고 있는 눈이었다. 아직 처리가 끝나지 않은.
"무슨 일 있었습니까."
서윤이 설희를 봤다.
"비즈니스 이야기입니다."
"거짓말은 0.5초 안에 들킵니다."
설희가 말했다. 서윤의 눈을 보면서.
"우리 사이에서는."
서윤이 설희를 봤다. 2초. 3초. 사무실의 오후 햇살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먼지 입자가 빛 속에서 천천히 떠다니고 있었다.
"우리 사이가 뭡니까, 백설희 씨."
그 질문이 왔다. 설희는 준비하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아니, 계속 피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11화에서 같은 주방에 선 이후로, 14화에서 담요를 발견한 이후로, 15화에서 1센티미터를 느낀 이후로, 18화에서 우산을 들겠다고 한 이후로. 매번 피한 질문이 서윤의 입에서 나왔다.
"같은 방향을 보는 사이입니다."
설희가 답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기적적으로.
"당신이 가르쳐줬잖아요."
기자간담회에서. '사랑하는 사이입니까'라는 질문에 설희가 답했다. '중요한 것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카메라 앞이었고, 대본이었고, 연기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서윤이 설희를 봤다. 눈이 바뀌었다. 처리 중이던 무언가가 멈춘 눈이었다. 이지우가 열어놓은 서랍이, 설희의 한마디에 잠깐 닫힌 것이었다.
"같은 방향."
서윤이 반복했다. 낮게.
"네."
"그러면."
서윤이 일어섰다. 서류를 정리하면서.
"주총 준비 계속합시다. D-9입니다."
돌아섰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설희는 서윤의 등을 봤다. 생로랑 재킷. 어깨 라인이 단단했다. 그 단단함 아래에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설희는 알았다.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H129. 밤 10시.
서윤이 서재에 혼자 앉아 있었다. 스탠드 하나. 노트북은 닫혀 있었다.
이지우의 말이 머릿속에서 돌고 있었다.
'누가 지시했는지는 모르잖아요.'
3년 전. 서윤이 퇴직서를 쓸 때. 누군가가 정태호에게 지시를 내렸다. 강서윤을 밀어내라고. 왜? 서윤이 올라가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나? 승진 심사에서 1순위인 사람을 밀어내야 할 만큼 강한 이유.
어젯밤 장미라가 설희에게 보낸 메시지를 서윤은 알지 못했다. 정태호가 금감원 민원의 창구라는 사실을. 정태호가 승현의 자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거기에 금감원까지 연결되어 있다면, 정태호는 단순한 자문이 아니라 승현의 실행자였다.
3년 전에도 정태호는 누군가의 실행자였다.
서재 문이 열렸다.
설희가 서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설탕 없이.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방금 내린 것이었다.
"마시세요."
설희가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서윤의 닫힌 노트북 옆에. 정확하게.
서윤이 설희를 올려다봤다. 설희의 얼굴이 스탠드 빛 아래서 반쪽만 비추어져 있었다. 14화의 서재에서 잠든 설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갑옷을 벗은 얼굴. 지금은 깨어 있었다. 갑옷을 벗었지만 깨어 있는 얼굴. 그것이 더 강해 보였다.
설희는 돌아서면서 말했다. 거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수고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같은 두 글자가 방향을 바꿨다. 전화기 너머에서, 서재에서, 복도에서 오가던 말이 지금 이 순간에는 무게가 달랐다. 커피 한 잔의 무게와 함께 놓인 두 글자.
설희가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를 지나 멀어졌다.
서윤의 손이 커피잔 위에서 멈췄다. 잔의 온기가 손바닥에 전달되고 있었다. 뜨거웠다. 이지우가 남긴 식은 커피와 반대의 온도. 설희가 내린 커피는 언제나 뜨거웠다.
서윤은 커피를 들었다. 한 모금.
뜨거웠다. 쓴맛이 혀를 감았다. 그리고 그 쓴맛 안에 다른 맛이 있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서윤의 심장이 계산을 거부했다. 처음이었다. 33년 동안 모든 것을 숫자로 환산해온 서윤이, 커피 한 잔의 가치를 계산할 수 없었다.
잔을 내려놓았다. 도시의 야경이 창 너머로 낮게 깔려 있었다.
같은 방향.
설희가 그렇게 말했다.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고.
서윤은 처음으로 '같은 방향'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궁금해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답이라는 걸, 아직은 몰랐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보다 어려운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