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흔들리는 표
주총 D-10.
설희는 아침부터 미래센터 전략실에 있었다. 어젯밤 서윤의 웃음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것을 지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숫자였다. 숫자는 감정을 덮는다. 설희는 그 방법을 오래전에 배웠다.
화이트보드에 숫자가 적혀 있었다.
찬성: 47%. 반대: 38%. 미정: 15%.
3퍼센트가 부족했다. 이지우의 2퍼센트를 받으면 49. 여전히 과반 미달이었다. 1퍼센트를 더 확보해야 했다. 1퍼센트. 숫자로는 작았다. 주총장에서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숫자였다.
서윤이 전략실에 들어왔다. 재킷을 벗고 셔츠 소매를 접은 모습이었다. 전투 태세.
"미정 15퍼센트 중에서 움직일 가능성이 있는 곳은."
"두 곳. 신한투자증권 0.8퍼센트, KB자산운용 0.5퍼센트."
"둘 다 잡으면 48.3. 이지우까지 합치면 50.3."
"과반입니다."
서윤이 숫자를 봤다. 0.3퍼센트의 여유. 너무 좁았다. 한 곳이라도 이탈하면 무너진다. 50.3은 과반이지만 안전마진이 아니었다. 안전마진이 되려면 52퍼센트 이상이 필요했다. 2퍼센트의 안전마진을 만들 시간이 10일.
"크로노스 쪽 동향은."
오 팀장이 보고했다. 태블릿을 들고.
"크로노스가 신한투자증권에 새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합병 반대 시 주당 15퍼센트 프리미엄으로 블록딜을 제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15퍼센트 프리미엄. 현재 주가 대비 15퍼센트를 더 주겠다는 것이다. 신한투자증권이 보유한 0.8퍼센트의 시가가 약 120억. 15퍼센트 프리미엄이면 18억을 더 주는 셈이었다. 아르테미스가 맞설 수 있는 자금 규모가 아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오 팀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크로노스가 금감원에 우리 쪽 거래를 문제 삼는 민원을 넣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아르테미스가 시장에서 매수한 미래리테일 주식 1퍼센트 건입니다."
서윤의 눈이 좁아졌다. 13화에서 지시한 매수. 금감원 모니터링 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진행한 매수. 크로노스가 그것을 잡은 것이다. 민원이 접수되면 금감원이 조사에 들어간다. 조사 기간 동안 해당 주식의 의결권 행사가 제한될 수 있다.
"1퍼센트가 묶이면."
서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건조했다.
"50.3이 49.3이 됩니다."
다시 과반 미달이었다.
설희가 화이트보드를 봤다. 숫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숫자 뒤의 사람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숫자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사람은 돈 앞에서 흔들린다.
"제가 방법을 찾겠습니다."
서윤이 설희를 봤다.
"어떤 방법이요."
설희가 돌아보지 않았다. 화이트보드를 보면서 말했다.
"본택에 비공개 자산이 있습니다. 미술품 컬렉션. 시가 추정 200억 이상. 이것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면 크로노스의 블록딜 조건에 맞설 자금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서윤의 표정이 변했다. 입가가 단단해졌다.
"가문의 자산입니까."
"네."
"이사회 승인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개인 소유입니다. 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지만, 설희 개인에게 포괄위임장이 있습니다. 장녀 승계 준비 과정에서 받은 것입니다."
서윤이 2초간 설희를 봤다. 설희의 등이 곧았다. 화이트보드를 향해 서 있는 등. 그 등이 가문의 자산을 걸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반대합니다."
설희가 돌아봤다.
"이유가 뭡니까."
"가문의 자산까지 걸 필요 없습니다. 대출 실행 시 담보 가치 변동 리스크가 있고, 미술품은 유동성이 낮습니다. 감정 평가에 2주, 대출 실행에 1주. D-10에서 시작하면 주총에 맞출 수 없습니다."
숫자로 반박했다. 서윤의 방식이었다. 감정이 아니라 일정과 리스크로.
"숫자상으로 가능합니다. 긴급 감정이면 3영업일이면 됩니다."
"숫자가 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은 다릅니다."
설희의 눈이 달라졌다. 서윤의 반대가 비즈니스적 판단인 것은 알았다. 일정 리스크는 실제였다. 유동성 문제도 맞았다. 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건 제 가문이고, 제 전쟁입니다."
설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차가워진 것이 아니라 단단해진 것이었다.
서윤이 한 걸음 다가갔다. 화이트보드 앞에서. 두 사람 사이 거리가 1미터로 좁혀졌다.
"당신의 전쟁이 아닙니다."
설희가 서윤을 올려다봤다. 서윤이 더 가까이 서 있었다. 서윤의 눈에 화이트보드의 숫자가 반사되어 있었다.
"우리의 전쟁입니다. 계약서에 서명한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정적.
두 사람이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었다. 숫자들이 뒤에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47. 38. 15. 그 숫자들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보다 컸다.
오 팀장이 기침을 했다. 작게. 존재를 알리는 기침이었다.
"대표님. 이지우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서윤의 눈이 오 팀장에게로 갔다.
"뭐래."
"JW캐피털이 크로노스 측 제안을 거절하고, 찬성 쪽으로 위임장을 행사하겠다고 합니다."
설희가 돌아봤다.
"조건은."
오 팀장이 메모를 읽었다.
"강서윤 대표와 단독 면담."
서윤의 표정이 굳었다. 회복했다. 설희는 그 순간을 봤다.
"알겠어. 일정 잡아."
서윤이 말했다. 평소의 목소리. 평소보다 0.5톤 높은 것을 설희만 알아챘다.
오 팀장이 나갔다.
설희가 서윤을 봤다.
"이지우의 진짜 목적은 데이터가 아니었군요."
서윤이 설희를 봤다.
"아니었습니다."
"당신이었어요."
서윤이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는 것이 답이었다.
───
PH129. 밤 10시. 설희가 서재에 앉아 있었다. 스탠드 하나.
위임장 현황을 다시 계산했다. 이지우 2퍼센트 + 신한투자 0.8퍼센트 + KB자산 0.5퍼센트 = 50.3. 거기서 금감원 조사로 1퍼센트가 묶이면 49.3. 다시 미달.
숫자의 전쟁은 한쪽이 쌓으면 다른 쪽이 무너뜨리는 구조였다. 모래성처럼. 파도가 올 때마다 다시 쌓아야 했다.
서윤이 이지우를 만나야 한다. 3년 전의 과거를 가진 사람을. 정태호를 아는 사람을. 서윤의 승진을 막은 사람의 이름을 가진 파일을 들고 있을 사람을.
핸드폰을 들었다. 서윤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멈췄다.
뭘 보내야 하지.
'내일 면담 잘 하세요'? 너무 가볍다. '걱정됩니다'? 걱정은 감정이다. '조심하세요'? 조심이라는 단어는 상대를 약하게 만든다. 서윤에게 약함을 전제하는 말은 맞지 않았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보내지 않은 메시지가 보낸 것보다 무거웠다.
장미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사님. 금감원 민원 관련 추가 확인 중 크로노스 측 로비스트 접촉 기록이 나왔습니다. 민원 접수 당일, 금감원 시장감시팀 담당자와 크로노스 자문 변호사가 같은 식당에서 식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자문 변호사 이름: 정태호.]
설희의 손이 멈췄다.
정태호. 서윤의 승진을 막은 사람. 승현의 자문. 그리고 지금, 금감원에 민원을 넣는 창구.
모든 선이 한 사람에게로 모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