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유리천장
PH129. 밤 11시.
서윤이 거실에 앉아 있었다. 소파. 통유리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낮게 깔려 있었다. 앞에 위스키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발베니 더블우드 12년. 얼음 두 개. 얼음이 녹으면서 잔 안에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짧고 맑은 소리.
혼자 마시는 술이었다. 아르테미스 대표가 된 뒤로 혼자 마시는 횟수가 줄었다. 마실 시간이 없어서. 누군가와 마시는 술은 비즈니스였고, 혼자 마시는 술은 사치였다. 오늘은 사치를 부렸다.
이지우. 그 이름이 3년 전을 끌고 왔다. 오후에 설희에게 보고를 받은 뒤, 서윤은 52층 오피스에서 나머지 일정을 소화했다. 회의 두 개. 보고서 세 건. 전화 다섯 통. 모든 것을 처리한 뒤에도 이지우의 이름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3년 동안 서랍에 넣어둔 이름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열기가 식도를 데웠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발소리. 슬리퍼.
설희.
"안 주무십니까."
서윤이 돌아봤다. 설희가 잠옷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서 있었다. 머리를 풀어 헤친 모습. 이사회실의 갑옷이 없었다. 네이비 수트도, 진주 귀걸이도, 정확하게 올린 머리카락도 없었다. 갑옷을 벗은 뒤의 얼굴은 평소보다 어려 보였다.
"안 잔 게 아니라 못 자는 겁니다."
설희가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의 위스키를 봤다.
"드실 겁니까."
"아닙니다."
침묵이 왔다. 도시의 불빛이 천장에 반사되어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람선이 강 위를 지나갈 때마다 불빛의 각도가 미세하게 바뀌었다. 두 사람은 그 흔들림 안에 앉아 있었다.
설희가 먼저 말했다.
"이지우 대표."
서윤이 잔을 돌렸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네."
"아는 사이입니까."
서윤이 3초간 말이 없었다. 결단 전의 침묵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꺼내기 전의 침묵이었다. 서랍을 여는 데 필요한 시간.
"3년 전. 같은 회사에 있었습니다."
설희가 서윤을 봤다. 서윤은 잔을 보고 있었다. 얼음이 녹는 것을 보면서 말하고 있었다.
"승진 누락된 거. 알고 계시죠."
"1화에서 파일에 있었습니다."
"기사에 난 건 절반입니다."
서윤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얼굴이 변하지 않았다. 술이 아니라 물을 마시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상사 이름이 정태호였습니다. 당시 전략본부장. 서른다섯에 본부장이 된 사람이에요. 유능했습니다."
서윤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유능한 사람은 자기 영역에 위협이 되는 사람을 가장 먼저 알아봅니다. 정태호가 저를 알아봤어요. 승진 심사에서 제가 1순위였습니다. 실적으로. 숫자로. 반박 불가능한 숫자로."
서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평소보다. 이 낮은 목소리가 진심의 음역이라는 것을 설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정태호가 저를 불렀습니다. 회의실에서. 오후 4시. 다른 사람이 퇴근한 뒤에. '서윤 씨, 팀 내 조화가 중요합니다.' 그게 전부였어요. 팀 내 조화. 네 글자."
설희의 손이 무릎 위에서 단단해졌다. 카디건 소매 안에서 주먹이 쥐어지고 있었다.
"네 글자 뒤에 숨은 말이 뭔지 저도 알고, 정태호도 알고, 회의실의 공기도 알고 있었습니다. 여자가 올라가면 팀이 불편하다. 그걸 '조화'라고 포장한 거예요."
서윤이 잔을 한 번 돌렸다. 천천히. 얼음이 거의 녹아 있었다.
"그 자리에 남자 후배가 올라갔습니다. 저보다 실적이 낮은. 저보다 경력이 짧은. 저보다 포트폴리오가 얇은. 모든 숫자에서 저보다 작은 사람이 저보다 높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유는 '팀 내 조화'였습니다."
서윤이 잔을 내려놓았다. 소리가 났다. 평소보다 센 소리.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모를 소리였다.
"그날 퇴직서를 썼습니다."
"이지우는요."
"이지우도 같은 라인이었습니다. 저보다 한 기수 아래. 같은 승진 심사. 이지우는 남았어요."
"남아서."
"정태호 밑에서 3년 더 일하다가 독립했습니다. JW캐피털을 세웠어요. 그 3년 동안 정태호의 네트워크를 가져간 거예요. 거래처, 인맥, 내부 정보. 독립할 때 가장 필요한 자산을 3년 동안 축적한 겁니다."
설희가 그 이야기의 빈 곳을 읽었다. 서윤이 퇴직서를 쓰는 동안 이지우는 남았다. 남아서 견딘 것이 아니라, 남아서 가져간 것이다. 서윤이 선택한 것은 존엄이었고, 이지우가 선택한 것은 실리였다. 둘 다 유리천장에 대한 대응이었다. 방향이 달랐을 뿐.
"한 가지 더."
서윤이 설희를 봤다. 처음으로. 이 대화에서. 서윤의 눈에 스탠드 빛이 반쪽만 걸려 있었다. 밝은 쪽과 어두운 쪽. 두 개의 눈이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정태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설희가 서윤의 눈을 봤다.
"승현 쪽 자문입니다."
설희의 숨이 멈췄다. 폐 안의 공기가 정지한 느낌이었다.
"알고 있었습니까."
"한 달 전부터."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서윤이 잔을 돌렸다. 천천히. 얼음이 다 녹아 물이 된 잔.
"비즈니스에 감정을 섞으면 나간다고 했잖아요. 저 자신에게도 같은 규칙입니다."
설희는 서윤을 봤다. 오래. 서윤의 얼굴에 스탠드 빛이 반쯤 걸려 있었다.
이 사람은 참고 있었다. 3년 전의 분노를. 자신을 밀어낸 사람이 지금 승현의 옆에 서서 또 다른 사람을 밀어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계약의 테이블 위에 올리지 않았다. 개인적인 분노가 비즈니스 판단을 오염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천장은 부수면 됩니다."
서윤이 말했다. 도시의 야경을 보면서.
"문제는 부서진 파편이 전부 제 머리 위로 떨어진다는 거예요."
설희가 말했다. 생각보다 먼저 입이 움직였다. 계산보다 먼저. 전략보다 먼저. 이사회실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순서로 말이 나왔다.
"그러면 제가 우산을 들겠습니다."
서윤이 설희를 봤다. 눈이 달라졌다.
"비즈니스입니다."
설희가 덧붙였다. 빠르게. 너무 빠르게. 빠르다는 것 자체가 비즈니스가 아니라는 증거라는 것을 설희는 알고 있었다.
"파트너의 머리를 보호하는 건."
서윤이 말이 없었다. 3초. 5초.
그리고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었다. 눈이 함께 웃었다. 눈가에 주름이 생겼다. 처음 보는 주름이었다. 52층 회의실에서도, 기자간담회 단상에서도, 프레젠테이션 화면 앞에서도 본 적 없는 주름. 이 사람이 이런 표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설희는 몰랐다. 입술이 올라가고 눈이 좁아지고 볼에 그림자가 생기는 것. 그 모든 움직임이 동시에 일어났다.
서윤의 진짜 웃음이었다.
설희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봤다는 사실이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이 웃음을 기억하면 안 된다. 기억하면 계약서 밖으로 나간다. 서류 위의 숫자가 아니라,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순간, 모든 계산이 틀어진다.
이미 늦었다는 걸 설희 자신은 알지 못했다.
───
서윤이 일어섰다. 위스키잔을 테이블에 놓은 채.
"늦었습니다. 주무세요."
"네."
서윤이 복도로 걸어갔다. 방 문 앞에서 멈췄다. 돌아봤다. 거실의 불빛이 서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아까의 웃음은 사라져 있었다. 대신 다른 표정이 있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표정.
"이사님."
"네."
"우산."
잠깐 멈췄다.
"감사합니다."
문이 닫혔다.
설희가 거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서윤이 마시다 남긴 위스키잔이 테이블 위에 있었다. 얼음이 다 녹아 잔 안의 액체가 투명해져 있었다.
설희는 그 잔을 치우지 않았다.
파편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고 했다. 그러면 내가 우산을 들겠다고 했다. 비즈니스라고 했다.
비즈니스가 맞나.
시계 줄을 만지려다가 멈췄다. 손이 허공에서 내려왔다.
맥박이 평소보다 빨랐다. 위스키 때문이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지만.
거짓말이었다. 위스키 때문이 아니었다.
설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으로 갔다. 문을 닫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서윤의 웃음이 어둠 속에서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