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세 번째 손
미래센터 1층 카페. 오전 9시.
설희는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서윤이 오후에 이사회 자료를 들고 올 예정이었고, 설희는 그때 줄 커피를 미리 사놓으려는 것이었다.
이유는 효율이었다. 서윤이 커피를 사러 1층에 내려가는 시간을 절약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어젯밤 승현의 전화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성북동 식사 제안. 아직 답을 하지 않았다. 답을 미루는 것이 설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통제였다. 그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커피를 사는 것.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것.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카페는 아침 시간이라 붐비지 않았다. 원두 로스팅 냄새가 낮게 깔려 있었고, 에스프레소 머신의 증기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렸다. 설희는 카운터 옆 바에 서서 핸드폰으로 오전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백설희 이사님."
옆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향수 냄새가 먼저 왔다. 시트러스 계열. 가볍고 건조한 향이었다. 레더 재킷. 짧은 머리. 노트북 가방을 어깨에 건 여자.
이지우.
설희의 시야에 들어온 첫인상은 움직임이었다. 바 의자에 앉는 동작이 빨랐다. 군더더기 없이. 공간을 점유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설희가 이지우를 봤다. 눈. 서윤과 비슷한 부류의 눈이었다. 계산이 끝난 사람의 눈. 다른 점이 있다면, 서윤의 눈은 결단의 눈이고 이지우의 눈은 관망의 눈이었다. 서윤은 계산이 끝나면 움직이고, 이지우는 계산이 끝나면 기다린다. 그 차이를 설희는 3초 만에 읽었다.
"이지우 대표님."
"알고 계셨군요."
"JW캐피털. 독립계 PEF. 미래리테일 주식 2퍼센트 보유. 설립 3년차. 운용 자산 1,200억."
이지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 건지 아닌지 애매한 각도. 감탄도 아니고 경계도 아닌, 측정하는 표정이었다.
"숫자까지 외우고 계셨군요."
"2퍼센트를 가진 사람의 이름은 외웁니다."
"정확합니다."
이지우가 커피를 주문했다. 에스프레소 더블. 짧고 진한 것을 마시는 사람이었다. 설탕도 물도 넣지 않았다. 서윤과 같은 스타일이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공통점이 눈에 띄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지우가 에스프레소 잔을 손으로 감싸면서 말했다. 잔이 작았다. 이지우의 손가락이 길었다. 잔 전체를 한 손으로 감쌀 수 있는 크기였다.
"저는 크로노스 편이 아닙니다. 당신 편도 아닙니다."
"그러면 뭐 하러 오셨습니까."
"시장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있는 건 아직 가격이 안 붙은 편이죠."
설희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카운터 위에. 소리가 나지 않게.
"가격을 제시하시겠다는 뜻입니까."
"JW캐피털이 보유한 2퍼센트를 우호 지분으로 행사하겠습니다. 주총에서 찬성 쪽으로."
2퍼센트. 지금 부족한 것이 정확히 그 정도였다. 이지우가 이 숫자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위임장 현황이 외부에 노출되어 있거나, 이지우가 독자적으로 계산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 사람의 정보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조건이요."
이지우가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한 모금에.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깔끔했다.
"아르테미스의 물류 데이터 열람권."
설희의 눈이 좁아졌다. 물류 데이터. 아르테미스의 핵심 자산. AI 배송 알고리즘, 지역별 배송 효율 데이터, 물류센터 운영 지표. 서윤이 3년간 쌓아올린 것이다. 이것을 외부에 열람시키는 것은 아르테미스의 가치 평가를 타인에게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건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안을 이사님에게 먼저 드리는 겁니다. 강 대표님에게 바로 가면 거절당할 테니까."
설희는 그 문장을 읽었다. 이지우는 서윤이 거절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설희를 경유하는 것이다. 설희가 필요성을 설명하면 서윤이 들을 가능성이 높다는 계산.
이 사람은 두 사람 사이의 역학을 읽고 있다.
이지우가 일어섰다.
"생각해보세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명함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흰색 바탕에 검정 글씨. 'JW캐피털 대표 이지우.' 그 아래 전화번호 하나. 다른 정보 없이. 미니멀한 명함이었다. 자신감이거나 허세였다. 설희는 전자로 판단했다.
이지우가 걸어나갔다. 레더 재킷 뒤로 카페의 아침 햇살이 비쳤다. 걸음이 빨랐다. 들어올 때와 같은 속도.
설희는 명함을 집었다. 가볍고 단단한 종이. 이 명함의 무게가 2퍼센트의 무게였다.
───
오후 2시. 서윤이 아르테미스 본사 52층 오피스에서 설희의 보고를 들었다. 창 너머로 테헤란로의 오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이 빌딩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서윤의 표정이 변했다. 입가가 단단해졌다. 평소의 건조한 표정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막으려는 표정이었다.
"물류 데이터 열람권."
서윤이 반복했다.
"그게 조건이라고요."
"네."
서윤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걸어갔다. 등을 보였다.
"이지우가 원하는 건 데이터가 아닙니다."
설희가 서윤의 등을 봤다. 생로랑 재킷의 어깨 라인이 평소보다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면 뭘 원하는 겁니까."
서윤이 돌아보지 않았다.
"그 사람은 편을 사는 게 아니라 편을 만듭니다. 데이터를 열람하면 아르테미스의 가치를 정확히 산정할 수 있어요. 산정이 끝나면 매수가 가능해집니다. 2퍼센트로 우군을 자처하다가, 데이터를 확보한 뒤에 적대적 포지션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논리적인 분석이었다. 서윤의 전략적 사고는 언제나 정확했다. 설희가 놓친 시나리오였다.
"아시는 분입니까."
서윤이 돌아봤다. 눈이 달라져 있었다. 평소의 건조한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눈이었다. 감추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보이는 눈. 서윤이 이런 눈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지우의 제안을 받지 마세요."
설희는 그 말의 무게를 읽었다. '받지 마세요.' 비즈니스적 조언이라면 '검토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받지 마세요'는 조언이 아니라 요청이었다.
묻지 않았다. 서윤이 말하지 않는 것을 캐묻지 않는 것. 담요를 놓고 덮어주지 않는 것처럼, 질문을 놓고 답을 요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서 작동하는 신뢰의 규칙이었다.
"알겠습니다. 당분간 보류하겠습니다."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가에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윤의 손이 커피잔을 잡을 때 힘이 평소보다 강했다는 걸 설희는 봤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만큼.
───
그 시각. 미래센터 1층 카페 구석. 이지우는 아직 카페에 있었다. 노트북을 펼치고 새 파일을 열었다.
JW캐피털 내부 분석. 미래리테일 합병 건. 메모를 입력했다.
'설희: 예상보다 침착. 숫자를 먼저 확인하는 타입. 서윤에게 확인하겠다는 반응 — 두 사람 사이의 의사결정 구조 확인됨. 서윤이 실질적 결정권. 접근 경로: 서윤 직접 면담 필요.'
저장했다.
이지우는 에스프레소 잔을 손으로 돌렸다. 빈 잔이었다. 잔 바닥에 크레마 자국이 원형으로 남아 있었다.
서윤에게 먼저 갔으면 더 빨랐을 것이다. 설희를 먼저 만난 것은 우회였다. 우회한 이유가 있었다. 서윤에게 직접 가면, 서윤이 이지우를 기억하는지 확인할 수 없다. 설희를 통해 보고되면, 서윤의 반응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서윤이 '받지 마세요'라고 말했을 가능성. 이지우는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노트북에 새 줄을 추가했다.
'서윤의 반응 확인 후 2차 접근. 데이터는 구실. 본 목적: 면담.'
저장하고 노트북을 닫았다.
이지우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카페 문을 나서면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연락처 목록을 스크롤했다. '강서윤'이라는 이름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3년 전에 저장한 번호. 한 번도 걸지 않은 번호.
아직은 아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봄바람이 미래센터 앞 광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지우는 그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빠르게.
다음에. 이 카드가 필요해질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