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여론
서윤은 아침 6시에 일어났다. PH129 거실. 태블릿을 열었다. 뉴스 앱을 켰다.
사진이 모든 포털 메인에 걸려 있었다. 경제면이 아니라 연예면이었다. 제목이 다양했다.
[미래리테일·아르테미스 합병의 진짜 이유?] [재벌가 GL 커플, 기자간담회 후 포착] [합병 아니라 결혼? 업계 반응 엇갈려]
댓글 3만 개. 찬반 양분. 서윤은 댓글을 읽지 않았다. 댓글은 여론이 아니라 소음이다. 여론은 숫자로 확인하는 것이다.
대신 주가를 확인했다.
미래리테일 전일 대비 플러스 2.1퍼센트.
올랐다. 사진이 터진 뒤에 주가가 올랐다. 서윤이 차트를 확대했다. 매수 패턴을 읽었다. 기관이 아니라 개인 투자자의 유입이 급증해 있었다. 화제성이 매수세로 전환된 것이다. SNS에서 미래리테일을 검색한 사람들이 주가 차트를 보고, 합병 시너지 수치를 보고, 매수 버튼을 누른 것이다. 의외의 효과.
기관은 달랐다. 기관은 화제성이 아니라 신뢰도를 본다. 개인 투자자의 매수세는 일시적이다. 기관의 판단이 바뀌면 주가는 다시 내려간다. 사진이 기관의 신뢰도에 어떤 영향을 줄지가 관건이었다.
커피를 내렸다. 설희가 내린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서윤이 먼저 주방에 섰다.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으면서 생각했다. 어제 일을 의식한 건 아니었다. 그냥 먼저 일어났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미래센터 34층. 임시 이사회. 설희가 이사회실에 들어섰을 때 열두 개의 시선이 꽂혔다. 평소보다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사진을 본 뒤의 시선. 사진 속의 설희와 지금의 설희를 비교하고 있는 눈들이었다.
승현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빈자리에. 이사회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배석이 아니었다. 부사장 직위로 참석하면서 상석에 앉는 것. 그 배치 자체가 메시지였다. 나는 이 자리의 주인이라는.
"설희야."
승현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미소가 어제보다 깊었다. 무기를 가진 사람의 여유였다.
"오빠."
설희는 자리에 앉았다. 등을 기대지 않았다. 등받이와 등 사이에 3센티미터의 간격을 두었다. 기대는 순간 방어가 풀린다.
승현이 화면을 켰다. 사진이 떠올랐다. 설희와 서윤이 복도에서 1센티미터 거리에 있는 사진. 프로젝터 빛이 이사회실 벽면에 사진을 크게 투사했다. 설희는 자신의 얼굴을 벽면에서 봤다. 기울어진 몸. 서윤의 손. 입술과 입술 사이의 거리. 이사회실의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이 사진에 대해 이사회에 설명이 필요합니다."
설희는 시선을 사진에서 거두지 않았다. 1초. 자신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돌아서서 이사들을 봤다.
"넘어지는 걸 파트너가 잡은 것입니다. 키스가 아닙니다."
"시장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보수 이사 한 명이 말했다. 김 이사. 아버지 시절부터 이사회에 있었던 사람. 보수적인 시각의 대변인이었다.
"합병을 추진하는 두 대표의 사적 관계가 시장에 불확실성을 줍니다. 이미지 관리가 필요합니다."
설희가 김 이사를 봤다. 3초간.
"미래리테일 주가가 어제 2퍼센트 올랐습니다. 불확실성이 아니라 화제성입니다."
"일시적인 반등일 수 있습니다."
"일시적이든 아니든, 현재 숫자는 긍정적입니다. 김 이사님께서 시장을 읽는 기준이 댓글이 아니라 주가라면요."
김 이사의 입이 닫혔다. 숫자를 앞에 놓으면 감정론은 후퇴한다. 설희가 아버지에게 배운 것 중 가장 효과적인 기술이었다.
승현이 끼어들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희야. 가문의 이름으로 이런 사진이 돌아다니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잖아."
가문의 이름. 그 단어가 설희의 귀를 스쳤다. 아버지가 쓰던 단어였다. 같은 억양, 같은 무게. 승현이 아버지의 언어를 복사하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이사회실에서 아버지의 언어를 쓰면 보수 이사들이 반응한다는 것을 승현은 알고 있었다.
"가문의 이름은 주가로 증명합니다. 사진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정적.
승현의 미소가 굳었다. 눈가의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설희는 봤다. 짧았다. 회복이 빨랐다. 승현은 표정 관리가 능숙한 사람이었다. 설희만큼.
이사회가 끝났다. 표결 없이 해산. 승현이 사진 이슈를 공식 안건으로 올리지 못한 것 자체가 설희의 승리였다.
───
설희가 복도에서 서윤에게 전화했다. 이사회실에서 30미터 떨어진 비상구 앞.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이사회 끝났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승현이 사진을 무기로 썼습니다. 이사회를 흔들려 했어요."
"결과는."
"안건 불성립. 이번엔 막았습니다."
서윤이 잠깐 침묵했다. 전화기 너머로 키보드 소리가 멈추는 것이 들렸다.
"계약 조항 11번. 공식 석상 연기 범위."
설희가 숨을 들이쉬었다. 비상구의 차가운 공기가 폐를 채웠다.
"네."
"계약 범위를 넘었습니까, 우리."
그 질문이 전화기 너머로 왔다. 서윤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건조했다. 감정이 없는 질문이었다. 비즈니스적인 확인. 계약의 경계를 점검하는 질문.
설희가 답했다.
"넘지 않았습니다."
멈췄다. 비상구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차가웠다.
"아직은."
전화 너머에서 서윤의 호흡 소리가 들렸다. 들렸다고 생각했다. 바람 소리였을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설희는 비상구 앞에 혼자 서서 핸드폰 화면을 봤다. 통화 시간: 1분 42초.
아직은. 왜 그 말을 덧붙인 거야. '넘지 않았습니다'에서 끝내면 됐다. '아직은'을 붙이는 순간, 넘을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서윤에게. 자신에게.
───
오후 4시. 설희의 사무실. 장미라가 들어왔다.
"이사님. 사진 유출 경로 추적 결과가 나왔습니다."
설희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기자간담회 현장에 배정된 카메라맨 중 한 명이 프리랜서입니다. 해당 프리랜서의 소속 PR회사를 추적했습니다."
장미라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법인 등기부가 화면에 떠 있었다.
"크로노스 캐피털의 로비스트가 운영하는 회사입니다. 설립일 6개월 전. 사업 실적 없음. 직원 2명."
설희의 눈이 좁아졌다. 페이퍼컴퍼니. 사진 한 장을 위해 만든 회사였다.
"위치도 분석했습니다. 해당 카메라맨은 간담회장 안이 아니라 복도에 미리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복도 모서리. 정확히 그 각도에서만 두 분이 겹쳐 보이는 위치입니다."
설희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처음으로. 등받이가 등에 닿았다.
계산된 사진이었다. 넘어지는 것까지 계산했을 리는 없다. 카펫 이음새는 우연이었다. 카메라의 위치는 우연이 아니었다. 복도에 카메라를 미리 배치해놓고, 두 사람이 가까이 서는 어떤 순간이든 포착하려 한 것이다.
크로노스가. 승현이.
"서윤 대표에게 공유하세요."
"알겠습니다."
장미라가 나갔다.
설희는 사진을 다시 봤다. 태블릿 화면의 그 사진. 각도 때문이었다. 카메라의 위치 때문이었다. 기울어진 건 자신이었고, 잡은 건 서윤이었다. 사진은 거짓이었다. 키스는 없었다.
거짓인 사진이 보여주는 것이 왜 이렇게 선명한 거야.
설희는 태블릿을 덮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봤다. 설희의 손이 멈췄다.
승현이었다.
이사회가 아니라 개인 번호로. 업무 시간이 끝난 뒤에. 설희가 전화를 받았다.
"설희야."
승현의 목소리가 이사회실에서와 달랐다. 부드러움이 아니라 나직함이었다. 형의 목소리였다.
"오빠."
"저녁에 시간 되니? 성북동에서 밥 먹자. 오래간만에."
설희의 손이 핸드폰을 쥔 채 멈췄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데요."
"밥 먹으면서 하자. 복잡한 얘긴 아니야."
승현이 전화를 끊었다.
설희는 핸드폰 화면을 봤다. 통화 시간: 23초.
복잡한 얘긴 아니라고 했다. 승현이 '복잡하지 않다'고 말할 때는 언제나 복잡한 얘기였다. 성북동 본택에서 밥을 먹자는 것. 아버지의 집에서. 가족의 테이블에서.
이사회에서 실패한 승현이 개인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이다. 무엇을 제안하려는 것인지는 모른다.
아는 것은 하나. 승현이 먼저 손을 내밀 때는, 그 손에 칼이 있든 악수가 있든, 거절하면 다음 수가 더 거칠어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