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1센티미터
미래리테일·아르테미스 합병 기자간담회. 오전 11시.
설희는 단상 뒤에 서 있었다. 네이비 수트. 브루넬로 쿠치넬리 캐시미어 블라우스. 진주 귀걸이. 거울 앞에서 30분을 쓴 갑옷이었다. 머리카락 한 올, 블라우스의 주름 한 줄까지 통제한 뒤에야 호텔 방을 나왔다. 이 통제가 설희의 방어였다.
카메라 50대. 기자 70명. 조명이 뜨거웠다. 단상 위의 조명은 일반 실내보다 3도 높은 열기를 품고 있었고, 그 열기가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설희는 그 열기를 무시했다. 무시할 수 있었다. 더 뜨거운 자리에 앉아본 적이 있으니까.
서윤이 옆에 섰다. 검정 생로랑 테일러드 재킷. 두 사람 사이 거리, 30센티미터. 계약서에 명시된 공식 석상 거리. 이 30센티미터를 유지하는 것이 두 사람의 규칙이었고, 두 사람 모두 그 규칙을 지키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위임장 확보 현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설희가 마이크를 잡았다. 목소리가 이사회실에서보다 한 톤 낮았다. 카메라 앞의 목소리. 이것도 갑옷의 일부였다.
현재 확보 의결권 49퍼센트. 과반까지 1퍼센트. 숫자를 말할 때 설희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49라는 숫자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아는 사람은 이 방에 두 명뿐이었다. 나머지 68명의 기자에게 49는 '거의 과반'이었다. 설희와 서윤에게 49는 '아직 과반이 아닌' 숫자였다.
서윤이 기술 로드맵을 이어받았다. AI 물류 통합 플랫폼. 3년 로드맵. 서윤의 목소리는 설희와 달랐다. 낮고 건조하고, 설득하지 않고 사실을 놓는 어조. 데이터를 읽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가 스스로 말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질문 시간이 왔다.
첫 번째 질문. 합병 후 인력 구조조정 계획. 설희가 답했다. 두 번째 질문. 크로노스 캐피털의 반대 입장에 대한 대응. 서윤이 답했다.
세 번째 질문.
"두 분의 관계가 단순한 비즈니스 이상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마디 해주시겠습니까."
설희의 손이 마이크 위에서 경직됐다. 손가락 하나가 마이크 몸체를 누르는 힘이 달라진 것을 설희 자신만 알았다. 복구했다.
"저희는 합병 파트너입니다. 사적 관계에 대한 질문은 오늘 안건이 아닙니다."
"SNS에서는 두 분의 결혼이 화제입니다. 시청자들이 궁금해합니다."
시청자. 기자가 말하는 시청자는 클릭 수였다. 합병 시너지 2,400억보다 두 여성의 결혼이 더 많은 클릭을 만든다는 계산. 설희는 그 계산을 읽었다.
설희가 답하려는 순간, 서윤이 마이크에 가까이 다가갔다.
"합병 시너지가 연간 2,400억 원입니다. 그것보다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투자를 다시 생각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기자들이 웃었다. 긴장이 풀렸다. 서윤이 설희를 보지 않았다. 카메라를 봤다. 렌즈 너머의 시청자를 향해. 설희는 서윤의 턱선을 봤다. 조명 아래서 그림자가 날카롭게 떨어져 있었다.
간담회가 끝났다.
───
설희가 단상에서 내려와 복도를 걸었다. 경호원 두 명이 양쪽에 섰다. 서윤이 반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세 시간 전부터 신은 하이힐. 한 시간 넘게 서 있었다. 발바닥에 피로가 쌓여 있었다. 열 개의 발가락이 구두 안에서 저리고 있었다.
복도 끝 모서리를 돌 때였다.
하이힐 뒤축이 카펫 이음새에 걸렸다.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중심이 무너지는 속도는 계산할 수 없었다.
서윤의 손이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설희의 허리를 잡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0이 됐다.
서윤의 손이 설희의 허리에 있었다. 손바닥 전체가 블라우스 위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설희의 얼굴이 서윤의 어깨 높이에 있었다. 서윤의 재킷에서 올라오는 향이 코끝에 닿았다. 두 사람의 입술 사이 거리.
1센티미터.
1센티미터도 안 됐을 것이다.
그 순간.
셔터 소리.
복도 끝에서. 카메라 하나. 파파라치가 아니었다. 아까 간담회장에 있던 프리랜서 카메라맨이었다. 렌즈가 두 사람을 향해 있었다. 검은 렌즈 안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반사되고 있었다.
서윤이 먼저 반응했다. 설희의 허리에서 손을 뗐다. 손이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 설희는 그 시간이 셔터보다 느렸다는 것을 알았다.
설희가 중심을 잡았다. 서윤의 손이 떠난 허리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손바닥 모양의 온기. 블라우스 한 겹을 사이에 둔 체온이었다.
경호원이 카메라맨 쪽으로 움직였다. 이미 늦었다.
"괜찮습니까."
서윤이 물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빨랐다. 서윤의 목소리가 빨라지는 것을 처음 들었다.
"괜찮습니다."
설희가 답했다. 걸음을 다시 뗐다. 발이 떨리지 않게 집중하면서. 하이힐의 뒤축이 카펫 위를 정확하게 딛는 소리에만 의식을 모으면서.
───
30분 뒤. 설희가 차 뒷좌석에서 장미라의 전화를 받았다. 가죽 시트의 차가운 감촉이 등을 눌렀다.
"이사님. 실시간 검색어 확인하셨습니까."
설희가 핸드폰을 봤다.
1위: #미래리테일 2위: #합병결혼 3위: #키스
키스.
설희가 사진을 열었다. 포털 메인에 걸려 있었다.
사진 속에서 서윤의 손이 설희의 허리에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웠다. 각도 때문이었다. 카메라의 위치 때문에 입술이 닿아 보였다.
닿지 않았다. 설희는 알고 있었다. 1센티미터가 남아 있었다.
사진은 1센티미터를 지워버렸다.
댓글이 쏟아지고 있었다. 설희는 스크롤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빠르게 미끄러졌다.
[대박 ㅋㅋㅋ 진짜야?] [재벌가 GL 실화냐] [합병 쇼 아닌가? 주가 보고 판단하자] [이거 연기임 ㅋㅋ 눈 봐 눈] [아닌데... 허리 잡는 손 봐. 저건 반사야]
마지막 댓글에서 설희의 눈이 멈췄다.
반사. 맞았다. 서윤의 손은 반사적이었다. 생각보다 먼저 움직인 손이었다. 계산이 아니었다.
그게 왜 더 문제인지를 설희는 설명할 수 없었다. 계산된 행동이라면 비즈니스로 분류할 수 있다. 반사는 분류할 수 없다. 반사는 몸이 먼저 결정한 것이니까.
서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사진 확인했습니다. 법무팀에서 삭제 요청 진행 중입니다.]
설희가 답했다.
[감사합니다.]
보내고 나서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감사합니다. 이 두 글자가 맞는 건가. 뭐에 대한 감사인 거야. 사진 삭제에 대한? 넘어질 때 잡아준 것에 대한?
───
PH129. 밤 9시. 설희가 현관에서 구두를 벗었을 때, 서윤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사진이 화면에 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 봤다. 사진을 본 뒤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거실의 조명이 두 사람 사이를 고르게 비추고 있었다. 숨길 곳이 없는 빛이었다.
설희가 먼저 말했다.
"저 사진, 삭제 요청했습니다."
서윤이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삭제해도 본 사람은 기억합니다."
설희가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기억은 통제할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서윤이 일어섰다. 설희와의 거리가 2미터였다. 거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30센티미터도, 1센티미터도 아닌, 2미터. 의식적인 거리였다.
"이사님."
"네."
"넘어진 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잡은 것도 제 잘못이 아닙니다."
설희가 서윤을 봤다. 서윤의 눈이 평소와 같았다. 설명하는 눈. 변명이 아니라 사실을 진술하는 눈. 이 눈을 보면서 설희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지금 자신에게 말하는 건지, 나에게 말하는 건지.
"알고 있습니다."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에서 일어나 자기 방 쪽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서 멈췄다.
"한 가지."
"네."
"내일 이사회에서 질문이 나올 겁니다. 준비하세요."
"어떤 질문이요."
서윤이 돌아봤다. 눈이 달라져 있었다. 설명하는 눈이 아니었다. 묻는 눈이었다.
"진짜냐고."
문이 닫혔다.
설희가 현관에 혼자 서 있었다. 코트를 벗지 않은 채.
진짜냐고. 진짜가 뭐야. 사진이? 키스가? 아니면.
손이 올라갔다. 무의식적으로. 입술 위에 손가락이 닿았다. 입술이 건조했다. 립밤을 바르지 않았다. 그게 아니었다.
1센티미터.
닿지 않았다. 알고 있다. 그런데 닿지 않은 거리가 닿은 것보다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없는 접촉이 있는 접촉보다 피부에 가까웠다.
손을 내렸다. 코트를 벗었다. 옷걸이에 걸었다. 정확하게. 루틴으로 돌아가야 했다. 루틴은 감정의 반대편이니까.
감정은 나중에 처리하면 된다.
나중이 언제까지 가능한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