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경계선
PH129. 밤 11시.
설희는 서재에 있었다. 스탠드 하나만 켜놓은 채 태블릿으로 백가 재무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었다. 거실의 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서재의 스탠드 빛만이 설희의 손과 태블릿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5년간의 자금 흐름. 연결재무제표. 자회사 간 거래 내역. 숫자들이 화면 위를 흘렀다. 대부분은 정상이었다. 이사회가 승인한 투자, 배당, 자사주 매입. 숫자가 들어오고 나가는 경로가 깨끗했다. 백가의 재무는 아버지가 30년간 관리한 구조였고, 그 구조는 정밀했다. 정밀한 사람이 만든 정밀한 시스템.
설희는 연도별로 스크롤했다. 2019년. 정상. 2020년. 정상. 2021년.
멈췄다.
2021년 3월. 해외 SPC로 이전된 자금 47억 원. 목적: 동남아 유통망 투자. 승인: 백종운 회장 단독.
단독 승인. 이사회 결의 없이 회장 직인만으로 집행된 자금. 47억이면 이사회 보고 기준선인 50억 미만이었다. 정확히 3억을 남기고 기준선 아래에 맞춘 금액이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정확했다.
그 투자의 사후 보고서가 없었다.
설희는 화면을 확대했다. 자금 이체 기록. 미래리테일 본사 계좌에서 싱가포르 소재 SPC 'Lumen Asia Holdings'로 이체. Lumen Asia. 이름을 처음 보는 법인이었다. 백가의 해외 투자 포트폴리오에 이 이름은 없었다. 자회사 목록에도, 관계사 목록에도.
47억이 어디로 갔는지, 수익이 발생했는지, 청산됐는지. 아무 기록도 없었다. 자금이 나간 뒤 5년간, 이 SPC에 대한 어떤 후속 문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47억이 증발한 것처럼.
비자금.
그 단어가 떠올랐다. 설희는 태블릿을 내려놓으려다가 멈췄다. 아직 확실하지 않다. 아버지가 개인적 사유로 자금을 이동시켰을 가능성. 사후 보고서가 분실됐을 가능성. 동남아 투자가 실패하여 손실 처리됐을 가능성. 어느 쪽이든 증거가 필요했다. 추측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
장미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2021년 3월 해외 SPC 건. Lumen Asia Holdings. 투자 실체 확인 부탁합니다. 조용히.]
보내고 나서 태블릿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눈이 피곤했다. 스탠드 빛 아래서 3시간째 숫자를 읽고 있었다. 숫자들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서재 문에서 소리가 났다.
노크 없이 문이 열렸다.
강서윤이 서 있었다. 트레이닝 팬츠에 긴팔 티. 손에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커피가 아니었다.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물이었다.
"공용이라고 했습니다."
설희가 말했다. 서재를 가리키며.
"저도 공용이라서 들어온 겁니다."
서윤이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밤 11시의 목소리. 사무실에서 듣는 목소리와 달랐다. 각이 없었다.
설희는 반박하려다 입을 닫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서윤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었다. 아무 말 없이 일을 시작했다. 화면에 크로노스 대응 시나리오가 떠 있었다. 파일명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오늘 날짜. 새로 작성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스탠드 빛 아래서. 서재의 창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낮게 깔려 있었다. 서윤의 타이핑 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서재를 채웠다. 설희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재무 데이터를 계속 읽었다.
가끔 서윤이 타이핑을 멈추고 화면을 읽는 시간이 있었다. 그 정적 속에서 설희가 태블릿 화면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서윤은 그 소리를 배경으로 시나리오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어색하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다. 48시간 전까지 이 서재는 설희 혼자 쓰는 공간이었다. 혼자 앉아서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론을 내리던 곳. 지금은 건너편에 다른 사람의 호흡이 있었고, 다른 사람의 키보드 소리가 있었고, 다른 사람의 체온이 같은 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그런데 좁아진 느낌이 아니라, 공간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1시간이 지났다. 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나갔다. 커피를 따르러. 돌아오면서 물었다.
"뭘 보고 계십니까."
"백가 재무입니다."
"뭔가 나왔습니까."
설희가 잠깐 멈췄다. 말할지 말지 1초간 계산했다. 47억. Lumen Asia. 아버지의 단독 승인. 이 정보를 서윤에게 공유하면 합병 파트너에게 백가의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다. 공유하지 않으면 혼자 감당해야 한다.
"아직은 확인 중입니다."
서윤이 더 묻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노트북 화면을 다시 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타이핑을 재개했다.
묻지 않는 것. 설희가 '아직'이라고 말했을 때 '아직'의 무게를 읽고, 더 파고들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사람의 신뢰 표현 방식이라는 걸 설희는 이제 알았다. 서윤은 정보가 아니라 타이밍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
새벽 1시가 넘었다.
설희의 고개가 천천히 숙여졌다. 태블릿이 무릎에서 미끄러져 소파 쿠션 위로 내려앉았다. 숨소리가 깊어졌다. 잠들었다.
서윤은 그것을 봤다. 노트북 너머로.
설희의 얼굴이 스탠드 빛 아래서 평소와 달랐다. 이사회실의 칼날 같은 표정이 아니었다. 눈가의 힘이 풀려 있었다.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미간의 주름이 사라져 있었다. 자고 있는 사람의 얼굴. 갑옷을 벗은 얼굴. 30대 초반의, 피곤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서윤은 소파 뒤에 놓인 담요를 봤다. 캐시미어. 접혀 있었다. 설희가 서재에서 가끔 쓰는 것이리라.
들었다.
설희에게 걸어갔다. 1미터. 50센티미터. 담요를 펼쳤다.
멈췄다.
덮어주면 다른 의미가 된다. 어깨 위에 올리는 순간, 계약서 어디에도 없는 행동이 시작된다. 파트너의 컨디션을 관리하는 것은 비즈니스다. 잠든 파트너에게 담요를 덮어주는 것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그 경계선이 담요 한 장의 두께만큼 얇았다.
서윤은 담요를 소파 팔걸이 위에 놓았다. 설희의 어깨에서 10센티미터 떨어진 곳.
놓고 나왔다. 덮어주지는 않았다. 그건 다른 의미니까.
서재 문을 닫았다. 조용히. 손잡이를 잡고 문이 찰칵 소리 나지 않게 천천히 밀었다.
복도에서 멈췄다. 3초.
왜 멈추는 거야.
걸었다. 자기 방으로.
이불 속에 들어간 뒤에도 서재의 스탠드 빛이 눈 뒤에 남아 있었다. 그 빛 아래서 잠든 사람의 얼굴이. 미간의 주름이 사라진 얼굴이.
서윤은 눈을 감았다. 10센티미터. 그 거리가 정확했다고 생각했다. 정확해야 했다.
───
아침 6시. 설희가 서재에서 눈을 떴다. 목이 뻣뻣했다. 어깨가 굳어 있었다. 서재 소파에서 잠든 것이다.
어깨 옆에 담요가 있었다. 소파 팔걸이 위에. 접혀 있지 않았다. 누군가 펼쳤다가 놓은 것처럼 보였다.
설희는 그 담요를 봤다. 3초.
서윤이 놓은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이 서재에 들어오지 않았다.
덮어주지 않았다. 놓기만 했다. 어깨에서 10센티미터. 그 거리감이.
이 사람답다.
감사를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의미가 달라지니까.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순간, 담요가 단순한 직물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된다. 설희는 그 변환을 막았다. 아직은.
대신 주방으로 갔다. 커피를 내렸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고, 분쇄 굵기를 조절하고, 드리퍼에 종이 필터를 세팅했다.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었다. 원두가 부풀어 오르면서 향이 올라왔다. 쓰고 진한 향. 설탕 없이. 서윤의 커피.
설희는 커피를 내리면서 생각했다. 이것은 감사의 표현이 아니다. 파트너의 아침 컨디션을 위한 비즈니스적 배려다. 커피 한 잔의 원가는 3,000원. 감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거짓말인 걸 알면서 스스로에게 하는 설명이었다.
서윤이 주방에 나왔을 때, 테이블 위에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갓 내린 것이었다.
서윤은 그 커피를 봤다.
설희는 이미 조깅을 나간 뒤였다. 현관의 운동화가 없었다. 커피를 내려놓고,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나간 것이다. 그 동선이 정밀했다.
서윤이 커피를 들었다.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웠다. 쓴맛이 혀를 감았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서윤이 마시는 원두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관찰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언제부터.
누가 내렸는지 아는 커피는 맛이 다른 법이었다. 물론 그건 미각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의 문제였다.
서윤은 커피를 마시면서 창 너머 아침을 봤다. 도시가 깨어나고 있었다.
계약서에 커피 항목은 없다.
담요 항목도 없다.
없는 항목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