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첫 번째 표
아르테미스 본사 52층 회의실. 아침 9시.
서윤이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었다. 위임장 현황판이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오 팀장이 30분 전에 확인 전화를 받고 숫자를 고쳐 적은 것이다. 마커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아 글자 끝이 번들거렸다.
확보: 4곳. 미정: 3곳. 이탈 위험: 1곳.
한영자산이 찬성 쪽으로 넘어왔다. 어제 미팅의 결과였다. 정하늘 대표의 악수가 형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숫자가 증명한 셈이었다. 서윤은 화이트보드의 '4'를 봤다. 3이 4가 되기까지 설희와 세 번의 프레젠테이션, 두 번의 전략 회의, 한 번의 불쾌한 질문이 필요했다. 숫자 하나의 무게가 그만큼이었다.
"과반까지 2퍼센트입니다."
오 팀장이 말했다.
"다음 타겟은 동원투자증권입니다. 중소형 기관이지만 보유 지분 1.8퍼센트. 여기까지 확보하면 사실상 과반입니다."
서윤이 동원투자증권의 프로필을 읽었다. 대표이사 김정수. 운용 성향: 가치투자 지향. 포트폴리오: 유통·물류 섹터 비중 35퍼센트. 합병 시너지가 직접적으로 포트폴리오 가치에 영향을 주는 기관이었다. 숫자로 설득하면 넘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미팅 언제 잡을 수 있어?"
"오늘 오후 3시 가능합니다. 대표가 직접 만나겠다고 했습니다."
직접 만나겠다. 좋은 신호이거나 나쁜 신호였다. 진지하게 검토하겠다는 뜻이거나, 양쪽 제안을 비교한 뒤 더 높은 가격을 부르겠다는 뜻이거나. 서윤은 전자이기를 바랐지만, 이 업계에서 희망은 전략이 아니었다.
"설희 이사님에게 연락해."
───
오후 3시. 설희가 동원투자증권 본사 로비에서 서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서윤을 보고 태블릿을 닫았다.
이번이 세 번째 합동 프레젠테이션이었다. 호흡이 맞아가고 있었다. 첫 번째는 누가 먼저 말할지 시선으로 확인해야 했고, 두 번째는 타이밍이 겹쳐 0.5초 멈추는 순간이 있었다. 세 번째는 달랐다. 설희가 시너지 수치를 제시하면 서윤이 기술 로드맵으로 받았다. 설희가 마지막 슬라이드에서 호흡을 고르면 서윤이 정확히 그 타이밍에 보충 설명을 이어갔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교차하는 리듬이 안정적이었다. 리허설한 적 없이.
동원투자증권 김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한 번은 숫자를 확인하는 끄덕임이고, 두 번째는 판단이 기울었다는 끄덕임이었다. 서윤은 그 차이를 읽었다.
"합병 시너지는 이해합니다. 몇 가지 추가 검토 후 답을 드리겠습니다."
악수를 했다. 김 대표의 악수가 단단했다. 정하늘보다 짧았지만 힘이 있었다. 형식적인 악수가 아니었다.
설희와 서윤이 건물을 나섰다. 봄바람이 불었다. 설희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잘 됐습니다."
서윤이 말했다.
"아직입니다. 답이 올 때까지는."
"긍정적이었어요. 악수의 힘으로 판단하면."
설희가 서윤을 봤다.
"악수로 판단합니까."
"숫자 다음으로 정확합니다."
설희는 반박하지 않았다.
차에 올랐다. 운전석 뒤에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장미라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동원투자증권 김 대표, 오늘 오전에 백승현 부사장과 조찬 미팅이 있었습니다.]
설희의 손이 멈췄다. 화면 위에서. 글자를 다시 읽었다. 오전. 조찬. 승현.
오전에 승현을 만나고, 오후에 우리를 만난 것이다. 김 대표의 끄덕임 두 번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숫자 확인이었고, 두 번째는 판단이 아니라 비교였을 수 있다. 승현이 아침에 제시한 조건과 설희가 오후에 제시한 숫자를 저울에 올려놓는 끄덕임.
악수가 단단했다고 서윤이 말했다. 단단한 악수가 반드시 찬성의 악수는 아니었다. 거절 전에도 사람들은 단단하게 악수한다. 미안하다는 뜻을 손에 담아서.
───
저녁 7시. 설희의 핸드폰이 울렸을 때, 설희는 미래센터 사무실에서 내일 일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장미라의 이름이 화면에 떴다.
"이사님. 동원투자증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설희는 알고 있었다. 전화기를 귀에 대기 전에 이미. 장미라의 목소리에 있는 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톤이 아니었다.
"내부 검토 결과 유보하기로 했답니다."
유보. 거절보다 나쁜 단어. 거절은 적어도 결론이다. 결론이 있으면 다음 수를 둘 수 있다. 유보는 시간을 빼앗는다. 주총까지 D-18. 유보 상태로 일주일이 지나면 설득할 시간이 남지 않는다.
"이유가 뭐래요."
"합병 구조에 대한 추가 분석이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거짓말이었다. 추가 분석이 필요한 게 아니라, 더 높은 가격이 제시된 것이다. 승현이 아침에 무엇을 제안했는지가 보였다. 합병 반대 시 프리미엄 매입. 혹은 별도 블록딜. 숫자의 전쟁에서 승현은 더 큰 숫자를 꺼낸 것이다.
전화를 끊었다.
PH129 거실. 서윤이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설희가 현관에서 구두를 벗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설희의 표정을 보고 알았다.
"동원."
"유보입니다."
서윤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노트북 위의 손가락이 멈춘 것을 설희는 봤다.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 열 개가 동시에 정지하는 모습. 그것이 서윤의 동요였다.
"승현이 오전에 먼저 만났습니다."
서윤이 노트북을 닫았다. 천천히. 화면이 접히는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예상은 했습니다."
"예상했으면서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확인되지 않은 걸 말하면 판단이 흐려집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논리적으로 정확한 문장이 감정적으로 부족할 때, 설희는 반박할 도구가 없었다.
설희가 창가에 섰다. 테헤란로의 불빛이 저녁 어둠 속에서 줄지어 흐르고 있었다.
"악수하면서 뒤통수를 치는 사람은 처음이 아닙니다."
설희가 말했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다음은 악수를 먼저 하지 않으면 됩니다."
서윤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설희 옆에 섰다. 나란히 창밖을 보면서. 두 사람의 어깨 사이 거리가 20센티미터쯤 됐다.
"다음은 제가 악수하겠습니다."
설희가 서윤을 봤다.
"제 악수는 놓지 않으니까."
서윤의 목소리가 낮았다. 평소보다. 설희는 그 음량의 변화를 알아챘다. 이 사람은 진심일 때 목소리가 낮아진다. 회의실에서 데이터를 읽을 때보다, 프레젠테이션에서 숫자를 나열할 때보다, 지금 이 순간의 목소리가 가장 낮았다.
비즈니스적 판단일 것이다. 계약 파트너의 손실은 곧 자신의 손실이니까.
그런데.
그런데 왜 '놓지 않으니까'라는 말이 악수를 넘어서 들리는 거야.
───
밤 11시. 서윤은 서재에서 혼자 전화를 걸었다. 문을 닫고. 목소리를 낮추고.
"오 팀장. 내일 시장 개장 전에 미래리테일 주식 매수해. 아르테미스 자체 자금으로."
"얼마나요?"
"1퍼센트.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의자에 등을 기댔다.
계약서에 없는 행동이었다. 합병 당사자가 상대 회사 주식을 시장에서 직접 매수하는 것은 계약 범위 밖이었다. 법적으로 5퍼센트 미만이면 공시 의무는 없지만, 1퍼센트라도 패턴이 포착되면 금감원에서 주목한다. 내부 정보를 가진 합병 당사자의 시장 매수. 설명하기 어려운 거래였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손이 전화기를 들었다. 왜?
숫자가 부족하니까. 위임장이 흔들리니까. 합리적인 판단이다.
서윤은 모니터를 껐다. 어둠 속에서 스탠드 불빛만 서재를 비추고 있었다.
합리적인 판단이 아닌 것 같다는 걸 서윤 자신은 알고 있었다. 동원투자가 유보했을 때, 숫자가 무너진 것은 맞다. 1퍼센트를 매수하면 위임장 부족분을 일부 메울 수 있다. 논리적이다.
논리적인 이유 뒤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창가에서 설희가 "다음은 악수를 먼저 하지 않으면 됩니다"라고 말할 때, 설희의 어깨가 평소보다 좁아 보였다. 갑옷을 입고도 좁아지는 어깨. 그것을 본 순간 서윤의 손이 전화기를 집었다.
그 이유를 서윤은 합리적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오 팀장이었다.
"대표님. 한 가지 보고 드립니다. 내일 매수 건 관련해서."
"뭔데."
"금감원 시장감시팀에서 이번 주부터 미래리테일 관련 거래를 모니터링 중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크로노스 측 거래를 추적하는 건데, 우리 매수도 같이 잡힐 수 있습니다."
서윤의 손이 멈췄다.
"출처는."
"증권사 컴플라이언스 쪽 루트입니다. 확인된 정보입니다."
서윤이 3초간 말이 없었다.
"매수 진행해. 타이밍만 분산시켜. 개장 직후가 아니라 오후 장중으로."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금감원. 모니터링. 합리적인 판단이라면 여기서 멈춰야 한다. 리스크가 계산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럼에도 매수를 지시했다.
서윤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서재 문을 열었다. 복도가 어두웠다. 설희의 방 쪽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틈 아래로. 아직 깨어 있다는 뜻이었다.
서윤은 그 불빛을 봤다. 3초.
문을 닫았다. 자기 방으로 갔다.
내일 시장이 열리면 숫자가 움직인다. 그 숫자가 어디로 가는지에 따라 이 전쟁의 판도가 바뀐다.
그리고 금감원이 그 움직임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