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그분
성북동 본택. 새벽 1시.
백승현은 서재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서재가 아니라 자신의 서재. 2층 동쪽 끝. 창밖으로 성북동의 오래된 소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윤곽만 보였다.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만이 아는 풍경이었다. 소나무 너머로 북악산 능선이 낮게 깔려 있었고, 능선 위에 별이 두어 개 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별이 보이는 집. 그것이 성북동 본택의 가격이었다.
태블릿에 영상통화 화면이 떠 있었다. 상대방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음성만. 변조되지 않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이 방 안에 승현뿐이었다.
"사내 보고서 유포는 예정대로 진행됐습니다."
"반응은."
"직원 여론 부정적으로 선회 중입니다. 사내 게시판 댓글 300건 돌파했고, 노조 쪽에서도 움직임이 있을 겁니다."
"좋아."
목소리가 말했다. '좋아'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방식이 독특했다. 만족이 아니라 확인. 체스판에서 말이 예정된 칸에 도착했을 때의 톤이었다.
"다음은 기관입니다. 한영자산이 내일 설희 측과 미팅을 잡았다는 정보가 있어요. 차단할 수 있습니까."
승현이 미소 지었다. 부드럽게. 회의실에서, 가족 모임에서, 기자 앞에서 수천 번 써먹은 미소. 이 미소를 본 사람은 안심했다. 승현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이 미소를 더 정밀하게 만들었다.
"한영 쪽은 제가 별도로 접촉하겠습니다."
"부사장님."
목소리가 톤을 바꿨다. 낮아졌다. 명령과 요청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톤이었다.
"일정대로 진행하세요. 주총 전에 과반 확보가 안 되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승현이 말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화면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고개를 숙이는 동작. 습관이었다. 아버지에게도 하지 않던 것을 이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했다. 그 차이가 의미하는 바를 승현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이 사람이 가진 것이 아버지보다 컸으니까.
통화가 끊겼다. 화면이 검어졌다.
승현은 태블릿을 서랍에 넣었다. 잠금 코드를 두 번 걸었다. 일어서서 창가에 섰다. 성북동의 밤은 조용했다. 이 조용함 속에서 칼을 가는 사람은 승현뿐이라고 생각했다.
설희야. 네가 서윤이라는 방패를 들었으니, 나도 내 방패를 쓰는 거다.
서재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태블릿의 대기 불빛이 서랍 틈으로 새어나왔다. 승현은 그것을 보지 않았다. 이미 다음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
다음 날 오전 10시. 서윤이 한영자산운용 본사 로비에 들어섰을 때, 설희가 이미 와 있었다. 로비 소파에 앉아 태블릿으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다. 네이비 수트. 진주 귀걸이.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전장에 나가는 사람의 갑옷이었다.
설희가 고개를 들었다.
"슬라이드 7번, 물류 시너지 수치를 어제 밤 데이터로 업데이트했습니다. 확인해주세요."
서윤이 옆에 앉아 태블릿을 받았다. 손끝이 스칠 뻔했다. 스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그 거리를 정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수치를 확인했다. 영업이익 34퍼센트 상승. 합병 후 3년 시뮬레이션. 숫자가 단단했다. 감정이 아니라 숫자로 설득하는 프레젠테이션. 설희의 방식이었다.
"됐습니다. 갑시다."
회의실. 맞은편에 한영자산의 대표이사 정하늘과 펀드매니저 두 명이 자리했다. 정하늘은 60대 초반, 은테 안경에 짧은 백발. 30년 동안 숫자를 읽어온 사람의 눈이었다.
설희가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화면에 숫자가 펼쳐졌다. 미래리테일 오프라인 유통망 1,200개 점포와 아르테미스 AI 배송 인프라의 결합. 지역별 배송 시간 단축률. 인건비 절감 시뮬레이션. 숫자 하나하나가 퍼즐 조각처럼 맞물려 들어갔다.
설희의 목소리는 낮고 일정했다. 감정을 빼고 데이터만 남긴 목소리. 서윤은 옆에서 그것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숫자를 무기로 쓸 줄 안다. 숫자의 배치, 숫자의 순서, 숫자 사이의 간격까지 계산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정하늘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가 마음에 든다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질문이 왔다.
"합병의 시너지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정하늘이 안경을 고쳐 쓰면서 말했다.
"이 합병의 사회적 수용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회적 수용성. 여섯 글자. 돌려서 하는 말이었다. 두 여성의 결혼을 말하고 있었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0.5도쯤 내려간 것을 서윤은 느꼈다.
설희가 답변을 준비했다. 입을 열려는 순간, 호흡이 한 박자 늦었다. 서윤은 그것을 봤다. 설희의 목이 미세하게 움직인 것을. 삼킨 것이다. 단어를.
사회적 수용성.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이 뭐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아니다. 우리는 사업 파트너입니다? 그러면 결혼의 진정성이 의심받는다. 어느 쪽을 말해도 칼날이었다.
서윤이 끼어들었다.
"정 대표님."
서윤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회의실의 시선이 설희에게서 서윤에게로 옮겨갔다.
"우리의 결혼은 이 프레젠테이션의 주제가 아닙니다. 주제는 합병 시너지입니다. 숫자를 보시면 됩니다."
정하늘이 서윤을 봤다. 서윤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숫자가 사회적 논란보다 크면, 투자자는 숫자를 선택합니다. 정 대표님이 그걸 모르실 분은 아니시죠."
2초의 침묵. 정하늘의 안경 너머 눈이 서윤을 읽고 있었다. 30년간 펀드매니저와 CEO를 상대해온 눈이 측정하고 있었다.
정하늘이 웃었다. 작게.
"강 대표님, 말씀이 직설적이시군요."
"효율적인 겁니다."
미팅이 끝났다. 정하늘이 악수를 청했다.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형식적인 악수가 아니라 숫자를 인정한 사람의 악수였다.
건물을 나서면서 설희가 말했다. 현관의 회전문을 지나 바깥 공기가 얼굴에 닿았을 때.
"감사합니다."
"뭐가요."
"방금. 대신 답해주신 거."
서윤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봄바람이 테헤란로를 따라 불어오고 있었다.
"대신이 아닙니다. 제 대답이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한 겁니다."
설희는 서윤의 옆모습을 봤다. 숏컷 아래로 귀가 보였다. 귀 뒤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봄바람 때문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 반대쪽이었다.
이 사람도 화가 났었구나. 저 질문에.
그 생각을 지웠다. 감정이입은 협상의 적이다.
───
오후 3시. 설희가 미래센터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장미라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눈이 한 톤 어두웠다.
"이사님."
"네."
"부사장님의 최근 3개월 통화 기록 중, 해외 번호 접촉이 7건 확인됐습니다."
설희가 코트를 벗으면서 물었다. 옷걸이에 거는 동작이 평소보다 느렸다.
"어느 국가."
"싱가포르 3건. 홍콩 4건."
설희가 의자에 앉았다. 싱가포르와 홍콩. 아시아 금융 허브. 자금이 움직이는 경로. 역외펀드를 설립하거나, SPC를 통해 자금을 우회시키거나, 지분을 분산 보유하는 데 쓰이는 경로. 재벌가에서 이 두 도시의 조합은 하나를 의미했다.
"발신인 추적은."
"법인 명의입니다. 싱가포르 쪽은 SPC로 추정됩니다. 실소유자 확인이 안 됩니다."
SPC. 특수목적법인. 실소유자를 감추기 위한 구조. 어젯밤 메타데이터의 외부 IP와 퍼즐이 맞물렸다. 보고서를 외부에서 작성한 사람과, 승현이 싱가포르·홍콩으로 전화하는 상대가 같은 인물일 가능성. 아직 확증은 없었다. 증거가 아니라 패턴이었다. 패턴만으로는 이사회에 가져갈 수 없다.
"미라 씨."
"네."
"오빠의 해외 계좌 이동 내역, 확인할 수 있어요?"
장미라의 침묵이 길어졌다. 3초. 비서가 3초를 침묵하는 것은 무게를 재고 있다는 뜻이었다. 설희가 요청한 것은 가족의 금융 기록을 조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겠다는 뜻이었다.
"어디까지 보시겠습니까."
설희가 답했다.
"전부요."
장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닫고 나갔다.
설희는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시계 줄을 만졌다. 차가운 금속이 맥박을 눌렀다.
전부. 전부를 보겠다고 했다.
오빠의 뒤에 있는 사람. 새벽에 화면 없이 목소리만 보내는 사람. 성북동 본택에서 승현이 고개를 숙이는 사람. 그 사람이 누구든, 이 전쟁의 판을 짜고 있는 사람이었다.
감정은 나중에 처리하면 된다.
그런데 이번엔 처리해야 할 감정이 뭔지도 몰랐다.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오빠에 대한 마지막 남은 무언가가 꺼지는 소리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