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같은 지붕
PH129의 아침은 너무 조용했다.
설희는 주방에 서 있었다. 6시 3분. 세안을 마치고 프로틴셰이크를 블렌더에 넣는 동작까지, 평소와 같은 루틴이었다. 아일랜드 위의 대리석은 아직 찬 공기를 머금고 있었고, 블렌더 위로 새벽빛이 비스듬히 내려앉아 있었다. 다른 것은 하나. 이 주방이 더 이상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
블렌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맨발이 마루를 밟는 소리. 슬리퍼를 신지 않은 사람의 발걸음이었다.
강서윤이 나왔다. 반팔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 머리를 묶지 않은 채. 사무실에서 마주하던 사람과 같은 얼굴인데, 윤곽이 달랐다. 조명 때문인지 각도 때문인지 판단을 내리기 전에, 서윤이 커피 머신 앞에 섰다. 설희와의 거리, 80센티미터. 주방 아일랜드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였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납니다."
"저도요."
침묵이 왔다. 커피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만 그 틈을 메웠다. 원두가 갈리고 물이 끓고 액체가 떨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대신했다.
설희가 블렌더 버튼을 눌렀다. 소리가 주방을 뒤덮었다. 서윤이 잠깐 설희 쪽을 봤다. 블렌더가 멈추자 다시 조용해졌다.
"주방 규칙 하나만."
서윤이 말했다. 커피잔을 들면서.
"제 커피에 설탕 넣으면 계약 위반입니다."
설희가 컵에 셰이크를 따르면서 답했다.
"저는 설탕을 넣지 않습니다. 어떤 것에도."
서윤이 커피를 마셨다. 한 모금. 뜨거웠을 것이다. 갓 추출된 에스프레소가 입술에 닿는 순간에도 표정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설희는 그것을 아일랜드 너머로 봤다. 비즈니스 미팅에서 상대의 내성을 측정하듯, 무의식적으로.
"좋습니다."
두 사람은 아일랜드 양쪽에서 각자의 아침을 마셨다. 통유리 너머로 아침 햇살이 강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이 안의 공기가 전쟁 전야라는 것을 모르는 채.
설희는 셰이크를 마시면서 서윤의 루틴을 관찰했다. 커피를 마시는 순서, 핸드폰을 확인하는 타이밍,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다시 넣는 동작. 48시간 전까지 서류 속의 이름이었던 사람이 같은 냉장고를 쓰고 있었다. 그 사실이 주는 위화감은 물리적이었다. 마치 이사회실 테이블 위에 누군가의 칫솔이 올려져 있는 것처럼.
───
서윤은 9시에 아르테미스 본사 52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테헤란로의 아침 풍경이 통유리 너머로 펼쳐졌다. 출근 차량이 줄을 서고,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저 아래 사람들은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서윤의 전쟁은 52층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오 팀장이 일어섰다. 화이트보드에 기관 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숫자와 기관명이 색깔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위임장 캠페인 현황입니다."
확보: 3곳. 미정: 4곳. 이탈 위험: 1곳.
서윤이 리스트를 훑었다. 확보 3곳의 의결권 합계 46퍼센트. 과반까지 4퍼센트가 부족했다. 4퍼센트. 숫자로는 작았지만, 주총 D-20이라는 시간 안에 이 숫자를 채우는 것은 계곡 위 외줄 위를 걷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주총 D-20. 과반 확보까지 3퍼센트 부족합니다."
오 팀장의 보고에서 3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서윤은 정정하지 않았다. 3퍼센트가 맞았다. 직접 계산한 4퍼센트는 안전마진을 포함한 숫자였고, 오 팀장은 서류 기준으로 보고한 것이다.
"미정 4곳 중 가장 먼저 움직일 곳은."
"한영자산운용입니다. 펀드 매니저가 합병 시너지에 긍정적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서윤이 손가락을 리스트 위에 올렸다. 한영자산. 보유 지분 1.5퍼센트. 이 한 곳을 확보하면 숫자가 움직인다.
"내일 오전에 잡아. 설희 이사님과 같이 갈 거야."
같이. 그 단어를 쓰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3주 전에는 없던 습관이었다.
오 팀장이 메모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장미라였다.
"대표님. 미래리테일 사내 포털에 문서가 유포됐습니다."
서윤의 등이 곧게 섰다. 사내 포털. 내부에서 터진 것이다.
"어떤 문서."
"합병 재검토 필요성이라는 제목의 내부 보고서입니다. 작성자는 전략기획실 명의인데, 배포 승인은 백승현 부사장입니다."
서윤이 모니터를 열었다. 보고서를 읽었다. 3페이지. 깔끔한 논리 구조. 합병 시 예상되는 인력 구조조정, 브랜드 정체성 훼손, 노조 반발 시나리오가 나열되어 있었다. 각 항목에 수치가 붙어 있었고, 그 수치가 정확했다. 허수가 아니었다. 누군가 실제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작성한 것이다.
"직원 반응은."
"사내 게시판에 30분 만에 댓글 200개입니다. 부정적 여론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서윤은 전화를 끊었다.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직원 여론. 이사회보다 먼저 안을 흔드는 방법. 승현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이사회를 정면으로 돌파하면 설희가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직원들의 불안을 먼저 키우는 전략. 경영권 분쟁에서 가장 교활한 수법이었다. 그리고 교활한 만큼 효과적이었다.
───
설희가 미래센터 34층 사무실에서 태블릿을 받아들었을 때, 장미라의 표정이 먼저 내용을 알려주고 있었다.
"작성일자 확인하셨습니까."
설희가 화면을 확대했다. 작성일: 2월 12일.
아버지가 쓰러진 것은 2월 19일이었다.
일주일 전이었다.
설희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숫자가 머릿속에서 역순으로 재생됐다. 2월 12일에 문서를 만들고, 2월 19일에 아버지가 쓰러지고, 3월에 배포한다. 이 순서가 우연일 확률을 설희는 계산하지 않았다. 계산할 필요가 없었다.
"미라 씨."
"네."
"이 보고서의 초안 파일 메타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어요? 최초 생성일과 수정 이력."
장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희는 화면을 내려놓았다. 종로의 하늘이 창 너머로 보였다. 맑았다. 맑은 하늘 아래서 칼이 움직이고 있었다.
승현은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부터 이 문서를 준비했다. 아버지가 쓰러질 것을 알았거나, 아니면 쓰러지든 말든 상관없이 움직일 계획이었거나. 어느 쪽이든 답은 같았다.
이건 형제간의 다툼이 아니었다. 기획된 전략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서윤이었다.
"보셨습니까."
"봤습니다."
"작성일자."
"네. 일주일 전입니다."
서윤이 3초간 말이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서윤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결단 전의 침묵이었다.
"내일 한영자산 미팅 준비합시다. 이사님이 직접 프레젠테이션 하시는 게 맞겠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리고."
서윤이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 서재에서 전략 회의 가능합니까. PH129에서."
같은 집에서 일하자는 뜻이었다. 사무실 밖에서. 보안이 확보된 공간에서. 설희는 1초 멈췄다.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찾지 않았다는 편이 정확했다.
"8시요."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설희는 태블릿을 다시 들었다. 승현의 보고서를 처음부터 읽었다. 논리 구조가 깔끔했다. 데이터 선별이 정교했다. 반박하려면 같은 수준의 데이터가 필요했다.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
PH129. 저녁 8시. 설희가 서재 문을 열자 서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재의 테이블 위에 노트북 두 대가 나란히 놓였다. 서윤이 크로노스 분석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설희가 위임장 확보 시나리오를 옆에 펼쳤다. 두 화면의 불빛이 어두운 서재 안에서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두 사람은 3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기관별 설득 포인트, 크로노스의 자금 흐름, 승현의 이사회 내 지지 기반. 서윤이 숫자를 짚으면 설희가 맥락을 붙였고, 설희가 시나리오를 제시하면 서윤이 변수를 잡아냈다. 두 사람의 사고 방식은 달랐지만, 결론에 도달하는 속도가 비슷했다. 목소리는 낮았고 내용은 날카로웠다.
11시가 넘었다.
서윤이 커피를 마시려다가 잔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다섯 번째 잔이었다.
설희가 말했다.
"더 마시면 내일 손이 떨립니다. 프레젠테이션 전에."
서윤이 설희를 봤다.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입니다. 파트너의 컨디션은 합병 성패에 영향을 줍니다."
서윤이 설희를 봤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반박하지 않았다. 논리가 맞으면 수용하는 사람이었다. 감정이 아니라 논리에 반응하는 사람. 설희는 그 패턴을 하나 더 기록했다.
"알겠습니다."
설희가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내일 미팅 순서. 제가 먼저 시너지 수치를 제시하고, 대표님이 기술 로드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동의합니다."
서윤이 노트북을 닫으며 일어섰다. 서재 문 앞에서 멈췄다.
"같은 지붕 아래서 전략 회의를 하니까."
"네."
"효율적이군요."
그 말을 남기고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를 지나 방 쪽으로 멀어졌다.
설희는 혼자 남은 서재에서 스탠드 불빛 아래 앉아 있었다. 서윤이 앉았던 의자가 비어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서윤의 재킷에서 옮겨온 향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섬유유연제 냄새는 상상이었다.
효율적. 그래, 효율적이다.
그런데 왜 이 단어가 이상하게 허전한 거야.
장미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보고서 메타데이터 확인 완료. 최초 생성일: 2월 5일. 아버지 쓰러지기 2주 전. 그리고 생성자 계정이 전략기획실이 아닙니다. 외부 접속 IP입니다.]
설희의 눈이 좁아졌다.
2월 5일. 일주일이 아니라 2주 전이었다. 그리고 외부 IP. 승현이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밖에서 이 문서의 초안을 작성했다.
승현은 언제부터 준비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누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