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손을 잡다〉
전쟁은 회의실에서 시작됐고, 결속은 거실에서 완성됐다.
새벽 한 시.
PH129 거실 테이블 위에 종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계약서 대응 문안. 위임장 캠페인 초안. 우호 기관 접촉 현황. 크로노스 LP 분석. 한도윤이 넘긴 이사진 이탈 가능성 메모.
설희가 펜을 들었다. 문안을 고쳤다. 서윤이 맞은편에서 노트북을 봤다. 둘이 동시에 말하지 않았다. 같은 테이블 위 종이들을 각자 읽었다.
이건 새로운 방식이었다.
설희는 혼자 일하는 사람이었다. 서재에서, 새벽에, 보고서를 혼자 읽었다. 결론도 혼자 냈다. 그게 틀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혼자라는 사실은 늘 있었다.
지금은 테이블 너머에 사람이 있었다.
서윤이 말했다.
"계약서 유출 대응 문안입니다."
노트북 화면을 설희 쪽으로 돌렸다.
설희가 읽었다.
짧았다. 해명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계약은 합병의 조건이었고, 합병은 주주 가치를 위한 선택이었다'—그 한 줄로 계약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프레임을 바꾸는 방식이었다.
"숨기지 않는 겁니다."
설희가 말했다.
"네."
"리스크가 있습니다. 계약 조항이 공개되면 기간이 문제가 됩니다."
"기간을 문제 삼는 사람은 어차피 우리 편이 아닙니다. 지금 잡아야 할 건 중간층이에요."
설희가 화면을 다시 봤다.
"한 줄 바꾸겠습니다."
펜을 들었다. 노트에 직접 썼다.
'두 사람의 선택은 회사를 위한 것이었고, 그 선택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하겠습니다.'
서윤이 그 문장을 읽었다.
"'행동으로 증명'."
반복했다. 확인이 아니라 음미하듯.
"좋습니다."
*
오전 여덟 시.
한도윤이 연락을 해왔다.
"이사진 쪽 움직임이 있습니다. 김 상무가 오늘 오전 중 입장을 내기 전에, 다른 이사 두 명이 먼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어느 방향이죠."
"당신 쪽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죠."
한도윤이 말했다.
"두 사람이 공개석상에서 같이 서는 장면이 필요합니다. 오늘. 계약서 기사가 나온 날. 도망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전화가 끊겼다.
서윤이 설희를 봤다.
설희가 먼저 말했다.
"오전 열 시. 더 아크 로비."
"준비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설희가 재킷을 들었다. 오늘은 네이비가 아니었다. 짙은 버건디. 처음 입는 색이었다.
서윤이 그걸 봤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더 아크 로비. 오전 열 시.
기자는 없었다. 한도윤이 연락한 이사 두 명이 로비에 있었다. 아르테미스 직원들이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카메라가 없는 자리였다.
설희가 들어섰다.
서윤이 로비 중앙에 서 있었다. 설희가 걸어왔다. 서윤 옆에 섰다.
어깨가 닿았다.
이번엔 계산한 거리가 아니었다. 설희가 선 자리가 그 자리였다.
이사 두 명이 그 장면을 봤다. 악수를 청했다. 설희가 받았다.
"합병 지지 입장을 유지하겠습니다."
한 명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설희가 답했다.
짧았다. 길게 할 필요가 없었다. 장면이 말하고 있었다.
서윤이 그 옆에서 두 이사와 악수를 했다. 그러면서 설희 쪽으로 손이 왔다.
손등이었다. 스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손가락이 설희 손 위에 얹혔다.
연습이 아니었다.
계약서에 명시된 수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이유가 아니었다.
설희는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이사 두 명이 나갔다.
로비에 둘만 남았다.
서윤이 말했다.
"손 놓지 마세요."
설희가 서윤을 봤다.
"계약이 끝날 때까지."
설희는 그 말을 들었다.
끝날 때까지.
그 말이 어디서 끝나는지를 설희는 지금 알 수 없었다. 계약이 끝나는 시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끝나는 시점인지.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설희가 말했다.
*
오후.
주가가 반등했다. 작은 폭이었다. 하지만 방향이 바뀌었다.
오 팀장이 보고했다.
"이사진 이탈 두 명이 복귀 의사를 밝혔습니다. 우호 기관 중 한 곳도 크로노스 측 접촉을 거절했습니다."
서윤이 보고서를 봤다.
"위임장 캠페인 일정은요."
"주총 D-22. 본격 가동 준비됩니다."
오 팀장이 나갔다.
설희가 창밖을 봤다. 한강이 보였다. 낮의 한강은 야경만큼 극적이지 않았다. 그냥 흘렀다.
서윤이 말했다.
"이번 주총—위임장 대결이 본격화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크로노스가 다른 패를 꺼낼 겁니다.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설희가 돌아봤다.
"어떤 패요."
서윤이 핸드폰을 봤다. 방금 들어온 메시지였다.
오 팀장 발신.
'크로노스 쪽이 새 파트너를 붙였다는 정보 들어왔습니다. 확인 중.'
서윤이 핸드폰을 내려놨다. 설희를 봤다.
"확인 중입니다."
설희가 그 말을 들었다. '확인 중'이라는 말이 지금 이 방에서 가장 무거운 두 글자였다.
*
그날 저녁.
PH129. 설희가 서재에 앉아 있었다. 불을 다 켜지 않았다. 스탠드 하나만.
서윤이 문 앞에 섰다.
"들어가도 됩니까."
설희가 고개를 들었다.
"네."
서윤이 들어왔다.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둘 사이에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오늘 만든 문서들이 있었다.
서윤이 그 문서들을 봤다가 설희를 봤다.
"오늘 잘 하셨습니다."
설희가 서윤을 봤다.
"수고했습니다."
서윤이 덧붙였다.
그 말이 또 왔다.
수고했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전화 너머였다. 이번엔 같은 방 안이었다. 스탠드 불빛 아래서.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설희가 말했다.
"당신은요."
서윤이 설희를 봤다.
"오늘 당신도 수고했습니다."
서윤이 잠깐 설희를 봤다. 그리고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처음이군요."
"뭐가요."
"먼저 한 말."
설희는 반박하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서윤이 일어섰다. 문 쪽으로 걸었다.
문 앞에서 멈췄다.
"내일 주총 준비 일정 오전 여섯 시부터 시작합니다."
"알겠습니다."
"자세요."
문이 닫혔다.
설희가 스탠드 불빛 아래 혼자 앉아 있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진짜 전쟁이 시작됐다.
*
그 시각.
이지우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미래리테일 주가 차트. 오늘 반등 구간.
그리고 두 사람이 더 아크 로비에서 나란히 선 사진. 누군가 보낸 사진이었다.
이지우가 사진을 닫았다. 메모 앱을 열었다.
노트북 옆에 펀드 운용 보고서가 펼쳐져 있었다. 표지에 'JW캐피털' 로고. 독립계 PEF. 크로노스보다 작지만, 더 빠른 곳.
짧게 입력했다.
'미래리테일 주총. 흥미롭네.'
그리고 전화기를 들었다.
그 손을 잡는 순간, 더 큰 손이 시장에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