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폭락〉
폭락은 시장이 아니라, 사람 마음에서 먼저 시작됐다.
오전 아홉 시. 장 시작.
미래리테일 주가가 아래로 꺾였다.
설희는 숫자를 봤다. 서윤은 숫자 뒤를 봤다.
마이너스 6퍼센트. 어제 반등했던 것보다 더 내려갔다. 공개매수 프리미엄이 있어도 시장은 공포를 먼저 샀다. 공포는 지분 퍼센트가 아니라 기사 제목으로 움직였다.
오 팀장이 보고했다.
"우호 기관 다섯 곳 중 두 곳에서 크로노스 쪽 접촉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프리미엄 15퍼센트 제시."
설희가 말했다.
"나머지 세 곳은요."
"아직 응답 없습니다."
서윤이 오 팀장을 봤다.
"세 곳 중 한 곳이라도 오늘 오후까지 잡으면 됩니다. 우선순위 뽑아주세요."
오 팀장이 나갔다.
설희가 서윤을 봤다.
"자금이 문제입니다."
"얼마나요."
"크로노스가 15퍼센트 프리미엄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20퍼센트를 제시해야 합니다. 현금으로."
서윤이 계산했다.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고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아르테미스 가용 자금으로는 부족합니다."
"네."
침묵이 왔다.
설희가 창밖을 봤다. 테헤란로가 보였다. 차들이 지나갔다.
"성북동 본택 쪽에 방법이 있습니다."
서윤이 그 말을 들었다. 반응하지 않았다. 기다렸다.
"아버지가 만들어둔 구조입니다. 제가 가장 혐오하는 방식이에요. 하지만 내 이름으로 된 법인이 있어요. 등기가 오래됐지만 활성 상태입니다."
서윤이 말했다.
"얼마나 됩니까."
"충분합니다."
*
오후 두 시. PH129 서재.
설희가 서랍을 열었다. 서류철이 나왔다. 성북동 본택 등기 사본. 그 아래 법인 설립 문서. 그 아래 계좌 관련 메모.
아버지의 필체였다.
설희는 그 필체를 봤다. 아버지에게 '잘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이 서류들은 아버지가 설희에게 남긴 유일한 것이었다. 의도해서 남긴 것도 아닌.
그냥, 거기 있었다.
그때 서랍 안쪽에서 작은 봉투가 하나 나왔다. 어제 보안 로그에 찍힌 '패키지'. 경호팀 기록에는 없던 것.
설희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빈 USB 하나와 메모지가 있었다. 메모지에 한 줄.
'다음은 전부입니다.'
설희의 손이 멈췄다. 이건 경고가 아니라 예고였다.
서윤이 문 앞에 섰다.
"도움이 필요합니까."
설희가 고개를 들었다. USB를 서류 아래에 밀어 넣었다.
"이건 내 일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서윤이 들어오지 않았다. 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손대기 싫으면 제가 외부 루트를 찾겠습니다. 더 오래 걸리지만 가능합니다."
설희가 서윤을 봤다.
"그 돈은 아버지의 세계예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방식이에요."
서윤이 말했다.
"싫어도 써야 살아남습니다."
설희가 그 말을 들었다.
"살아남아야."
서윤이 이었다.
"바꿀 수 있어요."
설희는 서류를 봤다. 아버지의 필체를. 가장 혐오하는 방식을.
혐오하는 것을 쓰겠다는 결단에는, 혐오할 만큼 알고 있다는 계산이 필요했다. 설희에게 그 계산은 이미 끝나 있었다. 끝나 있었기 때문에 더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류를 들었다.
*
오후 네 시. 이사회 중립 라인 접촉.
한도윤이 들어왔다. 전략기획 이사. 합병 초기에 반대표를 던졌던 사람이었다.
키가 컸다. 수트가 잘 맞았다. 들어오면서 설희를 봤다가 서윤을 봤다가 다시 설희를 봤다.
앉지 않고 말했다.
"김 상무 쪽에서 움직임이 있습니다."
설희가 말했다.
"어느 방향이죠."
"승현 부사장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단, 아직 공식 입장은 아닙니다."
"왜 저한테 이 말을 하죠."
한도윤이 설희를 봤다.
"저는 합병에 반대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찬성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요."
한도윤이 서윤을 봤다가 다시 설희를 봤다.
"지금 적이 더 큰 쪽이 어디인지는 압니다."
서윤이 한도윤을 봤다. 평가하는 눈이었다.
설희가 말했다.
"필요한 게 뭐죠."
"정보입니다. 크로노스가 어디서 자금을 끌어왔는지. LP 구성. 실질 배후."
서윤이 오 팀장이 정리한 파일을 테이블 위에 놨다.
한도윤이 파일을 들었다. 첫 페이지를 훑었다.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충분합니다."
그리고 나갔다.
서윤이 그 뒷모습을 봤다.
"믿을 수 있습니까."
설희가 말했다.
"지금은 씁니다. 믿는 건 나중에 결정합니다."
*
저녁 여덟 시. PH129 거실.
장미라가 뛰어 들어왔다.
뛰어 들어오는 장미라는 처음이었다. 설희가 그 동작을 보고 일어섰다.
"대표님."
장미라의 목소리가 낮아져 있었다.
"계약서 원본 스캔 파일이 돌고 있습니다. 이번엔 일부가 아닙니다."
서윤이 노트북을 닫았다. 설희 쪽으로 왔다.
설희가 장미라한테서 태블릿을 받았다.
전문이었다. 계약 기간. 지분 조건. 동거 조항. 키스 연기 범위. 중재 조항.
계약서가 맞았다. 단어 하나, 조항 번호 하나까지.
장미라가 말했다.
"현재 포털 두 곳에서 기사화 중입니다. 30분 안에 메인에 올라갑니다."
설희가 태블릿을 내려놨다.
소리가 났다. 처음으로. 소리 나게 내려놨다.
서윤이 설희 손목을 잡았다.
잡았다가 바로 놓는 동작이 아니었다. 그냥 잡았다.
"이제 선택해야 해요."
서윤이 말했다.
"가짜로 끝낼지, 진짜로 버틸지."
설희가 서윤을 봤다.
계약서가 유출됐다. 전문이. 30분 안에 메인에 올라간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손이 닿아 있고, 그 계약서 안에는 '이건 연기다'라고 쓰여 있다.
가짜로 끝내면 깨끗하다. 계약 파기, 손해배상 정산, 각자의 이름으로 돌아가면 된다. 숫자로 끝나는 결말. 설희가 가장 잘하는 방식.
그런데 서윤의 손이 설희의 손목 위에 있었다. 그 손의 온도가 계산을 방해했다.
스캔 파일 속 잉크가, 둘 사이의 숨까지 훔쳐갔다.
그날 밤, 계약은 문서가 아니라 목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