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무림에 환생하다
제2화: 동쪽 별채
아버지가 일어섰다.
그 동작 하나에 방 안이 무거워졌다. 비유가 아니다. 겨울 궁궐에서 문이 열리면 바람의 결이 틀어지듯, 아버지가 일어서는 순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무엇인가가 출렁였다. 피부가 먼저 안다.
기(氣)라는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내게 기감(氣感)은 없다. 아이의 기억에 따르면 빨라야 열 살에나 열린다고 했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하나였다.
사내가 목숨을 걸면, 공기가 먼저 바뀐다. 왕자의 난 전야에도 그랬다. 이성계파의 무장들이 사저에 모였을 때, 방 안의 밀도가 이렇게 변했었다.
“운아. 몇이냐.”
“확인된 것은 넷입니다. 하지만 기척을 숨기고 있는 자가 더 있습니다. 최소 둘, 이류(二流) 이상으로 보입니다.”
아버지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나는 그것도 잡았다. 이류라서 긴장한 게 아니다. ‘기척을 숨기고 있다’는 말에 굳은 거다. 정면으로 뚫고 들어온 넷은 미끼고, 기척을 감춘 둘이 본대라는 판단.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머릿속에서 전장의 도식이 자동으로 짜였다.
동쪽 별채를 치는 데 여섯이면 — 세가 전멸이 아닌 한 충분하다. 노리는 게 따로 있다는 뜻이다. 아이의 기억에 따르면 서고 안쪽에 금서각(禁書閣)이 있다. 가주 외에는 함부로 열 수 없는 방. 천룡세가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秘傳)이 그 안에 있다고 했다. 동쪽에서 소란을 일으켜 시선을 묶고, 그 틈에 서고로 침투 — 가능성이 크다.
“큰아이와 둘째는.”
“대공자님은 동쪽 별채 앞에서 교전 중이시고, 이공자님은 서고에 ——”
“셋째는.”
침묵이 떨어졌다. 운이라 불린 무인의 눈이 흔들렸다. “……삼공자님 거처에서 응답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턱이 단단해졌다.
“아버지.”
내가 입을 열자 방 안의 시선이 한꺼번에 이쪽으로 쏠렸다. 고열에 시달리던 7살이 갑자기 또렷한 눈으로 말을 하니, 그럴 만했다.
“삼형(三兄)께선 무탈하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뜻이냐.”
전생의 습관이 입을 막으려 했다. 정보가 부족할 때 판단을 내놓으면 독이 된다. 하지만 여기는 궁이 아니다. 이 아이들은 정적이 아니라 내 형제다.
“삼형은 잠이 얕으신 줄 압니다. 밤에 홀로 무예를 닦으시는 것도. 이 시각이면 거처에 아니 계실 것입니다.”
사실이었다. 아이의 기억 속에, 한밤중 뒷마당에서 혼자 목검을 휘두르는 셋째 형의 모습이 있었다. 남들 몰래. 맏형과 둘째를 넘어서기 위해. ……아, 또 이 버릇이다. 형제의 마음속까지 읽으려 드는 건. 전생에서 지겹도록 해먹은 짓인데.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봤다. 3초. 긴 3초. 그 눈 속에 복잡한 것들이 스쳤다. 놀라움은 이미 지난 뒤였다. 그 밑에 깔린 감정은 아직 읽지 못했다.
“……알겠다.”
그리고 한 박자 후.
“운아. 서고의 경비를 두텁게 하라. 동쪽은 미끼다.”
운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아버지도 같은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다만 아들의 안위를 먼저 물은 뒤에.
몸을 돌렸다. 문 앞에서 한 번 멈췄다.
“막내야. 여기서 나가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고 사라졌다.
━━━
혼자가 됐다.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핑 돌았다. 검가에서 수련용 검을 뽑았다. 날이 안 선 아이용 검이었는데, 무거웠다. 한 뼘도 못 올렸다.
전생에서 나 이방원은 직접 칼을 쓰는 인간이 아니었다. ‘조영무, 정몽주를 처리하라.’ ‘이숙번, 선봉에 서라.’ 내 칼은 항상 남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게 왕의 칼이었다.
근데 여기는 무림이다. 명령만으로는 못 산다.
검을 내려놨다. 고작 그것 하나에 팔이 후들거렸다. 이 여린 육신으로 도모할 수 있는 것은, 지금으로선 전무(全無)하다.
그때 바깥에서 쇳소리가 울렸다.
캉.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다. 캉, 캉, 캉 —— 세 번 맞부딪히고 짧은 침묵, 다시 캉. 불규칙하다. 연무라면 간격이 일정하다. 이건 약속이 없는 소리다. 선죽교의 밤, 어둠 속에서 검이 울릴 때도 이런 소리였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쪽 별채가 아니라 이쪽으로. 전선이 밀려오고 있다.
나가지 말라고 했다. 안 나간다.
보지 말라곤 안 했으니까.
창문 틈으로 내다봤다.
━━━
달빛 아래 마당에서 큰형이 싸우고 있었다.
아이의 기억 속 큰형은 온화한 사람이다. 동생들의 이름을 부를 때 항상 끝을 올리는 버릇이 있고, 연무장에서 땀을 닦을 때는 수건을 네모로 접어서 쓰는 사람이다. 곧다. 칼처럼 곧은 성정이 동작에까지 배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지금 검을 들고 있었다.
큰형은 밀리고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서면 왼쪽이 파고들고, 막으면 오른쪽에서 날아든다. 2 대 1.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반 보 물러서는 척하면서 둘의 간격을 벌린다. 일직선에 세우려는 판단이다.
아쉽다. 한 보만 더 빼면 왼쪽 놈이 튀어나온다. 그 순간, 틈이 생긴다.
그런데 이 몸은 일곱 살이다.
큰형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상대 둘은 교대로 들어오며 체력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한 놈이 공격할 때 나머지 한 놈은 쉰다. 이대로면 큰형이 먼저 지친다.
그때 눈이 마당을 훑었다.
큰형 뒤편, 회랑 기둥 그림자 속에 뭔가 움직였다. 천룡세가 복색이 아니다. 검은 옷. 기척을 죽이고 큰형의 사각(死角)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셋이다.
2 대 1이 아니라 3 대 1이었다. 앞의 둘이 묶어두고, 뒤에서 한 놈이 마무리하는 구조. 큰형은 모르고 있다. 뒤를 볼 여유가 없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방 안을 둘러봤다. 벼루 — 무겁다. 못 던진다. 찻잔을 집었다. 이건 된다. 유리한 건 소리였다.
창문을 열었다. 아버지가 나가지 말라 했지, 창문을 열지 말라곤 안 했다.
회랑 기둥 아래 석판 바닥을 향해 던졌다.
짤그랑.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밤 마당에 울렸다. 큰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검이 부딪히는 틈새의 적막 속에서는 충분했다.
기둥 뒤의 그림자가 멈칫했다. 들킨 줄 안 거다. 뒤통수를 노리던 놈의 보폭이 흐트러졌다. 타이밍을 놓쳤다.
동시에 큰형의 귀가 반응했다. 기척을 잡았다. 몸을 반 바퀴 틀어 세 놈 전부를 시야에 넣는 데 1초도 안 걸렸다. 뒤통수를 노리던 놈에 대한 분노가 검에 실렸고 — 검선이 한 치 빨라졌다.
나는 창문을 닫았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고열이 아직 빠지지 않은 몸이 벌써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전장에서 돌멩이 하나가 전세를 바꾸는 걸 본 적이 있다. 오늘은 찻잔이 그 돌멩이였다.
━━━
그때, 무언가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빨랐다. 잔상만 남았다. 은빛 선 하나가 허공을 그었고, 기둥 뒤에 있던 세 번째 사내의 어깨에서 피가 터졌다.
아버지였다.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언제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그냥 거기 서 있었다. 검을 든 채.
그리고 공기가 울렸다.
아까 방 안에서 느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바람이 없는데 나뭇잎이 떨렸다. 큰형이 — 아군인 큰형마저 본능적으로 반 보 뒤로 물러섰다.
한 사람의 존재감이 공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림인가.
심장이 뛰었다. 공포가 아니었다. 전율이었다. 수만 군사를 지휘할 때도, 옥좌에 앉아 천하를 호령할 때도 느끼지 못한 감각이다. 저건 군사의 힘도, 권력의 힘도 아니다. 오로지 한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도 저것을 해야 한다.
전생에서는 못 했다. 동생을 죽이고, 형을 밀어내고, 아버지와 원수로 살았다.
이번에는 내가 지킨다.
━━━
전투는 빠르게 끝났다.
아버지가 나서자 어깨를 베인 놈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고, 다른 하나는 검을 빼앗겼다. 나머지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축지(縮地). 내공에 기반한 경신술. 도주한 것이다.
아버지가 추격하지 않았다. 전생이라면 적을 놓치는 걸 용납 못 했을 테지만 — 여기서는 아들의 상처를 먼저 확인하는 게 맞다.
큰형의 왼팔에 피가 배어 있었다. 깊지는 않아 보인다.
마당 저편에서 둘째 형이 달려왔다. 서고에서 나온 모양인데, 손에 책 한 권을 쥐고 있었다. 겉표지의 붉은 글씨가 달빛 아래서 번뜩였다. 금서각 장정(裝幀)이다.
아버지의 시선이 그 책 위에 찰나 머물렀다.
뒷마당 쪽에서 셋째가 나타났다. 옷에 풀잎이 묻어 있다. 밤 수련을 하다 돌아온 것이다.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셋째의 시선이 큰형의 피 묻은 팔에 멈췄다. 턱이 굳었다. 손에 쥔 목검이 삐걱 소리를 냈다.
아버지가 셋째를 봤다. 찰나의 안도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내 방 쪽을 돌아봤다.
창문 틈으로 눈이 마주쳤다.
들켰다.
아버지의 시선이 열린 창문 아래 깨진 찻잔 파편 위를 스쳤다. 그리고 마당에 서 있는 큰형을. 다시 나를. 찻잔을 던진 것이 누구인지, 왜 던졌는지를 2초 만에 읽어낸 눈이었다.
아버지가 희미하게 웃었다. 전생의 아버지는, 한 번도 내게 저런 눈을 주지 않았다. 저것은 아들을 지켜낸 안도의 웃음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는 눈이기도 했다.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완전히 해석하지 못한 채, 창문에서 물러났다.
━━━
그 뒤로 밤새 세가가 소란스러웠다. 보고와 치료, 발소리, 피비린내.
나는 침상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손바닥엔 아직도 찻잔의 무게가 남아 있었다.
고작 깨지는 소리 하나로, 전세가 반 박자 갈렸다. 그리고 그것이 — 고작 그것이 — 7세 이방원의 전부였다.
전생에서 나는 전장의 한복판에 서 본 적이 없다. 항상 뒤에 있었다. 명령을 내리고, 보고를 받고, 다음 수를 두었다. 조영무의 칼이 내 칼이었고, 이천우의 창이 내 창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남의 칼이 내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검이 아무리 강해도, 그건 아버지의 힘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가 서야 한다.
이 무력감이 나를 강하게 만들어줄 거다. 분명히.
━━━
나는 아직 몰랐다.
그날 밤, 아버지가 침입자를 심문한 뒤 홀로 서재에 앉아 중얼거린 말을.
“셋째가 방에 없을 줄 알았다고?”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놨다. 차가 식어 있었지만 다시 따르지 않았다.
탁자 위에 마당에서 수거한 도자기 파편이 놓여 있었다. 가주는 그것을 한참 내려다봤다.
“……막내가 던진 거다.”
침묵이 서재를 채웠다. 촛불이 한 번 흔들렸다. 바람이 분 것은 아니었다.
가주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거기엔 아까 내 방에서 보여준 아버지의 온기는 없었다. 대신 수십 년간 세가를 이끌어 온 가주의 냉철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앓고 나서 달라진 게 아니다.”
천룡세가에 저런 눈을 가진 아이는, 한 번도 없었다. 가주 본인이 어린 시절에도, 선대 가주의 기록에도. 아이의 눈에서 읽힌 것은 영특함이 아니었다. 영특한 아이는 세가에도 많다. 저건 달랐다.
“막내야.”
한 마디가 고요한 서재에 떨어졌다.
“네가 대체 누구냐.”
촛불이 한 번 더 흔들렸다. 가주는 그 질문을 허공에 놓아둔 채, 식은 차를 다시 들었다. 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답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다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었다.
눈이 탁자 위의 찻잔 파편을 지나, 서재 벽 한쪽에 걸린 금서각 열쇠를 스쳤다.
“……일곱 살짜리의 눈이 아니야.”
가주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일 새벽, 금서각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