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무림에 환생하다
제3화: 금서각(禁書閣)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정원을 걸었다.
산책이라 불렀지만, 나는 안다. 야외에서 꺼내는 말은 귀를 잘라내겠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보폭이 내 걸음에 맞춰져 있었다. 7세의 다리로 따라갈 수 있도록 천천히. 전생의 아버지는 한 번도 걸음을 맞춰준 적이 없다. 이 사소한 차이가 자꾸 가슴에 걸린다.
“어젯밤 일을 기억하느냐.”
“예.”
“찻잔을 던진 것도 너냐.”
알고 있었다. 당연히. 파편의 위치, 깨진 각도, 열린 창문. 어젯밤 마당에서 나를 올려다보던 눈이 이미 다 읽은 뒤였다.
한 박자 쉬었다. 전생의 습관이다. 왕은 즉답을 피한다.
“……형님이 위험해 보였습니다. 기둥 뒤에 한 명이 더 있는 걸 봤습니다.”
사실을 말했다. 전부를 말한 건 아니다. ‘큰형의 전술적 판단을 읽었다’거나 ‘교전 패턴에서 매복을 추론했다’는 빼놨다. 7세가 할 수 있는 설명의 범위가 있다.
아버지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좋은 징조다. 멈추면 추궁이고, 걸으면 경청이다.
“셋째가 방에 없을 줄도 알았지.”
이쪽이 더 무겁다. 찻잔보다. 전투 중에 형의 야간 습관을 끌어내서 상황 판단에 썼다는 것.
“삼형이 밤에 혼자 수련하시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파고들지 않았다. 이 사람은 ‘진위’가 아니라 ‘방향’을 보고 있다.
“막내야.”
“예.”
“앓고 나서 달라졌구나.”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얼굴에는 아무것도 올리지 않았다. 전생에서 가장 먼저 익힌 기술이다. 상왕이 된 이성계도 같은 말을 했었다. ‘원, 달라졌구나.’ 나는 미소로 대답하고, 그 해에 형제들을 쳤다.
이번에는 칼을 들지 않는다.
“꿈을 꿨습니다.”
이 카드는 준비해두었다. 아이의 기억에 ‘몽중오(夢中悟)’ — 꿈속의 깨달음 — 이라는 일화가 여럿 있었다. 무림인들은 기이한 체험에 꽤 관대하다.
“길고 생생한 꿈이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는 꿈. 군사들이 달리고, 검이 부딪히고, 누군가가 명령을 내리는 꿈이었습니다.”
거짓이 아니다. 전생의 기억이 고열 속에서 쏟아진 건 사실이니까.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봤다. 오래. 깊이. 그 눈은 온화한 아버지의 눈이면서 동시에 가주의 눈이었다.
“그래.”
그 한마디에 추궁이 끝났다.
대신, 예상 못한 말이 이어졌다.
“나를 따라와라.”
산책의 방향이 바뀌었다. 정원이 아닌 세가의 안쪽으로. 경비가 두 겹, 세 겹 늘어나는 구역. 아이의 기억이 이 길을 알고 있었다.
금서각.
━━━
금서각의 문 앞에 섰을 때, 아버지가 허리춤에서 열쇠를 꺼냈다. 철이 아니었다. 연회색 빛이 도는 금속 — 보통의 쇠가 아니다. 전생에서 수많은 금속을 만져본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한양의 주조소에서도 저 질감은 본 적이 없다.
자물쇠에 열쇠가 들어가는 순간, 문 전체가 미세하게 떨렸다. 진동이 아니다. 기(氣)가 흘렀다. 열쇠 자체에 내공이 실려 있고, 자물쇠에도 같은 기운이 걸려 있다. 일종의 봉인이다.
내공으로 잠기는 문. 이 세계는 진짜로 한양과는 다른 곳이구나.
문이 열렸다.
서늘했다. 온도가 아니라 공기의 질이 달랐다. 밖보다 밀도가 높고, 서책의 먹 냄새와 함께 뭔가 날카로운 기운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처음이다. 이 몸에서 처음으로 ‘알 수 없는 것’을 만났다.
“들어가거라.”
방은 생각보다 작았다. 사면에 서가가 놓여 있고, 가운데 낮은 탁자 하나. 서가에 꽂힌 서책의 수는 스무 권 남짓. 하지만 이건 양의 문제가 아니다. 스무 권의 서책 하나하나에서 기운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서가를 훑는 눈이 멈추었다. 왼쪽 서가, 아래서 세 번째 칸. 다른 곳은 빈틈없이 꽂혀 있는데, 거기만 한 권 분량의 빈자리가 있었다. 먼지 자국이 서책 한 권의 폭만큼 끊겨 있다. 최근에 빠진 거다.
“뭘 보고 있느냐.”
아버지의 목소리에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도 — 찰나, 빈자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알고 있으면서 묻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억해 두자.
아버지가 서가에서 한 권을 뽑았다. 얇은 책이었다. 천룡결(天龍訣) 기초편이라고 적혀 있었다.
“네가 보아야 할 것이다.”
책을 받아들었다. 목이 떨렸다. 하지만 이건 기대가 아니라 경계였다. 전생에서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온 것들의 끝을 너무 많이 봐왔다. 공신들에게 내린 녹봉, 세자에게 물려준 왕위. 준다는 것은 곧 관찰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시선이 책이 아니라 내 손끝을 보고 있었다.
금서각의 기초 심법서를 7세 막내에게 준다. 7세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처음 보는 눈인지, 아는 자의 눈인지.
좋다. 받아들이겠다.
첫 장을 펼쳤다.
━━━
숨을 들이쉬고, 뱉어라. 한 호흡에 한 세계를 담아라.
첫 줄이었다. 기초 심법서치고는 범상치 않은 문장이다. 시(詩)에 가까웠다.
읽어내려갔다. 기는 숨에서 시작하고, 숨이 고르면 기가 잔잔하며, 숨을 의식하면 숨이 아니라고 했다. 안다. 활을 쏠 때, 시위를 당기는 순간 호흡을 의식하면 과녁을 빗나간다. 이성계가 사슴을 쏠 때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건, 숨을 멈춘 게 아니라 숨이 동작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장으로 넘기다, ‘심마(心魔)’ 두 글자에서 손이 멈췄다.
마음에 틈이 있으면, 기는 그 틈으로 역류한다.
먹 냄새가 사라졌다. 대신 피가 났다. 선죽교의 밤. 얼음 같은 공기. 정몽주의 눈. 그 다음에는 이방석의 비명. 칼이 내려가고, 비명이 끊기고.
숨이 막혔다. 7세의 폐가 쥐어짜이듯 오그라들었다.
“막내.”
아버지의 손이 어깨를 잡았다. 현실이 돌아왔다. 서가, 먹 냄새, 종이.
무릎 위에 펼쳐진 책에 붉은 점이 번지고 있었다. 심마(心魔)라는 글자 위에. 코피였다. 손등으로 닦았다. 피가 묻은 곳에서 묘하게 열기가 올라왔다. 먹과 피가 섞인 자리가 — 따뜻했다.
아버지의 눈이 책 위의 핏방울을 봤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것이 더 무서웠다.
3초. 아니, 그보다 짧았을 거다. 하지만 그 찰나에 600년치의 피가 목까지 차올랐다.
나는 틈투성이다. 동생을 죽인 기억, 형제를 밀어낸 기억, 처남을 벤 기억. 이것들이 심마가 된다면 — 나는 무공을 익히기도 전에 주화입마로 끝날 수 있다.
책을 덮었다. 손이 떨리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힘을 줬다.
“……어렵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봤다. 어깨를 잡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어떤 대목이 어려웠느냐.”
이건 심법서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방금 네가 멈춘 이유를 묻고 있다.
“……세 번째 장이요. 마음에 틈이 있으면 기가 역류한다는 대목.”
말끝을 일부러 흐렸다. 전부 이해했다고 하면 안 되고, 전혀 모르겠다고 해도 안 된다.
“첫 줄이 좋았습니다. ‘한 호흡에 한 세계를 담아라.’ 이게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르겠지만, 알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잠시 침묵했다.
“숨을 쉬어봐라.”
예상 못한 지시였다.
“지금, 여기서. 첫 장에 쓰인 대로.”
시험이 한 단계 더 들어왔다. 심법서를 읽고 이해한 수준을 보겠다는 거다.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쉬었다. 고르게 쉬되 잊어라. 숨을 의식하면 숨이 아니다.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버지가 보고 있으니까. 하지만 전생에서 수천 번 해본 것이 있다. 활을 들 때의 호흡. 시위에 손이 닿는 순간 세상이 사라지고, 과녁만 남는 그 순간의 숨.
그 기억을 불러냈다.
들이쉬고. 내쉬고.
몇 번째였을까. 리듬이 잡히자 몸의 힘이 빠졌다. 그리고 — 뭔가가 스쳤다. 아주 미세하게. 손끝에서 발끝까지, 물줄기 하나가 흘러간 것 같은 감각.
아닐 거다. 기감은 이 나이에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코끝에 말라붙은 피 — 아까 심마의 흔적 — 그 자리가 따뜻해졌다.
눈을 떴다.
아버지의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가주의 냉철함도, 아버지의 온기도 아닌 — 눈이 더 깊어져 있었다. 숨을 한 번 삼키는 것이 보였다. 손이 반사적으로 검병 쪽으로 반 박자 갔다가 멈췄다.
“……기초편이지만 천룡결의 정수가 담겨 있다. 천천히 읽어라. 서두르면 안 된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서두르면 안 된다. 그 말이 심법서의 가르침보다 깊이 박혔다. 나는 항상 서둘렀다. 정몽주를 죽인 것도 서두른 것이고, 왕자의 난도 서두른 것이다. 서두른 결과가 태평성대였지만, 그 대가로 잃은 것의 목록은 태평성대보다 길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
금서각을 나왔다.
얻은 것. 천룡결 기초편. 기(氣)는 호흡에서 시작하고,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다. 발견한 것. 심마. 전생에서 쌓아올린 죄책감이 이 세계에서는 폭탄이 된다. 그리고 — 서가의 빈자리.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알면서 묻지 않았다.
무력감에 떠는 건 어젯밤으로 끝이다.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아버지.”
“왜.”
“체력을 먼저 키우고 싶습니다. 매일 아침 마당을 달려도 되겠습니까.”
아버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심법부터 시작하지 않고?”
“아까 숨을 쉬어봤을 때, 몸이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그릇이 작으면 물을 담아도 넘칩니다.”
7세의 말치곤 지나치게 또렷하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꿈’ 카드를 썼다. 여기서 일부러 어눌하게 말하면 오히려 의심을 산다. 일관성이 중요하다.
아버지가 잠시 나를 보았다. 그리고 —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그날 오후, 나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전생 사냥꾼들의 달리기를 쓰고 있었다. 보폭을 일정하게, 호흡은 세 걸음에 한 번, 어깨는 흔들리지 않게. 왕실 사냥에서 선봉을 맡았던 무장들의 달리기를 수십 년간 눈에 담아온 결과다.
첫날 스무 바퀴. 셋째 날 서른. 닷새째, 숨이 달라졌다. 들이킬 때 여유가 생겼다. 폐가 타는 느낌이 사라진 건 아닌데, 불 속에서 숨 쉬는 법을 찾은 것 같았다.
매일 밤, 달리기를 마치고 침상에 누워 천룡결 기초편을 읽었다. 호흡의 구절을 읽으면서 그날의 달리기를 떠올렸다. 세 걸음에 한 번 쉬던 호흡의 리듬과, 심법서가 말하는 ‘고르게 쉬되 잊어라’의 감각 사이에 겹치는 것이 있었다.
아직 기감은 없다. 하지만 길이 보인다.
━━━
닷새째 되던 날, 달리기를 마치고 마당 구석에서 물을 마시는데 뒤에서 수군거림이 들렸다.
“……공자님 발걸음이 이상하다네. 자로 잰 것 같아. 보폭이 한 치도 안 틀려.”
“일곱 살짜리가?”
“그리고 숨소리가 안 들려. 서른 바퀴를 뛰었는데.”
……조심해야 한다.
물을 마저 마시고 일어서는데, 시선이 또 하나 있었다. 위. 서고 2층 창문.
올려다보지 않았다. 전생에서 수십 년간 감시 속에 살았다. 시선의 무게를 몸으로 안다. 둘이다. 맏형과 둘째.
서고 창문 쪽으로 작게 고개를 숙였다. 시선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표시. 도발이 아니라, 인사다.
━━━
그때, 서고 문이 열렸다. 내려온 건 둘째 형이었다.
조용한 사람이다. 서고에서 책 읽는 걸 좋아하고, 형제 중 가장 말이 적다. 맏형이 검으로 말한다면, 이 형은 눈으로 말한다.
그 둘째가 지금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눈이 비어 있지 않았다.
“막내.”
“이형.”
둘째가 멈추었다. 내 앞에 서서, 위에서 내려다봤다. 키 차이가 한 뼘은 넘는다. 둘째의 눈이 내 얼굴을 읽고 있었다. 정보를 수집하는 눈. 판단 전에 먼저 관찰하는 눈. 하륜이 처음 내 앞에 섰을 때와 같은 종류의 눈이다.
“금서각에 갔다며.”
심장이 뛰었다. 이 세가에서 비밀이 유지되는 건 없다. 아버지가 막내를 금서각에 데려갔다. 이건 세가 전체를 뒤흔들 소식이다.
“……예.”
“천룡결 기초편을 받았고.”
“예.”
둘째가 잠시 침묵했다. 시선이 내 얼굴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코끝. 아까 피를 닦은 자리에 아직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을 거다. 둘째의 눈이 거기서 1초 머물렀다가 올라왔다.
그리고 물었다.
“재밌더냐.”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어렵더냐’도 아니고, ‘이해했느냐’도 아니고. 재밌더냐.
나는 둘째의 눈을 봤다. 거기에 적의는 없었다. 경계도 없었다. 대신,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호기심과 — 기대. 자기 영역에 들어온 동생을 향한, 학자의 눈.
“첫 줄이 좋았습니다.”
둘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읽다 막히면 나한테 와. 기초편은 내가 먼저 뗐으니까.”
돌아섰다. 서고로 올라가는 둘째의 등을 봤다. 바람이 옷자락을 들었다. 허리춤에 끼운 서책의 책등에 감긴 실이 찰나 드러났다.
붉은 실.
가슴속에서 두 가지 감정이 부딪혔다. 하나는 — 이 형은 적이 아닐 수 있다는 안도. 다른 하나는 — 전생의 효령대군도 똑같이 온화했다는 경계.
책 뒤에 숨는 자는 두 종류다. 책이 좋아서 숨는 자와, 숨을 곳이 필요해서 책을 택한 자.
둘째가 계단 중간에서 멈추었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막내야.”
“예.”
“어젯밤 일. 아직 안 끝났다.”
계단을 올라갔다. 문이 닫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닫힌 문을 봤다. 이 형은 왜 그 정보를 나한테 줬을까. 경고인가. 호의인가. 아니면 — 미끼인가.
형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아서는데, 발밑에 뭔가 밟혔다. 마당 흙 위에 찍힌 젖은 발자국 하나. 발가락이 네 개뿐이었다. 내 달리기 궤적과 반대 방향으로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