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언제나 같은 장면에서 시작됐다.
노을빛 서재. 책등이 바랜 양피지 장서들. 그리고 창가에 앉아 세라를 바라보는 남자.
십 년이었다. 매일 밤, 예외 없이.
세라 아이젠은 그 꿈을 믿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 아침까지는.
루시드 성의 외벽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부유섬의 가장자리에서 새벽 안개가 피어오르고, 셀레스티아 구역의 첨탑들이 그 안개를 가르며 솟아 있었다. 세라의 방은 그보다 훨씬 낮은 곳이었다. 아버지의 작위가 박탈된 이후 아이젠 가문이 옮겨 앉은 자리는, 귀족구와 평민구의 경계선 어딘가에 걸쳐 있는 어중간한 저택이었다.
창틀에 팔꿈치를 얹고 세라는 손 안의 종이를 다시 폈다.
황실 인장. 적색 봉랍. 개봉하면 손끝에 잔열이 남는 마력 봉인.
이미 세 번을 읽었다.
'델마르크 공작가와의 정략 계약이 황실 명의로 체결되었음을 통보한다. 당사자 세라 아이젠은 이월 첫째 날까지 루시드 성 북부 접견실로 출두하라.'
이월 첫째 날. 오늘이었다.
세라는 종이를 접었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는 이미 식어 있었고, 쓴맛만 혀 위에 남았다.
델마르크. 킬리안 폰 델마르크.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보는 동안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세라는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고 그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꿈속의 그는 달랐다. 서재에서 책을 읽다 세라가 들어오면 고개를 들고, 별말 없이 맞은편 의자를 발끝으로 밀어주던 사람. 말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침묵이 세라에게는 가장 쉬운 언어였다.
그런데 그가 제국에서 가장 냉혹하다고 알려진 북부 공작이라는 것을, 세라는 오늘에야 직면하고 있었다.
북부 접견실은 셀레스티아 구역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에테르 라인이 교차하는 지점이라 공기 자체가 달랐다. 마력이 짙은 구역에서는 피부가 약간 따끔거리는 법인데, 세라는 오래전부터 그 감각에 익숙했다. 아버지가 몰락하기 전까지는 이 구역에서 살았으니까.
복도 끝에서 두꺼운 문이 열렸다.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있었다. 황실 측 인사 두 명, 성기사단 참관인 하나, 그리고 창가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남자.
세라의 발이 멈췄다.
검은 군복. 어깨에서 손목까지 이어지는 은빛 수장. 그리고 창문으로 쏟아지는 역광 속에서 윤곽만 드러난 옆모습.
꿈속의 서재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하지만 틀림없었다.
남자가 돌아섰다.
회색 눈이었다. 안개가 걷히기 직전의 하늘 같은 색. 그 눈이 세라를 훑고 지나갔다. 훑었다기보다는 확인했다는 편이 정확했다. 짐을 확인하듯이.
"아이젠 가의 여식."
목소리는 기억하는 것보다 낮았다. 꿈속에서 그는 조용히 말하는 편이었는데, 지금 이 목소리는 방 전체에 무게를 얹는 종류였다.
세라는 한 박자 두었다가 답했다.
"세라 아이젠입니다, 공작님."
"앉아라."
명령이었다. 요청이 아니라. 세라는 지정된 의자에 앉으면서 그의 눈을 다시 한번 보았다. 인식. 계산. 그 외에는 없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꿈은 꿈을 꾼 사람에게만 실재한다. 세라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모르는 얼굴로 바라보자, 갈비뼈 안쪽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세라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천천히 쥐었다.
계약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황실 측 인사가 조항을 읽기 시작했다. 마력 결속. 기간 삼 년. 델마르크 공작가의 군사력에 대한 황실 감시권 확보. 아이젠 가문의 작위 일부 복권.
세라는 조항들을 들으면서 창밖을 보았다.
셀레스티아의 첨탑 위에 구름이 낮게 깔렸다. 이 구역에서는 구름도 마력 밀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지금 저 구름은 짙은 남색이었다. 에테르 라인이 불안정하다는 신호였다.
"아이젠 가."
킬리안이 말했다. 세라가 시선을 돌렸다.
"계약 조항 중 이의가 있는 항목이 있는가."
목소리의 온도가 없었다.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깔린 질문이었다.
세라는 계약서 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으로 종이 질감을 확인하면서 세 번째 조항을 짚었다.
"결속 기간 중 당사자의 독립적 마력 사용에 제한을 둔다는 조항입니다."
"그것이 계약의 핵심이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한 범위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잠깐의 침묵이었다. 황실 측 인사가 미묘하게 자세를 바꾸는 소리가 들렸다.
킬리안의 눈이 세라에게로 왔다. 이번에는 달랐다. 짐을 확인하는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측정하는 눈이었다.
"범위는 이후 협의한다."
"서면으로 명시되지 않은 조항은 계약 효력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세라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낮아지지도 않았다. 거짓말이 아니니까.
킬리안은 잠시 세라를 보았다. 보는 것인지 생각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그가 계약서 쪽으로 손을 뻗었다. 펜을 들었다. 세 번째 조항 옆에 무언가를 적었다.
"범위: 공작령 결계 유지 관련 마력 외 전면 허용."
계약서를 세라 쪽으로 밀었다.
세라는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서명란에 펜을 댔다.
손이 움직이기 직전에 멈췄다.
꿈속에서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서재에서, 노을이 질 무렵. 세라가 언젠가 이 꿈이 끝나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약속이었다. 꿈속에서 맺은 약속은 현실에서 반드시 이행되어야 한다. 세라는 그 규칙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영혼이 잠식된다는 것도.
문제는, 그 약속을 한 사람이 지금 맞은편에 앉아 세라를 처음 보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라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조용히. 어깨가 움직이지 않도록.
그리고 서명했다.
잉크가 마르는 동안 창밖의 남색 구름이 더 낮아졌다. 에테르 라인이 진동하는 소리가, 마력에 예민한 사람에게는 낮은 금속음처럼 들린다. 세라의 귀 안쪽에서 그 소리가 울렸다.
황실 측 인사가 계약서를 수거했다. 성기사단 참관인이 인장을 찍었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사람들이 하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라도 일어섰다.
킬리안은 이미 창가로 돌아서 있었다. 세라에게 등을 보이고. 마치 처음부터 이 방에 세라가 없었던 것처럼.
세라는 그 등을 잠깐 보았다. 어깨선. 군복의 은빛 수장. 꿈속의 서재에서 창문 쪽을 보고 있을 때와 비슷한 자세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었다.
세라는 문 쪽으로 걸었다. 손잡이에 손을 올렸을 때 킬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젠."
세라가 돌아보지 않고 멈췄다.
"공작령 이동은 사흘 후다. 짐은 최소화해라."
"알겠습니다."
세라가 문을 열었다.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등 뒤에서 낮은 소리가 들렸다. 킬리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황실 인사 중 하나가 참관인에게 속삭이는 소리였는데, 복도의 에코 때문에 또렷하게 들렸다.
"공작께서 직접 조항을 수정하신 건 처음이십니다."
세라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손가락 끝에서 접힌 채로 쥐고 있던 황실 통보 종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구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손바닥에 닿는 종이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느끼면서, 세라는 계단을 내려갔다.
사흘.
사흘 안에 세라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꿈속의 약속 목록. 머릿속에서 열 개가 넘는 항목이 줄을 섰다. 그중 하나라도 이행하지 못하면 영혼 잠식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약속들을 이행하려면, 약속을 맺은 상대가 그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기억을 증명하는 방법.
세라는 계단 중간에서 잠깐 발을 멈추었다. 손 안의 종이를 한 번 더 쥐었다.
위층 접견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무거운 발소리. 킬리안이 나오는 것이었다.
세라는 다시 걸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 복도 모퉁이를 돌았을 때, 등 뒤에서 발소리가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킬리안이 옆에 있는 부하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이젠 가의 마력 기록 전부 가져와라. 오늘 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