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계약서에는 킬리안 폰 델마르크의 서명이 이미 찍혀 있었다.
세라는 황실 서기관이 내민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잉크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듯 서명 위에 미세한 광택이 남아 있었다. 서기관의 손이 펜을 내밀었고, 세라는 그것을 받았다. 손끝에 닿은 깃털 끝이 차가웠다.
'마력 결속 계약.'
어젯밤 황실 칙령이 도착했을 때, 세라는 촛불 앞에서 그 문서를 세 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같은 이름이 나왔다. 킬리안 폰 델마르크. 북방의 결계를 쥔 자. 제국이 그를 황실에 묶어두려는 방식은 단순했다. 황제의 먼 친척 항렬에 해당하는 세라 아이젠을 그의 곁에 심어두는 것.
세라는 서명했다.
펜을 내려놓는 순간 손목에 가느다란 열감이 지나갔다. 계약의 마력이 피부 아래로 스미는 감각이었다. 서기관이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회수하며 허리를 굽혔다.
황실 알현실을 나서자 복도에는 이른 아침의 찬 공기가 고여 있었다. 부유섬의 상층부는 언제나 이런 냄새가 났다. 구름과 마석이 뒤섞인, 무게감 없는 냄새. 세라는 장갑을 끼며 걸었다. 손목 안쪽이 아직도 미미하게 뜨거웠다.
마차가 셀레스티아 서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델마르크 공작가의 마차는 검은색이었다. 문장 없이 은빛 테두리만 둘러진, 과시하지 않는 방식의 위압감이었다. 마부가 문을 열었고, 세라는 올라탔다.
마차 안은 비어 있었다.
당연했다. 공작이 직접 신부를 마중 나올 리 없었다. 세라는 좌석에 등을 기댔다. 창밖으로 셀레스티아의 첨탑들이 흘러갔다. 오래된 석조 건물 위에 마력 결계가 옅은 청백색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세라는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낡은 나무 상자였다. 경첩이 닳아서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열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꿈속에서 그가 건네준 것들이 담겨 있어야 할 자리만 있었다. 현실에서 꿈의 물건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세라는 매일 아침 이 상자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무게가 없는데도 손이 무거웠다.
상자를 다시 품에 넣었다.
마차가 느려지더니 멈췄다.
공작의 도성 영접관은 세라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넓고 차가운 방이었다. 벽난로에 불이 피워져 있었지만 방 전체를 데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라는 소파 끝에 앉아 장갑을 벗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보다 발소리가 먼저 들렸다. 규칙적이고 무거운 발소리였다. 세라는 일어섰다.
킬리안 폰 델마르크는 예상보다 키가 컸다.
세라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십 년 동안 꿈속에서 본 얼굴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얼굴은 달랐다. 꿈속의 그는 웃었다. 아주 드물게, 그러나 분명히. 지금 눈앞의 남자는 입술을 수평으로 유지한 채 세라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세라의 얼굴 위를 지나 허공 어딘가에 닿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눈이었다.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세라는 삼켰다.
"아이젠 영애."
낮은 목소리였다. 꿈속에서 들은 목소리와 같았다. 음색이 같았다. 세라는 그 사실이 차라리 원망스러웠다.
"공작 각하."
세라는 예를 갖춰 인사했다. 시선은 그의 가슴께에 고정했다.
킬리안이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서류 하나를 밀어놓았다.
"혼인 이전에 확인할 사항들입니다. 읽어보십시오."
세라는 서류를 집었다. 첫 페이지에 빼곡하게 적힌 조항들을 훑었다. 영지 내 행동 반경. 외부 접견 허가 절차. 마력 결속 계약의 세부 조건.
"이중 거처 조항."
세라가 해당 항목을 짚었다.
"공작 각하와 저는 도성 내 별채를 각각 사용하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군요."
"그것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세라는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 조항에서 손이 멈췄다. 마력 연동 항목이었다. 마력 결속 계약 특성상 두 당사자의 마력이 일정 범위 내에서 공유된다는 내용이었다. 세라의 마력 수치가 낮아지면 킬리안이 감지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킬리안이 그 항목을 보고 있었다.
"사생활 침해로 느낀다면."
"느끼지 않습니다."
세라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킬리안을 똑바로 보았다. 꿈속 얼굴과 지금 얼굴을 겹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겹쳤다. 눈매가 같았다. 눈꺼풀이 약간 처진 방식이, 시선이 움직일 때 속눈썹이 만드는 그늘이.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킬리안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말하십시오."
"각하는 꿈을 꾸십니까."
침묵이 내려앉았다.
벽난로의 불꽃이 튀는 소리가 났다. 킬리안은 세라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아주 조금도. 그러나 다음 말이 나오기까지 반 박자가 걸렸다.
"불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렇군요."
세라는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 위 서류를 다시 집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서명란이 있었다. 세라는 잉크 병을 끌어당겨 펜을 적셨다.
그리고 멈췄다.
"각하는 오늘 처음 저를 보셨습니까."
"그것이 서명과 관련이 있습니까."
"관련이 없습니다."
세라는 서명했다. 손목 안쪽이 다시 뜨거워졌다. 아침의 감각과 같은데 강도가 달랐다. 결속이 완성되는 감각이었다. 세라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킬리안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일어서려 할 때 세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영혼 잠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킬리안이 멈췄다.
"꿈속에서 맺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자에게 오는 페널티입니다. 꿈을 기억하는 쪽이 일방적으로 치르게 되는."
세라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결속 마력이 피부 아래에서 미세하게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 각하께 열일곱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꿈속에서."
킬리안의 시선이 세라에게 돌아왔다. 처음으로, 진짜로 세라를 보는 눈이었다.
"각하는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세라는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낡은 나무 상자.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
"이행 기한은 혼인 이후 일 년입니다. 그 안에 완료하지 못하면 제 마력이 잠식됩니다. 각하께는 무관한 일이지만, 마력 연동 조항 때문에 각하도 그 영향을 일부 받으실 수 있습니다."
킬리안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상자를.
"열일곱 가지."
"예."
"구체적으로."
세라는 고개를 들었다. 킬리안의 눈이 차가웠다. 그런데 그 차가움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주 빠르게, 세라가 이름 붙이기 전에 사라지는 무언가가.
"그것은."
세라가 입을 열었을 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급한 발소리였다. 문 너머에서 누군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공작가의 부관이었다. 젊은 남자였는데 얼굴이 창백했다.
"각하, 북방 결계에서 신호가 왔습니다."
킬리안이 일어섰다.
"강도."
"삼 등급입니다. 그런데."
부관이 잠깐 멈추었다. 세라 쪽을 보았다가 다시 킬리안을 보았다.
"마수가 아닙니다, 각하. 결계 안쪽에서 신호가 나왔습니다."
킬리안의 손이 허리춤으로 갔다. 검 손잡이 위에 손이 얹혔다.
세라는 테이블 위의 상자를 집었다. 뚜껑이 덜컥 열렸다가 닫혔다. 텅 빈 내부가 잠깐 드러났다.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킬리안이 돌아보았다.
"계약서에 영지 내 이동은 공작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만."
"읽었습니다."
세라는 상자를 품에 넣으며 일어섰다.
"허가를 구합니다,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