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틀 너머로 붉은 혀가 넘실거렸다. 매캐한 연기가 폐부를 찌르듯 파고들었다. 아르젠트 저택의 상징인 은색 커튼이 흉측하게 타올랐고, 벽 너머에선 비명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무거운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난폭하게 짓밟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마르타가 거칠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은 그을음으로 엉망이었고, 단정하던 머리칼은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아가씨, 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마르타가 떨리는 손으로 에블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에블린은 품 안의 밀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종이의 바스락거림이 손끝에 닿았다. 가문의 멸망을 기록한 증거물. 전생에서도 이 불길은 모든 것을 삼켰다. 그때는 그저 공포에 질려 카시안의 손을 잡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에블린은 서재 한구석으로 달려가 책장을 밀어냈다. 좁은 틈새가 드러났다. 선대 가주들만이 공유하던 비밀 통로였다. 차가운 지하의 공기가 발목을 감싸 안았다.
"마르타, 이쪽이야."
에블린은 주저 없이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뒤따라 들어온 마르타가 무거운 책장을 다시 끌어당긴 순간, 서재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지하까지 울려 퍼졌다.
"추격조입니다. 숨을 죽이십시오."
마르타가 에블린의 입을 가볍게 막았다. 나무 틈새로 비쳐든 불빛이 기사들의 망토를 비췄다. 붉은 눈동자가 수놓아진 크림슨 아이의 문장이었다. 그들은 짐승처럼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자신의 왼쪽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뼈가 보일 정도로 하얗게 질린 손등이 미세하게 떨렸다. 몸 안의 에테르가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열두 살의 육체는 넘쳐나는 마력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작았다.
"아가씨,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마력 폭주인가요."
"괜찮아. 잠시 눌러두는 것뿐이야."
기사들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두 사람은 숨을 죽였다. 마르타의 손바닥에 밴 식은땀이 에블린의 뺨에 닿았다. 통로 안쪽은 습하고 눅눅한 냄새가 진동했다. 에블린은 벽을 짚으며 천천히 발을 뗐다.
"황혼 항구로 가야 합니다. 상단 쪽에 미리 연락을 해두었습니다. 제국 밖으로 나가셔야 해요."
마르타의 다급한 제안에 에블린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르타. 항구는 이미 그들의 감시망 안에 있어."
"그럴 리가요. 거기는 저희 가문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곳입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그 영향력이 오히려 우리 목을 죄는 독이 될 테니까. 우리는 하부 저지대로 간다."
마르타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흔들렸다. 하부 저지대는 에테르 찌꺼기가 떠다니는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귀족이라면 발을 들이는 것조차 수치로 여기는 곳이었다.
"하지만 거기는 무법지대입니다. 아가씨 같은 분이 가실 곳이 아닙니다."
"도망치는 게 아니야. 적들이 가장 예상하지 못할 곳으로 들어가는 거지. 나를 믿어줘, 마르타. 너와 나, 둘 다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에블린은 마르타의 거친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차갑게 식은 에블린의 체온에 마르타의 눈빛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통로 끝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루미나 강의 하수구와 연결된 배출구였다. 밖으로 나가기 전, 에블린은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가슴 중앙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손끝에서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마력을 숨겨야 해. 조금 고통스럽겠지만 참을 수 있어."
심장 주변의 에테르 흐름을 강제로 역류시켜야 했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신경이 타 들어가는 고통에 실신했을 터였다. 에블린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입술 사이로 신음이 비집고 나오려 했다.
허벅지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혈관을 따라 얼음 송곳이 박히는 감각이 전신으로 퍼졌다. 주변의 공기가 기이하게 일그러지며 에블린의 존재감을 지워나갔다.
"세상에, 아가씨. 몸이 투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 크림슨 아이의 탐지기에도 걸리지 않을 거야."
에블린은 전신을 훑는 오한에 치아를 맞부딪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출구를 빠져나오자 썩은 물비린내와 타버린 마력석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하부 저지대의 공기는 무겁고 끈적거렸다.
좁은 골목마다 누더기를 걸친 이들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에블린은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그때, 멀리서 장엄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황실 종소리군요. 반역 혐의를 공식화하려는 모양입니다."
마르타가 칼자루를 쥐며 속삭였다. 에블린은 걸음을 재촉했다. 기억 속의 지도는 정확했다. 이곳 어딘가에 그림자 시장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어야 했다.
하부 저지대의 길은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낡은 에테르 배관들이 천장 위를 거미줄처럼 뒤덮고 있었고, 그 틈새로 정제되지 않은 독성 에테르가 보랏빛 증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발을 디딜 때마다 진흙과 오물이 뒤섞인 바닥이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에블린은 코를 찌르는 악취를 견디며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누가 뒤를 밟는 것 같습니다."
마르타의 경고가 떨어지기도 전, 에블린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공기가 기분 나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마력 찌꺼기를 흩뿌리며 길을 유도하고 있었다. 에블린은 막다른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축축한 벽면에는 이끼가 가득했다. 머리 위로는 녹슨 에테르 배관이 신음하듯 울어댔다. 에블린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안개 속에서 검은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망토를 두른 사내였다. 그의 몸에서는 비릿한 피 냄새와 익숙한 약초 향이 섞여 났다. 사내의 오른손, 장갑을 끼지 않은 손등 위로 흉측한 흉터가 길게 뻗어 있었다. 불에 데인 듯 쭈글쭈글하게 뭉쳐진 피부였다.
그 손은 전생에서 에블린의 목을 졸랐던 바로 그 손이었다.
사내가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서늘한 눈동자가 에블린을 꿰뚫듯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군, 아르젠트의 작은 새가."
"누구냐. 우리를 어떻게 찾아냈지."
마르타가 검을 뽑아 앞을 가로막았지만, 사내는 코웃음을 치며 품 안에서 보랏빛 마력이 감도는 단검을 꺼냈다. 에블린은 떨리는 왼쪽 손목을 오른손으로 짓눌렀다.
"그 손의 흉터, 아직도 아픈가 보지."
에블린의 서늘한 목소리에 사내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여유가 순식간에 기괴한 살의로 변질되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사내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마르타가 대응할 틈도 없었다. 차가운 칼날이 에블린의 뺨을 스치고, 사내의 거친 손이 그녀의 멱살을 낚아챘다. 에블린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아는 건 그뿐만이 아니야. 네가 오늘 여기서 죽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거든."
에블린의 심장 부근에서 역류하던 푸른 마력이 폭발하듯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사내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너, 설마 자폭하려는 거냐."
사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에블린은 대답 대신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억눌렸던 마력이 그녀의 혈관을 타고 역류하며 주변의 공기를 집어삼켰다. 하부 저지대의 무거운 대기가 에블린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쳤다.
"마르타, 물러나."
짧은 명령과 함께 에블린의 손끝에서 청백색의 섬광이 터져 나왔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 나갔다. 그의 손등에 새겨진 흉터가 마력의 열기에 타들어 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에블린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사내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전생의 빚은 이걸로 시작이야."
사내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에블린을 노려보더니, 연기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르타가 다급히 에블린을 부축했다. 에블린의 입술 끝에서 붉은 선이 흘러내렸다. 마력을 과하게 억제한 대가였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가야 해. 아직 끝나지 않았어."
에블린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왼쪽 손목을 다시 한번 움켜쥐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가문의 멸망을 막고, 자신을 죽였던 이들에게 똑같은 절망을 안겨주는 일은.
두 사람은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더욱 날카롭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제국은 이제 그녀를 반역자로 선포할 것이고, 세상 어디에도 그녀가 쉴 곳은 없었다. 하지만 에블린의 눈동자에는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한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림자 시장으로 간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에블린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하부 저지대의 깊은 어둠이 그녀의 작은 몸을 삼켜버릴 듯 일렁였으나, 그녀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