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을 죄는 악력에 폐가 짓눌렸다. 금빛 대리석 바닥에 흩어진 은색 머리카락이 붉은 핏물에 젖어 들었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눈앞의 남자는 선명했다. 카시안 발레리우스. 제국의 태양이라 칭송받던 자가 가문을 멸문시킨 학살자가 되어 서 있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온기를 마지막으로 암전이 찾아왔다.
서늘한 감각에 눈을 떴다. 손끝에 닿는 것은 차가운 돌바닥이 아니었다. 거친 질감의 종이와 딱딱한 나무의 감촉이었다. 코끝을 찌르는 진한 잉크 향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블린은 급히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멍 자국도, 찢어진 통증도 없었다. 매끄럽고 가느다란 목덜미가 손바닥에 걸렸다.
고개를 드니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아르젠트 저택의 서재였다. 높은 천장 아래 빽빽하게 꽂힌 가문의 기록들. 창밖으로는 저무는 석양이 붉게 일렁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반쯤 쓰다 만 편지와 깃펜이 놓여 있었다. 에블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 하나 없이 희고 작은 손이었다. 열두 살, 모든 비극이 시작되기 전의 모습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확인했다. 제국력 498년 7월 15일. 기억이 맞다면 사흘 뒤였다. 황실 기사단이 들이닥쳐 아버지를 반역죄로 압송할 시간. 그리고 일주일 만에 가문의 모든 핏줄이 단두대 아래서 사라졌다. 에블린은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가슴 안쪽이 얼음물을 들이켠 듯 시려 왔다.
허둥지둥 서랍을 열어 재정 장부를 꺼냈다. 아르젠트 가문의 부를 지탱하던 에테르 광산의 기록이 필요했다. 손가락이 장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눈동자가 빠르게 숫자를 훑어 내려갔다. 3월, 4월, 5월. 채굴량은 일정했다. 하지만 에테르 정제소로 넘어간 물량과 장부상의 숫자가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특정 구역에서 마력이 역류했다는 짧은 메모가 눈에 띄었다. 역류 현상은 자연 발생적일 수 없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에테르의 흐름을 뒤틀었다는 증거였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알고도 묵인한 것일까.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숫자들이 바로 가문을 무너뜨릴 덫이었다.
육중한 서재 문이 열렸다. 검은 예복을 차려입은 노부인이 찻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가문의 유모이자 총관인 마르타였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에블린의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끝까지 곁을 지키다 화살에 맞았던 사람. 마르타는 에블린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공녀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잠시 쉬시는 게 좋겠어요."
마르타의 손길이 어깨에 닿았다. 에블린은 그 손을 꽉 움켜쥐었다. 마르타의 눈이 의아함으로 가늘어졌다. 평소라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어린 주인의 돌발 행동이었다. 에블린은 떨림을 억누르며 장부를 덮었다. 지금은 슬퍼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사흘이라는 시간은 모래알처럼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울 시간은 없어, 마르타. 아버지가 숨겨둔 지하 금고의 열쇠를 가져와."
"금고 말씀이십니까? 그곳은 가주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지금 당장 가져오라고 했어. 내 명령이야."
에블린의 목소리가 서재 안을 서늘하게 가로질렀다. 열두 살 아이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서슬 퍼런 기세였다. 마르타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품 안에서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그녀의 평생 교육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우려가 서려 있었다.
둘은 촛불 하나에 의지해 지하 복도로 내려갔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눅눅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벽면의 마력석 조명이 희미하게 점멸했다. 복도 끝에는 거대한 철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르젠트 가문의 문장인 은색 늑대가 새겨진 문이었다. 에블린은 열쇠를 구멍에 밀어 넣고 힘껏 돌렸다.
무거운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금고 안은 금화나 보석 대신 낡은 상자들과 서류더미로 가득했다. 에블린은 주저 없이 가장 안쪽의 구석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처형당하기 직전, 간수에게 전해달라며 속삭였던 위치였다. 바닥의 돌 하나를 들어 올리자 먼지 쌓인 작은 나무 상자가 나타났다.
상자 틈새로 서늘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에블린은 마른침을 삼키며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빛바랜 종이 한 장이 고이 접혀 있었다. 황실의 인장이 찍힌 밀서였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에블린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서신이 아니었다. 아르젠트 가문이 제국의 에테르를 훔쳤다는 조작된 자백서였다.
서류의 맨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발신자의 이름과 함께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검은 방패 위에 새겨진 푸른 불꽃 문양. 그것을 마주한 순간, 에블린의 목덜미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환각처럼 되살아났다. 숨이 막히고 시야가 붉게 물들던 그날의 감각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발레리우스의 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에블린의 손가락이 종이를 찢어질 듯 움켜쥐었다. 분노가 전신을 타고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카시안…… 발레리우스."
낮게 읊조리는 이름이 서늘한 금고 안을 메웠다. 가문의 몰락을 설계한 주동자가 누구인지 명확해졌다. 그는 단순히 반역을 진압한 영웅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아르젠트를 멸문시키기 위해 덫을 놓은 사냥꾼이었다. 에블린은 밀서를 품에 갈무리하며 몸을 돌렸다. 뒤에서 지켜보던 마르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공녀님, 그 서류는 대체 무엇입니까? 설마 가주님께서……."
에블린은 대답 대신 금고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촛불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열두 살의 천진함이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서늘한 복수심과 뒤틀린 증오가 자리 잡았다. 그녀는 복도 벽에 걸린 은색 늑대 문장을 응시했다. 다시 얻은 삶은 축복이 아니었다. 피로 얼룩진 과거를 되돌리기 위한 잔혹한 기회였다.
"마르타, 짐을 싸. 오늘 밤 우린 황궁으로 간다."
에블린은 촛불을 불어 껐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사흘 뒤의 처형장을 준비하던 자들에게 보낼 답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발레리우스가 설계한 이 판을 뒤엎을 사람은 이제 자신뿐이었다. 에블린은 어둠을 가르며 서재를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창밖의 달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췄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매가 사냥을 앞둔 포식자와 닮아 있었다. 발레리우스 가문이 이 밀서를 보냈다면, 카시안 또한 이 음모의 핵심에 있을 터였다. 기억 속에서 자신을 안아주던 그의 거짓된 온기가 떠올라 구역질이 났다. 사랑이라 믿었던 모든 순간이 정교하게 가공된 독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서재로 돌아온 에블린은 책상 위의 깃펜을 다시 쥐었다. 그리고 백지 위에 단 한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황제에게 보내는 밀고서였다. 아르젠트가 반역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발레리우스가 황실의 에테르를 가로채고 있다는 역공의 시작이었다. 종이 위에 잉크가 번지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카시안, 이번엔 네가 죽을 차례야."
에블린은 완성된 서신을 봉인하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손목의 맥박이 불규칙하게 뛰었지만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창밖으로 침묵의 숲에서 불어온 서늘한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제국의 권력 구도를 뒤흔들 거대한 폭풍이 열두 살 소녀의 작은 방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자신을 기다리는 어둠 속으로 당당히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