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보드실 문이 열렸다.
강이준이 먼저 들어섰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낮게 울렸고, 창밖으로 테헤란로의 낮이 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열두 명의 이사진이 긴 테이블 양쪽에 앉아 두 팀장을 번갈아 훑었다. 냉방보다 차가운 공기였다.
서도윤은 강이준의 두 걸음 뒤에 섰다.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턱을 수평으로 유지했다. 손에 든 태블릿의 무게가 평소보다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버텨왔는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권 회장이 안경 너머로 두 사람을 내려다봤다.
"시작하죠."
강이준이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화면이 켜지며 프레젠테이션의 첫 슬라이드가 대형 스크린에 투사됐다. 그런데 그는 리모컨을 잡지 않았다.
대신 안쪽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서류 한 장이었다. 반으로 접혀 있었고, 가장자리가 약간 구겨져 있었다. 빗속에서 품에 안았던 흔적이 역력했다. 서도윤은 그것을 보는 순간, 오래전 비가 내리던 어느 월요일 아침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스쳤다. 피의 월요일. 누군가는 그날 모든 것을 잃었고, 누군가는 그날 무언가를 얻었다. 저 구겨진 종이가 그 대가로 건네진 것이라면, 강이준은 십 년 넘게 이것을 쓰지 않고 품어온 셈이었다.
강이준이 서류를 펼쳤다. 두 손으로, 천천히.
"발표 전에 먼저 제출할 것이 있습니다."
이사진 중 한 명이 미간을 좁혔다. 권 회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골든 티켓입니다."
서도윤의 시선이 그 서류 위에 고정됐다. 십 년간 단 한 번도 발행된 적 없다는 그것. 누가 가지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했던 것. 손등에 힘이 들어갔는지 태블릿이 삐걱하는 소리를 냈다.
"골든 티켓 사용 조건에 따라, 저는 이사회의 기존 지시 사항 한 건을 번복할 권한을 행사합니다."
이사진 사이에서 나지막한 술렁임이 일었다. 권 회장만이 입을 열지 않았다.
강이준이 서도윤 쪽으로 몸을 반쯤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처음으로, 이 방 안에서 제대로 맞닿았다.
"이 프로젝트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여기 있는 서도윤 팀장입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다. 서도윤은 이준의 어깨선이 지나치게 반듯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힘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기획 1팀의 기획안은 이 자리에서 철회합니다. 로열 보드가 요구한 수정 방향 역시 재고를 요청합니다. 서도윤 팀장의 원안이 클라이언트가 요구한 방향과 가장 근접한 기획입니다. 이후 발표는 서도윤 팀장이 단독으로 진행할 것입니다."
이사진 한 명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강 팀장, 골든 티켓을 사용하면 본인의 피칭 랭크가 초기화된다는 건 알고 있겠죠."
"알고 있습니다."
"실적 보전도 없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인센티브 풀에 대한 권리도 포기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침묵이었다.
서도윤은 말을 하지 못했다.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이준이 내려놓은 것들의 무게를 하나씩 환산하고 있었다. 피칭 랭크. 인센티브. 기득권. 그리고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르트 광고 기획에 들어온 첫날부터 쌓아온 것들 전부.
강이준이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반듯하게. 그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서도윤에게 자리를 내줬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긴장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으로 팽팽해진 얼굴. 서도윤은 그게 가벼움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아챘다.
서도윤이 앞으로 나섰다.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손이 떨리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힘을 뺐다. 첫 슬라이드가 바뀌었다. 그것은 서도윤이 혼자 새벽 내내 다듬은 원안의 첫 페이지였다. 수정 지시가 내려오기 전,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처음의 것.
"노바 일렉트로닉스가 원하는 건 기술이 아닙니다."
발표가 시작됐다.
이사진의 표정이 하나씩 바뀌어갔다. 권 회장은 두 번째 슬라이드부터 안경을 벗었다. 강이준은 뒤쪽 벽에 기댄 채 서도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발표가 진행되는 내내 그는 단 한 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다. 자신의 손등 위 흉터를 엄지로 눌렀다가 떼는 것을 반복했다. 평소보다 힘이 덜 들어갔다.
발표가 끝났을 때, 이사진 중 가장 나이 많은 이사가 먼저 박수를 쳤다.
로열 보드실을 나오는 것은 서도윤이 먼저였다.
복도에 나서자 냉방 바람이 목덜미를 쳤다. 발소리가 두 개였다. 서도윤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옆쪽 비상구 문을 밀었다.
계단을 올랐다. 강이준이 따라왔다. 둘 다 말하지 않았다.
에덴 스카이의 문이 열렸다.
노을이 쏟아졌다.
테헤란로 위로 주황빛이 납작하게 깔려 있었다. 빌딩 유리면마다 그것이 반사되어 거리 전체가 불이 붙은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낮게 흘렀다. 누군가 이전에 두고 간 플라스틱 화분이 조용히 흔들렸다. 도시의 소음이 저 아래에서 올라왔지만, 옥상은 그것과 완전히 다른 층위에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서도윤이 난간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에 쇠 난간의 열기가 배어들었다. 하루 종일 햇볕을 받아 뜨거웠다. 그 온기가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왜 그랬어요."
서도윤이 먼저 말했다. 질문이 아닌 것 같았다.
강이준은 난간 옆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 아래로 퇴근길 차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신호가 바뀔 때마다 차선이 물처럼 흘렀다.
"내 기획안이 틀렸으니까요."
"그게 전부예요?"
잠시 침묵이 있었다.
"아니요."
강이준의 시선이 자신의 손등으로 내려갔다. 흉터가 노을 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상하게도 그것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서도윤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밴드였다. 편의점 포장이 그대로였다. 봉지가 약간 구겨진 걸 보면 꽤 오래 들고 다닌 것 같았다.
"언제부터 가지고 다닌 거요?"
강이준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서도윤이 포장을 뜯었다. 조용한 소리였다. 바람 소리보다 작았다. 손가락이 능숙하지도, 서투르지도 않은 속도로 움직였다.
"손."
강이준은 잠시 있다가 손을 내밀었다.
손등이 위를 향했다. 흉터가 빛 아래 고스란히 놓였다. 전에는 반사적으로 오므렸다. 셔츠 소매를 내리거나, 서류로 가렸다.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손에서 힘이 빠져 있었다.
서도윤이 밴드를 잡았다. 손가락 끝이 흉터 위에 먼저 닿았다. 살짝이었다. 확인하듯이. 흉터의 윤곽을 따라 손끝이 아주 천천히, 한 번 지나갔다.
강이준의 어깨가 한 번, 미세하게 내려갔다.
밴드가 흉터 위에 천천히 붙었다. 서도윤이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고정했다. 꼼꼼하게. 이음새 하나 들뜨지 않도록.
테헤란로의 노을이 두 사람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빌딩 숲 사이로 빛이 길게 뻗었고, 옥상 바닥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길어졌다. 어딘가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날갯짓 소리가 잠깐 들렸다가 사라졌다.
서도윤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강이준도 손을 빼지 않았다.
노을 냄새 같은 건 없다. 그런데도 뭔가 따뜻한 것이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옥상 바닥의 온기인지, 쇠 난간에서 올라오는 열기인지, 아니면 손등 위에 얹힌 것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이준씨."
서도윤이 처음으로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성이 아니라 이름만.
강이준이 서도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두 사람의 거리가 반 뼘쯤이었다. 노을이 서도윤의 옆얼굴을 비스듬히 물들이고 있었다. 강이준은 그 얼굴을 정면으로 봤다. 처음 마주쳤을 때와 같은 얼굴인데,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서도윤이 아직 강이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은 채로 말했다.
"다음에 또 이런 거 하면, 나 혼자 다 가져요."
강이준의 입매가 천천히 움직였다. 웃음이었다. 이 방 안에서 처음 보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세요."
옥상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봤다. 문 앞에 선 사람은 차성민이었다. 노바 일렉트로닉스 담당 이사. 그의 손에는 태블릿이 들려 있었고, 화면에는 오늘 발표 자료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열려 있었다.
"강 팀장."
차성민의 목소리는 낮았다.
"피의 월요일 당시 골든 티켓 발행 경위에 대해, 이사회가 정식 조사를 요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