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현실의 공기는 무거웠다. 금박으로 수놓인 거대한 문이 닫히자 외부의 소음이 단칼에 잘려 나갔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미세하게 떨리며 보랏빛 그림자를 발치로 떨어뜨렸다. 황제는 단상 위에서 느긋하게 차를 따르고 있었다. 찻잔에 부딪히는 액체의 마찰음이 정적을 찢었다.
이리 와서 앉게.
황제의 목소리는 인자했다. 주름진 눈가에 어린 미소는 마치 오랜만에 돌아온 손자를 반기는 노인과 같았다. 한시우는 검 손잡이를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졌다. 황제의 앞에 놓인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기묘한 기하학적 문양을 그리며 흩어졌다.
긴장 풀게나. 자네가 원하는 진실이 이 잔 안에 담겨 있으니.
한시우는 천천히 발을 뗐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구두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황제의 맞은편 의자에 앉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향기가 느껴졌다. 달콤하면서도 비릿한, 세계수의 수액 냄새였다. 황제가 건넨 찻잔을 손에 쥐는 순간이었다.
바닥에 새겨진 마력 회로가 일제히 발광했다.
시야가 강렬한 백색으로 뒤덮였다. 갈비뼈 안쪽이 진동했다. 명치 부근에서 시작된 서늘한 감각이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혈관을 타고 흐르던 공허의 마력이 체외로 강제로 끌려 나오는 기분이었다. 골수가 타들어 가는 통증에 턱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져 나왔다. 황제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수천 개의 마력 회로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알현실 전체가 거대한 추출 장치로 변해 있었다.
자네의 그 공허. 그것은 오염이 아니라 완성이라네.
황제가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뇌를 찌르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한시우의 가슴 문양이 검게 타오르며 공중에 기괴한 파동을 내뿜었다. 등 뒤에서 억눌린 신음이 들렸다. 카시안이었다. 제국 최고의 기사라 칭송받던 사내가 황제의 위압감에 짓눌려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고개는 바닥을 향한 채 미동도 하지 못했다.
아르카디아는 거대한 아궁이지. 그리고 이방인들은 그 불을 지피는 고귀한 땔감이라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마다 마력의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한시우는 의자 팔걸이를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손톱이 금속 장식을 파고들어 손끝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통증보다 더한 것이 그를 옥죄었다. 추출되는 공허 마력이 허공에서 거대한 구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너는 나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다. 나의 뒤를 이으러 온 것이지.
황제의 손이 한시우의 어깨에 닿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감촉이었다. 동시에 알현실 한쪽 벽면이 투명하게 변하며 지하 수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레나가 있었다. 무수한 관에 연결된 채 창백하게 질린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가슴팍에 새겨진 검은 혈관이 맥동할 때마다 수조의 물이 보랏빛으로 번뜩였다.
선택하게. 저 아이의 생명을 유지하는 동력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와 함께 소멸할 것인가.
황제의 목소리는 유혹적이었다. 공허 마력이 빠져나간 자리에 소름 끼치는 공복감이 찾아왔다. 위장이 뒤틀리고 폐부가 쪼그라드는 감각이었다. 한시우는 고개를 들어 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모양새였다.
카시안이 바닥을 긁으며 신음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고 검은 심연에 잠식되어 있었다. 영혼 예속의 낙인이 그의 목덜미에서 붉게 타올랐다. 황제는 승리자의 눈빛으로 한시우를 내려다보았다.
자네가 바친 공허가 세계수를 다시 꽃피울 걸세. 그것이 자네의 존재 이유지.
한시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심장박동만은 선명했다. 그것은 세계수 에르드의 파장과 완벽히 일치하고 있었다. 증오도, 분노도 아니었다. 오직 생존을 향한 원초적인 거부반응이 전신을 지배했다.
손가락 끝에 남은 마지막 공허의 잔재를 긁어모았다.
황제의 가슴팍으로 손을 뻗었다. 느릿한 동작이었으나 황제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마력이 바닥난 실험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시우의 손끝이 황제의 화려한 예복을 뚫고 살점을 파고드는 순간, 황제의 미소가 깨졌다.
손바닥을 타고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황제의 심장은 기계적인 진동을 내뿜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장기가 아니었다. 수많은 이방인의 영혼을 압착해 만든 결정체였다. 한시우는 그것을 움켜쥐고 그대로 비틀었다.
커흑.
황제의 입에서 검은 피가 쏟아졌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오만함이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한시우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이 공명하며 황제의 몸 안에 남아 있던 모든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과부하가 걸린 알현실의 회로들이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갔다.
너도, 이 세계도.
한시우가 이를 악물며 속삭였다.
전부 꺼져 버려.
황제의 심장에 박힌 손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 순간, 거대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올라왔다. 아르카디아의 대지가 비명을 지르듯 요동쳤다. 성소 외곽에 자리 잡은 세계수 에르드의 거대한 뿌리들이 일제히 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섬광이 알현실을 집어삼켰다.
눈을 찌르는 광포한 빛 속에서 세계수의 줄기가 산산조각 났다. 공중으로 비산하는 나무 파편들은 마력의 불꽃에 휩싸여 재가 되었다. 대륙 전체를 지탱하던 마력망이 순식간에 끊어졌다. 하늘을 수놓던 마법 각인들이 흐릿해지더니 먼지처럼 흩어졌다.
공중에 떠 있던 마법 장치들이 추락했다.
엘리시온 왕국의 찬란한 야경이 순식간에 암흑으로 변했다. 마력석으로 구동되던 모든 기계가 멈추고, 성소를 밝히던 등불들이 일제히 꺼졌다. 정적만이 남은 어둠 속에서 거친 호흡 소리만이 고요를 메웠다.
한시우는 황제의 심장을 움켜쥔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손안에서 느껴지던 맥동이 사라졌다. 대신 차가운 금속의 질감만이 손바닥에 남았다. 암흑에 잠긴 알현실 너머로 무너져 내리는 세계수의 잔해가 불꽃놀이처럼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마력이 사라진 세계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 있었다.
한시우의 심장 부근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보랏빛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추출되는 마력이 아니었다. 꺼진 세계를 대신해 고동치는 새로운 동력이었다. 옆에 쓰러져 있던 카시안이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불이 꺼졌어.
카시안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떨렸다.
한시우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서진 창문 너머로 마력이 소멸한 아르카디아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었다. 기계도, 마법도 멈춘 정적의 시대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는 피 묻은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 위로 가져갔다.
고동은 멈추지 않았다.
창밖에서 들려오던 비명 소리가 잦아들고 기괴한 기계음이 멀리서 울려 퍼졌다.
한시우는 어둠 속에 잠긴 복도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