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연기가 제국 수도의 하늘을 가득 메웠다.
비공정의 엔진이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다.
방랑자 연합의 깃발이 불길 속에서 펄럭였다.
공중으로 치솟은 드래곤 라이더들이 창을 겨눴다.
마력 탄환이 궤적을 그리며 대기를 찢어발겼다.
고막을 찢는 폭발음이 쉴 새 없이 터졌다.
추락하는 비공정이 성벽을 들이받아 무너뜨렸다.
파편이 비처럼 쏟아지며 비명을 집어삼켰다.
한시우는 타오르는 잔해 사이로 발을 뗐다.
가슴 속 공허의 핵이 기괴한 진동을 일으켰다.
세계수 에르드의 파장이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왼쪽 가슴에서 시작된 통증이 전신으로 퍼졌다.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뒤틀리며 호흡을 막았다.
손등에 새겨진 문양이 보랏빛으로 타올랐다.
지면을 박차고 황궁 정문으로 몸을 날렸다.
시야 끝에 기괴한 그림자들이 포착되었다.
인간이라 부르기 힘든 기형적인 육체였다.
살점이 터져 나간 자리마다 증폭기가 박혀 있었다.
과거 평의회를 호령하던 권력자들의 말로였다.
그들의 눈동자엔 이성 대신 탁한 광기만 남았다.
강화 수술의 흔적이 피부 위로 툭툭 불거졌다.
괴물로 변한 전직 평의원이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시우의 뺨을 스쳤다.
공허의 칼날을 뽑으려던 찰나 은빛 섬광이 번뜩였다.
검날이 허공을 갈라 괴물의 가슴을 꿰뚫었다.
카시안이 시우의 앞을 가로막으며 내려섰다.
그의 은색 갑옷은 이미 핏물로 검게 변해 있었다.
검 끝에서 떨어진 오러가 지면을 일직선으로 베었다.
카시안의 눈동자 속 검은 그림자가 더 짙어졌다.
영혼 예속의 낙인이 그의 목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럼에도 그는 망설임 없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과거의 동료였던 괴물들의 목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가라, 한시우."
카시안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며 공기를 울렸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검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시우는 그의 등을 뒤로하고 황궁 내부로 달렸다.
복도 벽에 걸린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가 비웃듯 걸려 있었다.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날카롭게 튀었다.
공허의 마력이 주변의 산소를 게걸스럽게 삼켰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뒤편에서 카시안의 처절한 기합 소리가 멀어졌다.
무너진 천장 사이로 붉은 달빛이 스며들었다.
바닥에 뒹구는 부서진 증폭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 바르가스가 만지작거리던 고대 유물과 닮았다.
모든 것이 이 거대한 연극의 소품처럼 느껴졌다.
기록 보관소에서 보았던 실험체 기록들이 떠올랐다.
사백이호라는 명칭이 뇌리를 송곳처럼 찔렀다.
손톱 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방울이 맺혔다.
죽어간 빙의자들의 원혼이 귓가에서 울부짖었다.
알현실로 향하는 거대한 황금 문이 나타났다.
문 표면에는 무수한 이름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한시우라는 세 글자가 가장 하단에 선명했다.
심장의 고동이 세계수의 진동과 완벽히 일치했다.
눈앞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차원 균열이 일었다.
공허의 힘을 끌어올려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스몄다.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숨을 조였다.
이것은 단순한 권력이 아닌 근원적인 공포였다.
시우는 거칠게 문을 밀어젖히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넓은 알현실 내부에는 오직 정적만이 가득했다.
천장의 거대한 샹들리에가 힘없이 흔들렸다.
옥좌 주위로 보랏빛 안개가 유령처럼 떠다녔다.
단상 위에 비스듬히 앉은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와인 잔을 든 채 창밖의 전란을 구경했다.
시우의 발소리가 옥좌 바로 앞까지 이어졌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우를 응시했다.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에 발걸음이 굳어버렸다.
거울을 마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남자의 얼굴은 시우와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다만 세월의 풍파를 겪은 듯 눈가에 주름이 깊었다.
지구에서 자신을 선로로 밀었던 그 사내였다.
중년의 남자가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드디어 돌아왔군, 나의 가장 완벽한 실패작."
남자의 목소리가 알현실 벽을 타고 음산하게 퍼졌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마력이 실타래처럼 엉켰다.
시우는 공허의 칼날을 세우며 남자를 겨누었다.
가슴 속 핵이 터질 듯한 통증과 함께 요동쳤다.
남자가 옥좌에서 일어나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의 걸음마다 바닥의 대리석이 검게 타들어 갔다.
이방인 말살령의 주동자이자 시스템의 설계자였다.
그는 시우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걸음을 멈췄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남자가 시우의 뺨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
시우는 반사적으로 남자의 손목을 낚아챘다.
혈관 속을 흐르는 마력이 차갑게 공명했다.
"이것이 너희가 원하던 영생인가? 추하고 가련하군."
시우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남자는 대답 대신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알현실 바닥에서 검은 촉수들이 솟구쳐 올랐다.
세계수 에르드의 뿌리가 성소 바닥을 뚫고 나온 것이다.
뿌리들은 시우의 사지를 옭아매며 파고들었다.
공허의 마력이 뿌리와 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남자가 시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뜨거운 숨결이 소름 끼치는 감각으로 전해졌다.
그는 시우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극심한 발작이 시우의 전신을 강타했다.
"너는 나를 죽일 수 없어, 한시우."
남자의 손이 시우의 가슴 안으로 직접 파고들었다.
살점이 찢기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선명했다.
시우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남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공허의 불꽃이 두 사람의 신체를 태우기 시작했다.
남자의 피부가 벗겨지며 기계 장치가 드러났다.
인간의 육체 아래 숨겨진 거대한 마력 증폭기였다.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더욱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시우의 심장, 공허의 핵을 직접 만지려는 의도였다.
시야가 붉게 물들며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서 방랑자 부족의 노래가 환청처럼 들렸다.
노래는 폭주하던 공허의 힘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시우는 남은 힘을 쥐어짜 남자의 가슴을 걷어찼다.
결속이 풀리며 두 신체가 멀리 튕겨 나갔다.
시우는 바닥을 구르며 피 섞인 침을 뱉어냈다.
가슴의 상처에서 보랏빛 연기가 끊임없이 솟았다.
남자는 흐트러진 옷가지를 갈무리하며 다시 섰다.
그의 가슴에 난 구멍이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재생되는 근육 조직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그것은 생명체의 치유가 아닌 기계적인 수복이었다.
남자가 다시 손을 뻗자 공간 자체가 수축했다.
시우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 검을 고쳐 쥐었다.
심장의 박동이 이제는 남자의 심장과 공명했다.
두 개의 핵이 하나의 파동으로 묶인 상태였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내가 죽으면 아르카디아도 끝이다."
남자가 비웃으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알현실의 거대한 기둥들이 단숨에 가루로 변했다.
천장이 무너지며 쏟아진 돌무더기가 시우를 덮쳤다.
시우는 공허의 폭풍을 일으켜 파편들을 밀어냈다.
먼지 구름 너머로 남자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괴물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감각을 읽었다.
그것은 공포가 아닌, 오래된 증오의 완성에 가까웠다.
남자의 존재가 곧 시스템 그 자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자를 지우면 모든 비극이 끝날 터였다.
시우는 공허의 핵에 자신의 모든 영혼을 쏟아부었다.
남자의 눈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자폭에 가까운 마력 방출에 남자가 뒷걸음질 쳤다.
시우의 신체 곳곳에서 검은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고 남자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남자가 다급히 방어막을 펼쳤으나 공허는 그것을 씹어 삼켰다.
칼날이 남자의 기계 심장 외벽을 긁으며 불꽃을 냈다.
남자는 시우의 어깨를 움켜쥐고 바닥으로 내리눌렀다.
거대한 충격에 알현실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시우는 바닥에 박힌 채 남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남자의 눈동자 너머로 수천 개의 영혼이 비명 지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지구에서 사라진 수많은 이방인의 얼굴이 있었다.
"너는 그저 연료일 뿐이야, 사백이호."
남자가 시우의 목을 조르며 힘을 주었다.
시우의 혀끝에서 비릿한 금속 맛이 느껴졌다.
시야가 가물거리는 순간, 품 안에서 무언가 진동했다.
레나가 주었던 낡은 마력석 조각이었다.
보랏빛으로 변했던 조각이 백색 광휘를 내뿜었다.
광휘는 남자의 검은 마력을 정화하며 타올랐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시우의 목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의 손바닥이 산을 뿌린 듯 녹아내리고 있었다.
시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허의 칼날을 찔러 넣었다.
칼날은 남자의 기계 심장 정중앙을 관통했다.
남자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남자가 시우의 어깨를 잡고 힘없이 쓰러졌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신음하면서도 시우를 향해 웃었다.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피가 아닌 검은 기름이었다.
남자의 신체가 점점 투명하게 변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시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은 승리자의 선언이 아닌, 저주에 가까운 예언이었다.
알현실 외부에서 거대한 진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세계수 에르드가 단말마를 내지르며 붕괴하고 있었다.
남자의 신체가 완전히 소멸하기 직전, 그의 눈이 빛났다.
시우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손목에 채워진 장치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현재 시각이 아닌, 낯익은 카운트다운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네 차례다, 다음 회차의 나."